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2화 명을 거역하는 게 두렵겠어요?

  • “잠깐!”
  • 수군거리는 사람들 뒤로 조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발의 노파가 지팡이를 짚은 채, 하인의 부축을 받으며 기안대군의 저택 대문에 나타났다.
  • 모영기는 살짝 당황한 얼굴로 노파를 불렀다.
  • “외할머니.”
  • 노파는 모영기의 외조모이자 안국공의 부인이었다.
  • “이게 뭐 하는 짓이냐?”
  • 노파는 바닥의 핏자국을 보더니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녀는 핏기가 가신 창백한 입술을 깨물며 숨을 몰아쉬었다.
  • “얼른 왕자빈마마를 저택으로 모시고 의원을 부르거라. 이러다 사람 목숨이 위험하겠구나.”
  • “이 여인은 제집에 발을 들일 자격이 없습니다!”
  • 모영기의 어조는 아주 단호했다.
  • 한청연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참으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 “할머님의 뜻은 감사하나 저하도, 저도 이 혼인을 원하지 않으니 이렇게 떠나는 게 맞는 처사인 듯합니다.”
  • 그녀는 고개를 쳐들고 싸늘한 눈빛으로 모영기와 그의 옆에 애처롭게 서 있는 한청낭을 힐끗 보더니 도순에게 말했다.
  • “이만 가자꾸나.”
  • 도순은 멍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평소 나약하기만 하던 아씨가 왜 갑자기 날카롭고 매서워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어디로 갈 수 있다는 말인가?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있듯이 시집간 딸은 남이나 다름없었다. 좌의정 댁에서 그들을 받아줄지 도순은 알 수 없었다.
  • 노파는 초조한 얼굴로 지팡이를 든 채, 바닥을 두드리며 말했다.
  •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대비마마의 명으로 진행하는 혼인인데 말 한마디로 없던 일이 될 수 있겠느냐? 영기야, 뭐 하고 있는 것이냐?”
  • 모영기는 눈물을 흘리는 한청낭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 “제 부인의 자리는 원래도 한씨 가문의 둘째 아씨 자리였습니다. 마침 잘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 “그 아이는 서출이지 않느냐?”
  • “인품에 하자가 있는 누구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 노파는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순간 심장에 무리가 가서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손발을 부들부들 떨며 눈을 까뒤집었다.
  • 모영기는 안색이 크게 변하며 성큼성큼 걸어와 기절한 노파를 안았다.
  • “외할머니, 왜 그러십니까?”
  • “아까 폭죽 하나가 노마나님 발치에서 터지는 바람에 크게 놀라셨습니다. 약을 드셨는데 왜 더 심각해지신 것 같지요?”
  • 노태군의 측근 어멈이 횡설수설했다.
  • 옆에 있던 의원은 이 말에 다급히 다가와 노태군의 맥을 짚었다. 순간 그는 깜짝 놀라서 몸을 벌벌 떨며 말했다.
  • “이… 이건…”
  • “얼른 치료하지 않고 뭐 하는 짓이냐?”
  • 모영기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재촉했다.
  • 의원은 용기를 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울화로 인한 심장병에, 고질병이 도졌습니다. 이건 제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 측근 어멈은 조바심에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 “그럼 얼른 노마나님을 저택으로 모셔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희 저택의 의원이 그러는데 병이 또 도진다면 지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목숨이 위험하다면서요!”
  • 돌아섰던 한청연은 뒤에서 들리는 소란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인들이 마차를 준비하는 등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한청연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 “심장병이라면 절대 몸을 이동해서는 안됩니다!”
  • 모영기는 싸늘하게 그녀를 보더니 짜증 난 얼굴로 입을 열었다.
  • “저리 비키시오!”
  • 한청연은 가슴을 움켜쥔 채, 평온한 눈길로 모영기를 보며 말했다.
  •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니 가볍게 하는 말 아닙니다. 할머님의 목숨을 살리고 싶으시다면 지금 당장 우리 둘의 사적인 일은 내려놓고 제 말을 들어주세요. 사람들더러 모두 나가라고 하고 할머님의 저고리와 허리띠를 풀어주어 숨이 잘 쉬어지게 해야 합니다.”
  • “할머님의 목숨이 위급한 상황이에요. 의술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언니가 함부로 나서면 안되지요.”
  • 한청낭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 모영기는 노기에 찬 얼굴로 실눈을 뜨더니 말했다.
  • “지금 비키지 않는다면 가만두지 않겠소!”
  • 호의가 무시당한 한청연은 말을 해봤자 쓸모가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희망을 의원에게 돌렸다.
  • “얼른 방법을 대보시게!”
  • 의원은 숨을 크게 내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 “노마나님은 지금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안국공부에 사람을 보내 의원을 불러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소인이 시침을 해볼 생각입니다. 의술 서적에서 심장 질환 환자에 특효라고 나온 침술법 말입니다.”
  • 당황해서 정신이 반쯤 나간 모영기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의원의 말대로 사람을 불러 의원을 모셔오게 했다. 그리고 그는 의원이 시침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주변을 둘러싼 하객들은 긴장하여 숨도 크게 내쉬지 못했다.
  • 시간이 잠깐 지났을 때, 의원이 창백한 얼굴로 손을 떨며 말했다.
  • “아… 안 되겠습니다. 마… 마나님의 심장박동이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 퍽!
  • 모영기는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그러자 바닥의 흙모래가 사방으로 날렸다.
  • “한청연, 그 입 다물라!”
  • 그러나 한청연은 뒤로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앞으로 다가왔다.
  • “제가 해볼게요!”
  • “언니, 할머님 화나게 한 거로 불안한 마음은 알겠는데 되지도 않는 일에 나서면 안 되죠.”
  • 옆에서 한청낭이 쫑알거렸다.
  • 모영기는 아예 손을 들어 한청연을 밀치기까지 했다.
  • 위기의 순간, 한청연은 허리에 무언가가 닿더니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발이 바닥에서 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그녀는 모영기의 무시무시한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형님, 왕자빈마마께서는 할머니를 구하고 싶으신 마음에 내린 결정이신데 왜 이렇게 모질게 대하시는 것입니까? 왕자빈마마는 이미 중상을 입으신 몸입니다.”
  • 모영기는 이를 악물고 차갑게 대꾸했다.
  • “심인붕(沈临风), 이건 내 집안일이니 네가 끼어들 게 못된다.”
  • 한청연은 한참 뒤에야 어지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죽다가 살아난 것을 알게 된 한청연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반듯한 옷차림의 준수한 남자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바로 안국공의 손자이자 모영기의 사촌동생 심인붕이었다.
  • 도순은 황급히 앞으로 뛰어오더니 쓰러질 것 같은 한청연을 부축했다. 한청연은 가슴을 움켜쥔 채, 눈살을 찌푸리고 모영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 “아직 저하와 혼례를 치른 게 아니니 집안일이 아니지요. 저하도 저를 해칠 권리가 없습니다. 지금 저는 할머님을 구하려고 간청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한마디만 여쭙지요. 구할 것인가요? 말 것인가요? 구하지 않겠다고 하신다면 지금 바로 떠나 집으로 갈 것입니다. 간덩이가 부은 제가 설마 명을 거역하는 일로 겁먹을 것 같습니까?”
  • 그녀의 놀랄 만큼 단호한 어조에 모영기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 “왕자빈마마의 의술을 당연히 믿습니다. 제발 제 할머니를 구해주십시오.”
  • 한청연은 원래 이 일에서 손을 떼려고 했다. 하지만 노태군이 심장병으로 쓰러진 게 자신의 책임도 있는 데다가 심인붕이 간절하게 부탁하자 그녀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아픈 몸으로 노태군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의원에게서 은침을 받아들었다.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정확하게 혈자리에 침을 꽂은 뒤, 손끝으로 침을 튕겼다. 그러자 은침에서는 ‘윙윙’소리가 나며 마구 흔들렸다.
  • 의원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 “봉명침(蜂鸣针)이잖아! 이럴 수가?”
  •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또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 “어떻게 저런 일이!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봉명침이잖아? 그런데 백 년 넘게 사라진 침술을 집에서만 곱게 자란 대갓집 규수가 어떻게 안다는 말이야?”
  • 한편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한청연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 심인붕은 이 모습이 몹시 안쓰러웠다.
  • “왕자빈마마…”
  • 한청연은 땀을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버티기 힘들어서 한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이를 악물고 시침했다.
  • 주변은 아주 조용하여 침 흔들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 한청낭은 모영기의 몸에 기댄 채, 나지막한 소리로 그에게 위로를 건넸다. 모영기는 차가운 눈빛으로 한청연의 꼿꼿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움켜쥘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또 일다경쯤 지나자 한청연은 노태군의 목에 손을 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잠시는 위험에서 벗어나셨어요. 그러나…”
  •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 정신이 아득해지는 한편으로 귓가에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 “깨어나셨어요! 노마나님이 깨어나셨어요!”
  • 그녀는 그제야 안심하고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