수군거리는 사람들 뒤로 조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발의 노파가 지팡이를 짚은 채, 하인의 부축을 받으며 기안대군의 저택 대문에 나타났다.
모영기는 살짝 당황한 얼굴로 노파를 불렀다.
“외할머니.”
노파는 모영기의 외조모이자 안국공의 부인이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노파는 바닥의 핏자국을 보더니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녀는 핏기가 가신 창백한 입술을 깨물며 숨을 몰아쉬었다.
“얼른 왕자빈마마를 저택으로 모시고 의원을 부르거라. 이러다 사람 목숨이 위험하겠구나.”
“이 여인은 제집에 발을 들일 자격이 없습니다!”
모영기의 어조는 아주 단호했다.
한청연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참으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할머님의 뜻은 감사하나 저하도, 저도 이 혼인을 원하지 않으니 이렇게 떠나는 게 맞는 처사인 듯합니다.”
그녀는 고개를 쳐들고 싸늘한 눈빛으로 모영기와 그의 옆에 애처롭게 서 있는 한청낭을 힐끗 보더니 도순에게 말했다.
“이만 가자꾸나.”
도순은 멍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평소 나약하기만 하던 아씨가 왜 갑자기 날카롭고 매서워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어디로 갈 수 있다는 말인가?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있듯이 시집간 딸은 남이나 다름없었다. 좌의정 댁에서 그들을 받아줄지 도순은 알 수 없었다.
노파는 초조한 얼굴로 지팡이를 든 채, 바닥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대비마마의 명으로 진행하는 혼인인데 말 한마디로 없던 일이 될 수 있겠느냐? 영기야, 뭐 하고 있는 것이냐?”
모영기는 눈물을 흘리는 한청낭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제 부인의 자리는 원래도 한씨 가문의 둘째 아씨 자리였습니다. 마침 잘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아이는 서출이지 않느냐?”
“인품에 하자가 있는 누구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노파는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순간 심장에 무리가 가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손발을 부들부들 떨며 눈을 까뒤집었다.
모영기는 안색이 크게 변하며 성큼성큼 걸어와 기절한 노파를 안았다.
“외할머니, 왜 그러십니까?”
“아까 폭죽 하나가 노마나님 발치에서 터지는 바람에 크게 놀라셨습니다. 약을 드셨는데 왜 더 심각해지신 것 같지요?”
노태군의 측근 어멈이 횡설수설했다.
옆에 있던 의원은 이 말에 다급히 다가와 노태군의 맥을 짚었다. 순간 그는 깜짝 놀라서 몸을 벌벌 떨며 말했다.
“이… 이건…”
“얼른 치료하지 않고 뭐 하는 짓이냐?”
모영기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재촉했다.
의원은 용기를 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울화로 인한 심장병에, 고질병이 도졌습니다. 이건 제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측근 어멈은 조바심에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그럼 얼른 노마나님을 저택으로 모셔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희 저택의 의원이 그러는데 병이 또 도진다면 지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목숨이 위험하다면서요!”
돌아섰던 한청연은 뒤에서 들리는 소란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인들이 마차를 준비하는 등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한청연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심장병이라면 절대 몸을 이동해서는 안됩니다!”
모영기는 싸늘하게 그녀를 보더니 짜증 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리 비키시오!”
한청연은 가슴을 움켜쥔 채, 평온한 눈길로 모영기를 보며 말했다.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니 가볍게 하는 말 아닙니다. 할머님의 목숨을 살리고 싶으시다면 지금 당장 우리 둘의 사적인 일은 내려놓고 제 말을 들어주세요. 사람들더러 모두 나가라고 하고 할머님의 저고리와 허리띠를 풀어주어 숨이 잘 쉬어지게 해야 합니다.”
“할머님의 목숨이 위급한 상황이에요. 의술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언니가 함부로 나서면 안되지요.”
한청낭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모영기는 노기에 찬 얼굴로 실눈을 뜨더니 말했다.
“지금 비키지 않는다면 가만두지 않겠소!”
호의가 무시당한 한청연은 말을 해봤자 쓸모가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희망을 의원에게 돌렸다.
“얼른 방법을 대보시게!”
의원은 숨을 크게 내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노마나님은 지금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안국공부에 사람을 보내 의원을 불러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소인이 시침을 해볼 생각입니다. 의술 서적에서 심장 질환 환자에 특효라고 나온 침술법 말입니다.”
당황해서 정신이 반쯤 나간 모영기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의원의 말대로 사람을 불러 의원을 모셔오게 했다. 그리고 그는 의원이 시침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주변을 둘러싼 하객들은 긴장하여 숨도 크게 내쉬지 못했다.
시간이 잠깐 지났을 때, 의원이 창백한 얼굴로 손을 떨며 말했다.
“아… 안 되겠습니다. 마… 마나님의 심장박동이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퍽!
모영기는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그러자 바닥의 흙모래가 사방으로 날렸다.
“한청연, 그 입 다물라!”
그러나 한청연은 뒤로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앞으로 다가왔다.
“제가 해볼게요!”
“언니, 할머님 화나게 한 거로 불안한 마음은 알겠는데 되지도 않는 일에 나서면 안 되죠.”
옆에서 한청낭이 쫑알거렸다.
모영기는 아예 손을 들어 한청연을 밀치기까지 했다.
위기의 순간, 한청연은 허리에 무언가가 닿더니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발이 바닥에서 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그녀는 모영기의 무시무시한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형님, 왕자빈마마께서는 할머니를 구하고 싶으신 마음에 내린 결정이신데 왜 이렇게 모질게 대하시는 것입니까? 왕자빈마마는 이미 중상을 입으신 몸입니다.”
모영기는 이를 악물고 차갑게 대꾸했다.
“심인붕(沈临风), 이건 내 집안일이니 네가 끼어들 게 못된다.”
한청연은 한참 뒤에야 어지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죽다가 살아난 것을 알게 된 한청연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반듯한 옷차림의 준수한 남자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바로 안국공의 손자이자 모영기의 사촌동생 심인붕이었다.
도순은 황급히 앞으로 뛰어오더니 쓰러질 것 같은 한청연을 부축했다. 한청연은 가슴을 움켜쥔 채, 눈살을 찌푸리고 모영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저하와 혼례를 치른 게 아니니 집안일이 아니지요. 저하도 저를 해칠 권리가 없습니다. 지금 저는 할머님을 구하려고 간청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한마디만 여쭙지요. 구할 것인가요? 말 것인가요? 구하지 않겠다고 하신다면 지금 바로 떠나 집으로 갈 것입니다. 간덩이가 부은 제가 설마 명을 거역하는 일로 겁먹을 것 같습니까?”
그녀의 놀랄 만큼 단호한 어조에 모영기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왕자빈마마의 의술을 당연히 믿습니다. 제발 제 할머니를 구해주십시오.”
한청연은 원래 이 일에서 손을 떼려고 했다. 하지만 노태군이 심장병으로 쓰러진 게 자신의 책임도 있는 데다가 심인붕이 간절하게 부탁하자 그녀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아픈 몸으로 노태군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의원에게서 은침을 받아들었다.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정확하게 혈자리에 침을 꽂은 뒤, 손끝으로 침을 튕겼다. 그러자 은침에서는 ‘윙윙’소리가 나며 마구 흔들렸다.
의원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봉명침(蜂鸣针)이잖아! 이럴 수가?”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또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저런 일이!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봉명침이잖아? 그런데 백 년 넘게 사라진 침술을 집에서만 곱게 자란 대갓집 규수가 어떻게 안다는 말이야?”
한편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한청연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심인붕은 이 모습이 몹시 안쓰러웠다.
“왕자빈마마…”
한청연은 땀을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버티기 힘들어서 한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이를 악물고 시침했다.
주변은 아주 조용하여 침 흔들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한청낭은 모영기의 몸에 기댄 채, 나지막한 소리로 그에게 위로를 건넸다. 모영기는 차가운 눈빛으로 한청연의 꼿꼿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움켜쥘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