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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과다출혈

  • ‘첫날밤의 피를 닦은 수건이라고? 무슨 규정이 이렇게 변태 같아? 부부 사이의 은밀한 사정을 꼭 이렇게 남에게 보여주고 평가받아야 하나? 설마 피의 색깔이나 핏자국 모양에 대해서도 요구가 있는 게 아니겠지? 게다가 나는 숫처녀의 몸도 아닌데 그런 피가 날 리 없잖아. 아니지, 설사 숫처녀가 맞다고 해도 기안대군과 합방한 적도 없는데 무슨 피를 닦아?’
  • 무릎을 꿇고앉은 한청연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때, 옆에 있던 모영기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 “어제 부인이 부상을 입어 합방하지 못했습니다.”
  • 한청연은 흠칫 놀랐다. 그녀는 자신을 증오하는 모영기가 입궐하자마자 자신이 숫처녀의 몸이 아니라는 것을 까발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만 한다면 대비는 틀림없이 그녀에게 엄벌을 내릴 것이고 모영기는 원하던 대로 한청낭과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 그런데 모영기가 먼저 나서서 이 상황을 모면할 줄이야. 한청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준수한 모영기의 얼굴에는 여전히 혐오의 빛이 어려 있었다. 그는 한청연에게 시선도 돌리지 않고 일부러 그녀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 ‘내가 불쌍해서 이러는 건가? 아니면 사내의 자존심에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어서? 그것도 아니면 왕실의 체통을 위해서?’
  • “소인이 감히 여쭙는 건데 그럼 측빈마마의 수건은 가져오셨습니까?”
  • 혜빈은 눈살을 찌푸렸다.
  • “너 설마 어제 둘째의 방에서 묵은 것이냐?”
  • 모영기는 고개를 저었다.
  • “소자 어제 외할머니의 건강이 염려되어 외할아버지 댁으로 갔다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서재에서 묵었지요.”
  • 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음’하고 소리를 냈다.
  • “너는 왕실의 사람이니 절대 체통을 잘 지켜야 하고 뭐든 분수에 맞게 처사해야 한다. 네가 한씨 가문의 둘째를 마음에 품은 걸 알고 대비마마께서 은혜를 베풀어 그 아이도 함께 맞아들이게 하셨지 않느냐? 앞으로 시간이 많으니 마음을 급히 먹지 말고 정실과 첩실의 기강을 바로잡아 대비마마께 심려를 끼치는 일을 하지 말거라.”
  • 혜빈이 자신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그녀를 꾸짖지도 않았지만 한청연은 혜빈의 말에서 자신에 대한 불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모영기가 혼례를 취소하겠다고 말하기만을 기다렸다.
  • 하지만 예상과 달리 모영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 “어마마마의 말씀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 혜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궁녀는 재빨리 대추차 두 잔을 내오더니 모영기와 한청연의 앞에 올려놓았다.
  • 차는 자고로 심은 뒤, 옮길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평생 함께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기도 했다. 신혼 부부가 시어머니에게 차를 권하는 것은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받아들인다는 말이기도 했다.
  • 그래서 한청연은 저도 모르게 머뭇거리게 되었다.
  • ‘이 차를 권해? 말아?’
  • 모영기도 찻잔을 받지 않았지만 일어서지도 않았다. 둘은 그렇게 정적에 휩싸인 채, 누구도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 “어마마마, 소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할 말이 있거든 차를 권하고 난 뒤에 말하거라.”
  • 혜빈은 뒤에 서 있는 상궁을 힐끗 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 모영기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일어서서 찻잔을 머리 위로 든 채, 혜빈에게 올렸다. 혜빈은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신 뒤,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궁녀는 쟁반을 들고 한청연의 옆으로 다가갔다. 한청연은 방금 전 혜빈의 눈길에서 그녀가 기 상궁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눈치 빠르게 두 손으로 찻잔을 들었다.
  • 궁녀가 쟁반을 치우자 한청연은 찻잔이 끓는 물에 담근 것처럼 뜨겁다는 것을 느꼈다.
  • ‘아니지, 불에 구웠나? 펄펄 끓는 쇳물에 담근 것처럼 왜 이렇게 뜨거운 거야?’
  • 그녀는 뜨거운 찻잔에 손이 닿는 순간 찻잔을 던지고 말았다.
  • 한청연과 모영기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꿇고 있었는데 찻잔이 떨어지면서 둘의 몸에 차가 튀었다. 그녀도 손끝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숨을 들이쉬었다.
  • 하얗던 손끝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 모영기는 힘줄이 솟은 이마를 찌푸리며 싸늘하게 말했다.
  • “부인, 일부러 그런 것이오?”
  • 혜빈도 벌떡 일어서서 화를 내려고 했지만 무슨 생각에서인지 화를 꾹 참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 “이게 무슨 일이냐? 몸의 상처가 심해서 찻잔을 들기 힘든 것이냐?”
  • 한청연이 고개를 들자 혜빈의 눈에 드리운 싸늘한 기색이 보였다. 그녀는 바로 혜빈의 말이 연기라는 것을 알아챘다. 동시에 혜빈의 뒤에 서 있는 상궁이 대비마마의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혜빈이 어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고 자애로운 모습만 보이는 것 같았다.
  • ‘그렇다면 혜빈마마도 어제 일을 조용히 넘기고 싶어한다는 얘기인데 누가 찻잔에 수작을 부린 거지? 나에게 골탕을 먹일 만한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 지금은 찻잔이 깨진 상태라 온도도 내려가서 그녀가 아무리 해명해도 믿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괜히 그녀가 유난을 떤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 그녀는 데어서 빨갛게 된 손가락을 소매 안으로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 “염려를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어마마마. 방금 전에는 손이 떨려 제대로 들지 못 했사옵니다.”
  • 혜빈은 딱딱하게 웃으며 말했다.
  • “아니다, 네가 아픈 몸이라는 것을 깜빡 잊었구나. 또 다칠라 얼른 일어나거라.”
  • 한청연이 힘겹게 일어나자 눈치 빠른 기 상궁이 바로 작별을 고했다.
  • “왕자빈마마께서 옥체 불편하다고 하시니 소인은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 혜빈마마.”
  • 혜빈은 온화한 표정으로 몇 마디 인사치레를 한 뒤, 궁녀를 불러 기 상궁을 배웅하도록 했다. 기 상궁이 나간 뒤, 혜빈의 얼굴은 얼음이라도 낀 것처럼 차가워졌다. 그녀는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
  • “네 안색이 말이 아니구나. 몸이 불편한 것이냐, 아니면 대비마마의 사람이 보는 앞에서 나를 골탕 먹이려고 한 짓이냐?”
  • 한청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옆에 서서 평온하게 대답했다.
  • “아닙니다, 아마도 과다출혈 때문인 듯합니다.”
  • “과다출혈?”
  • 혜빈은 피식 웃더니 탁자를 쾅 하고 내리쳤다.
  •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잘 좀 얘기해 보아라. 혼례날에 자결이라니, 너 때문에 온통 시끄럽구나. 어머님은 병으로 쓰러지셨고 나 역시도 다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이게 무슨 일이냐? 내 아들이 좌의정 댁 아가씨인 너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 한청연은 억울하고 답답했다. 몸 주인이 아이를 밴 탓에 그녀가 지금 다른 사람의 질책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결국 이 몸이 잘못한 것이기에 그녀는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 “소첩이 저하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모영기는 이때다 싶어 찾아온 의도를 밝혔다.
  • “소자는 전하와 할마마마께 혼인을 취하하거나 기별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드리러 온 것입니다. 소자는 둘째 낭자를 정실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 그의 말을 들은 혜빈은 멍하니 있다 버럭 화를 냈다.
  • “말도 안 되는 소리! 세상에 다투지 않는 부부가 어디 있다더냐? 작은 갈등 때문에 죽네 사네 하는 게 가당키나 한 짓이냐? 기별이라고? 네 안중에 전하와 대비마마가 있기라도 한 것이냐?”
  • 한청연은 기 상궁도 떠났겠다, 원래도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혜빈이 바로 허락할 줄 알았다. 그런데 혜빈이 생각도 하지 않고 반대할 줄이야.
  • 혜빈은 눈앞에 있는 며느리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어제 일어난 소동 때문에 빈정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그녀는 세상 모든 시어머니처럼 새색시 며느리의 기를 죽이고 싶었다.
  • 하지만 한청연은 좌의정 댁의 적통 여식이기에 가문 배경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대비가 직접 추진한 혼인이기에 더욱 그랬다. 만약 모영기가 자꾸 한청연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대비도 기분이 나쁠 수 있고 좌의정 댁과 척을 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여러가지 상황을 생각한 결과, 그녀는 대비의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한청연을 다정히 대해주었다.
  • “소자 이미 정한 일이니 어마마마께서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 모영기는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 “안 된다면 안 되는 것이다!”
  • 혜빈이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 “그 댁 둘째 여식이 마음에 들면 곁에 두고 마음껏 품으면 되지 않느냐? 너무 과한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누가 너한테 뭐라고 하겠느냐? 하지만 혼인하자마자 아무 이유 없이 기별이라니, 대비마마께서 노여워하시지 않겠느냐? 좌의정 나리의 체면은 또 뭐가 되겠느냐?”
  • 혜빈은 일부러 ‘아무 이유 없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 모영기는 싸늘한 눈빛으로 한청연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 “저희 둘이 모두 원해서 하는 일입니다. 단순히 소박을 놓는 게 아니라 합의로 이루어진 기별이라는 말입니다.”
  • 한청연도 목소리를 냈다.
  • “어마마마께서 허락해 주십시오.”
  • 셋의 고집에 방의 분위기는 딱딱하게 변했다.
  • 밖에서 궁녀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며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 “마마께 아룁니다. 안국공부(国公府)의 도련님께서 왕자빈마마를 급히 만나려고 하십니다.”
  • ‘심인붕? 날 왜 찾아온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