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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구경거리가 재미있소?

  • 깜짝 놀란 한청연은 부상도 잊은 채,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녀는 극심한 통증에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넘어졌다. 그러나 곧 다시 이를 악물고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 아까의 여인은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 “모두 보았지요? 제 배 속의 것은 물이란 말입니다. 이제 제가 결백하다는 게 밝혀졌지요? 이제는 다들 믿겠죠?”
  • 한청연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숨을 헐떡였다.
  • ‘이게 무슨 세상이란 말인가? 여인의 절개와 결백, 명예 따위가 그렇게 중요해?’
  • “절대 자네가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네. 자네는 분명 살 수 있을 테니 나를 믿어 보게. 지금 바로 수술을 시작하지. 여봐라, 얼른…’
  • 그러나 한청연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 ‘뭘 준비해야 하지? 무균 수술실? 링거? 매스? 이곳은 고대이니 의료 시설도 없을 건데 어떻게 살리지? 살린다고 해도 간병 말기인 것 같은데 치료는 어떻게 하지?’
  • 여인은 참담하게 웃으며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마님, 제 결백을 입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때, 그녀의 시어머니가 뛰어오더니 통곡하기 시작했다.
  • “네가 죽으면 이 늙은이 혼자서 어떻게 살라고 그러는 것이냐? 아이고…”
  • 옆에 있던 이웃이 혀를 찼다.
  • “이제야 며느리 소중한 것을 알겠소? 아까는 욕하고 때리면서 난리도 아니더니. 서방이 죽고 난 뒤에 재가도 하지 않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며느리가 어디 있다고.”
  • 또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시어머니를 질책했다.
  • 한청연은 무기력하게 여인이 눈을 감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도순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숨을 크게 들이쉰 그녀는 결국 버럭 화를 냈다.
  • “그만들 하시오! 언제까지 이리 떠들 것이오?”
  • 그러자 사람들은 바로 조용해졌다. 한청연은 빨개진 눈시울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스쳐보았다. 그리고 마차 위에서 차가운 표정으로 이 모든 것을 내려보고 있는 모영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 “자고로 세 치 혀가 사람을 죽이는 법이오. 자네들은 이미 죄 없는 이 여인을 말로 죽였는데 불쌍한 노인까지도 죽일 셈이오? 그런 비극이 일어나야 기쁘겠소? 구경거리가 재미있소? 재미있냐는 말이오?”
  • 곧이어 쥐 죽은 듯한 정적이 뒤따랐다.
  • 사람들은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도 없었다.
  • 한청연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천천히 마차로 돌아와 무기력하게 얼굴을 팔 사이에 묻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모영기는 말고삐를 잡은 손에 힘을 가한 채, 어두운 눈빛으로 처참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한청연이 마지막으로 한 말 때문에 마음이 복잡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 ‘그녀의 일을 대비마마께 아뢴다면 어떤 결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청연을 위로했다. 한청연은 한참 뒤에야 코맹맹이 소리로 입을 열었다.
  • “나는 참 쓸모없는 인간이야. 나노 반지만 있었다면 시도해 보았을 텐데.”
  • 도순은 의아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 “반지요? 이 가락지 말씀인가요?”
  • 한청연은 고개를 들고 도순의 손을 바라보았다. 보잘것없는 회색의 반지를 본 그녀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 ‘이럴 수가? 나노 반지잖아! 반지도 같이 고대로 온 거라고?’
  • “이거 맞아. 어디서 난 거야?”
  • “쇤네가 아씨 상처를 싸매다가 본 거예요. 쇠로 된 거라 비싼 것 같지 않아 그냥 제가 간직하고 있었어요.”
  • ‘비싼 것 같지 않다고? 이건 가치가 엄청난 건데!’
  • 한청연은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아주 상쾌한 느낌이 전해지며 사지로 뻗어갔다. 그녀는 머릿속에서 지령을 받고 비밀번호를 입력한 뒤, 분자 창고를 열었다. 첫 번째 미션은 자신의 몸을 스캔하는 것이었다.
  • 분자 창고에는 CT, NMR, MRI 등 의료 검사 기능이 모두 들어 있어 스캔 한 번이면 뇌파로 검사 결과를 모조리 알 수 있었다.
  • 그녀는 다행히 폐나 기타 내장이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상처가 깊은 탓에 피를 많이 흘려 회복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 그녀는 손을 옷소매에 넣은 채, 분자 창고에서 약품을 꺼내려고 시도해 보았다. 그런데 정말 가능할 줄이야! 죽다 살아난 것 같은 기쁨에 그녀는 손까지 덜덜 떨렸다.
  • “도순아,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문 좀 지키고 있어. 상처를 치료해야 하니까.”
  • 도순은 순순히 마차 문 쪽으로 옮겨가서는 문 발을 내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 한청연은 돌아서서 봉합실과 바늘, 파상풍약 등 수술용품을 꺼냈다. 그녀는 상처를 봉합한 뒤, 붕대로 감싸고 옷을 입었다. 때마침 마차도 궁문 앞에 도착했다.
  • 모영기는 말에서 내린 뒤, 말고삐를 궁문 앞에 있는 시위에게 건네주고는 한청연을 뒤돌아보지 않은 채, 혼자서 성큼성큼 들어갔다.
  • 몸집이 건장한 그는 바람을 일구며 힘차게 걸어갔다. 한편, 부상을 입은 한청연은 식은땀을 흘리며 힘겹게 그를 뒤따라갔다.
  • 모영기는 멀리 떨어진 한청연과 도순을 돌아보며 짜증 난 표정을 지었다.
  • 그는 한청연이 가벼운 외상을 입은 것뿐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뻔뻔스럽게 그에게 시집온 여인이 기별에 허락한 것은 분명 연기일 것이고, 어제 갑자기 쓰러진 것 역시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궁까지 오자 당황한 한청연이 일부러 아픈 척 시간을 끈다고 생각해 짜증이 났다.
  • 그는 먼저 임금이 거처하는 연경궁(衍庆宫)으로 갔으나 임금이 보이지 않았다. 내시는 임금과 대신들이 어서방(御书房)에서 국사를 논의하고 있으니 가지 말라고 했다.
  • 그는 발걸음을 돌려 대비마마의 자안궁으로 향했다. 대비의 측근 내시는 대비가 몸이 불편하여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 중전 역시도 그들을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그녀는 궁녀를 시켜 만약 둘이 입궐한다면 모영기의 생모인 혜빈에게 인사를 올리라고만 했다.
  • 그들은 모두 궁에 있지만 소문이 빨라 어제 기안대군 저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 둘을 만나지 않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실망한 것이 분명했다.
  • 돌아선 모영기의 얼굴은 아주 어두웠다. 그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한청연은 그에게 어디 가냐고 묻지도 않고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 궁 전체를 반쯤 돌았다. 죽을 듯이 지쳤을 때쯤에야 둘은 혜빈의 거처인 겸하전(蒹葭殿)에 도착했다. 땀에 젖은 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은 한청연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 궁녀는 공손한 자세로 둘을 안으로 데려갔다. 상석에 앉은 혜빈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한청연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왔느냐?”
  • 한청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모영기와 함께 혜빈에게 절을 올렸다. 아까 들어올 때 보았던 진주가 박힌 분홍색 자수 꽃신이 떠올랐다.
  • 혜빈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상궁은 둘에게 예를 올리고 입을 열었다.
  • “소인 대군마마와 왕자빈마마께 감축드리옵니다.”
  • 혜빈은 생글생글 웃더니 짐짓 꾸짖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탁자를 두드리는 봉선화 꽃물을 들인 손톱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 “경사방(敬事房)의 기(其) 상궁이 여기서 오전 내내 기다렸다. 너희 둘, 잠도 여간 많은 게 아니구나. 어찌 이제서야 온 것이냐?”
  • 상궁은 다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 “혜빈마마도 참, 소인은 혜빈마마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 일부러 일찍 온 것입니다.”
  • 한청연은 상황 파악이 빠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어제 혼례식에서 피운 소란이 얼마나 큰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일로 모영기의 외할머니가 고질병으로 쓰러졌으니 시어머니인 혜빈이 그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혜빈은 그녀를 다정하게 맞아주었다.
  • “소첩 잘못했습니다.”
  • 혜빈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싸늘한 눈빛에서는 웃음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 “수건을 꺼내 상궁에게 보여주어라.”
  • 한청연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 “수건이요?”
  • ‘무슨 수건을 말하는 거지?’
  • 혜빈은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옆에 있던 기 상궁이 나서서 말했다.
  • “첫날밤의 피를 닦은 수건 말입니다. 왕자빈마마, 경사방에서 확인을 거치고 책자에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