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 놀란 한청연은 부상도 잊은 채,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녀는 극심한 통증에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넘어졌다. 그러나 곧 다시 이를 악물고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아까의 여인은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모두 보았지요? 제 배 속의 것은 물이란 말입니다. 이제 제가 결백하다는 게 밝혀졌지요? 이제는 다들 믿겠죠?”
한청연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숨을 헐떡였다.
‘이게 무슨 세상이란 말인가? 여인의 절개와 결백, 명예 따위가 그렇게 중요해?’
“절대 자네가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네. 자네는 분명 살 수 있을 테니 나를 믿어 보게. 지금 바로 수술을 시작하지. 여봐라, 얼른…’
그러나 한청연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뭘 준비해야 하지? 무균 수술실? 링거? 매스? 이곳은 고대이니 의료 시설도 없을 건데 어떻게 살리지? 살린다고 해도 간병 말기인 것 같은데 치료는 어떻게 하지?’
여인은 참담하게 웃으며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님, 제 결백을 입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때, 그녀의 시어머니가 뛰어오더니 통곡하기 시작했다.
“네가 죽으면 이 늙은이 혼자서 어떻게 살라고 그러는 것이냐? 아이고…”
옆에 있던 이웃이 혀를 찼다.
“이제야 며느리 소중한 것을 알겠소? 아까는 욕하고 때리면서 난리도 아니더니. 서방이 죽고 난 뒤에 재가도 하지 않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며느리가 어디 있다고.”
또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시어머니를 질책했다.
한청연은 무기력하게 여인이 눈을 감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도순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숨을 크게 들이쉰 그녀는 결국 버럭 화를 냈다.
“그만들 하시오! 언제까지 이리 떠들 것이오?”
그러자 사람들은 바로 조용해졌다. 한청연은 빨개진 눈시울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스쳐보았다. 그리고 마차 위에서 차가운 표정으로 이 모든 것을 내려보고 있는 모영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고로 세 치 혀가 사람을 죽이는 법이오. 자네들은 이미 죄 없는 이 여인을 말로 죽였는데 불쌍한 노인까지도 죽일 셈이오? 그런 비극이 일어나야 기쁘겠소? 구경거리가 재미있소? 재미있냐는 말이오?”
곧이어 쥐 죽은 듯한 정적이 뒤따랐다.
사람들은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도 없었다.
한청연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천천히 마차로 돌아와 무기력하게 얼굴을 팔 사이에 묻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영기는 말고삐를 잡은 손에 힘을 가한 채, 어두운 눈빛으로 처참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한청연이 마지막으로 한 말 때문에 마음이 복잡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녀의 일을 대비마마께 아뢴다면 어떤 결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청연을 위로했다. 한청연은 한참 뒤에야 코맹맹이 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참 쓸모없는 인간이야. 나노 반지만 있었다면 시도해 보았을 텐데.”
도순은 의아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반지요? 이 가락지 말씀인가요?”
한청연은 고개를 들고 도순의 손을 바라보았다. 보잘것없는 회색의 반지를 본 그녀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럴 수가? 나노 반지잖아! 반지도 같이 고대로 온 거라고?’
“이거 맞아. 어디서 난 거야?”
“쇤네가 아씨 상처를 싸매다가 본 거예요. 쇠로 된 거라 비싼 것 같지 않아 그냥 제가 간직하고 있었어요.”
‘비싼 것 같지 않다고? 이건 가치가 엄청난 건데!’
한청연은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아주 상쾌한 느낌이 전해지며 사지로 뻗어갔다. 그녀는 머릿속에서 지령을 받고 비밀번호를 입력한 뒤, 분자 창고를 열었다. 첫 번째 미션은 자신의 몸을 스캔하는 것이었다.
분자 창고에는 CT, NMR, MRI 등 의료 검사 기능이 모두 들어 있어 스캔 한 번이면 뇌파로 검사 결과를 모조리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다행히 폐나 기타 내장이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상처가 깊은 탓에 피를 많이 흘려 회복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손을 옷소매에 넣은 채, 분자 창고에서 약품을 꺼내려고 시도해 보았다. 그런데 정말 가능할 줄이야! 죽다 살아난 것 같은 기쁨에 그녀는 손까지 덜덜 떨렸다.
“도순아,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문 좀 지키고 있어. 상처를 치료해야 하니까.”
도순은 순순히 마차 문 쪽으로 옮겨가서는 문 발을 내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한청연은 돌아서서 봉합실과 바늘, 파상풍약 등 수술용품을 꺼냈다. 그녀는 상처를 봉합한 뒤, 붕대로 감싸고 옷을 입었다. 때마침 마차도 궁문 앞에 도착했다.
모영기는 말에서 내린 뒤, 말고삐를 궁문 앞에 있는 시위에게 건네주고는 한청연을 뒤돌아보지 않은 채, 혼자서 성큼성큼 들어갔다.
몸집이 건장한 그는 바람을 일구며 힘차게 걸어갔다. 한편, 부상을 입은 한청연은 식은땀을 흘리며 힘겹게 그를 뒤따라갔다.
모영기는 멀리 떨어진 한청연과 도순을 돌아보며 짜증 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한청연이 가벼운 외상을 입은 것뿐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뻔뻔스럽게 그에게 시집온 여인이 기별에 허락한 것은 분명 연기일 것이고, 어제 갑자기 쓰러진 것 역시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궁까지 오자 당황한 한청연이 일부러 아픈 척 시간을 끈다고 생각해 짜증이 났다.
그는 먼저 임금이 거처하는 연경궁(衍庆宫)으로 갔으나 임금이 보이지 않았다. 내시는 임금과 대신들이 어서방(御书房)에서 국사를 논의하고 있으니 가지 말라고 했다.
그는 발걸음을 돌려 대비마마의 자안궁으로 향했다. 대비의 측근 내시는 대비가 몸이 불편하여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중전 역시도 그들을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그녀는 궁녀를 시켜 만약 둘이 입궐한다면 모영기의 생모인 혜빈에게 인사를 올리라고만 했다.
그들은 모두 궁에 있지만 소문이 빨라 어제 기안대군 저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 둘을 만나지 않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실망한 것이 분명했다.
돌아선 모영기의 얼굴은 아주 어두웠다. 그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청연은 그에게 어디 가냐고 묻지도 않고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 궁 전체를 반쯤 돌았다. 죽을 듯이 지쳤을 때쯤에야 둘은 혜빈의 거처인 겸하전(蒹葭殿)에 도착했다. 땀에 젖은 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은 한청연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궁녀는 공손한 자세로 둘을 안으로 데려갔다. 상석에 앉은 혜빈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한청연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왔느냐?”
한청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모영기와 함께 혜빈에게 절을 올렸다. 아까 들어올 때 보았던 진주가 박힌 분홍색 자수 꽃신이 떠올랐다.
혜빈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상궁은 둘에게 예를 올리고 입을 열었다.
“소인 대군마마와 왕자빈마마께 감축드리옵니다.”
혜빈은 생글생글 웃더니 짐짓 꾸짖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탁자를 두드리는 봉선화 꽃물을 들인 손톱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경사방(敬事房)의 기(其) 상궁이 여기서 오전 내내 기다렸다. 너희 둘, 잠도 여간 많은 게 아니구나. 어찌 이제서야 온 것이냐?”
상궁은 다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혜빈마마도 참, 소인은 혜빈마마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 일부러 일찍 온 것입니다.”
한청연은 상황 파악이 빠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어제 혼례식에서 피운 소란이 얼마나 큰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일로 모영기의 외할머니가 고질병으로 쓰러졌으니 시어머니인 혜빈이 그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혜빈은 그녀를 다정하게 맞아주었다.
“소첩 잘못했습니다.”
혜빈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싸늘한 눈빛에서는 웃음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