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심장이 불편할 때 드시는 비상약이에요. 가슴이 욱신거리고 두근거린다면 혀 아래에 넣고 녹여 드세요. 곧 효과를 보실 거예요.”
그러나 노태군은 여전히 언짢은 얼굴로 구시렁거렸다.
“그냥 이게 끝이냐?”
“저택에 필요한 약재가 없을 것 같아 소첩 집으로 돌아가 알약으로 만든 뒤, 다시 사람을 보내 가져오게 하겠사옵니다. 할머님은 제때에 챙겨 드시기만 하면 됩니다.”
노태군은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다른 자들이 뭘 안다고 그러냐? 저 아이들이 약을 잘못 줄까 걱정이 되지도 않느냐? 내일 네가 직접 가져오거라!”
속사포 같은 그녀의 말에 한청연은 멍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뭐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노태군은 피곤한 얼굴로 눈을 감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의 말을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항의였다.
국공 부인은 그녀의 옷자락을 잡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님의 뜻이니 왕자빈마마께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청연은 노태군이 왜 이러는지 바로 눈치채고 눈시울이 빨개졌다.
‘내가 전생에 무슨 복을 쌓았기에 이렇게 큰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대비마마와 노태군 마나님의 큰 총애를 받을까? 노태군 마나님은 날 지키시느라 애를 쓰시는군.’
안국공부에 유능한 의원이 없을 리 없었다. 그런데 노태군이 왜 굳이 심인붕을 시켜 궁에 가서 그녀를 불러내게 했을까?
한청연은 이 몸으로 깨어나는 순간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악의를 품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녀는 노태군에게서 처음으로 따뜻한 진심을 느꼈다. 순간 목이 멘 그녀는 시큰거리는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할머님. 소첩이 내일 다시 찾아 뵐 테니 푹 쉬십시오.”
노태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청연은 국공 부인과 함께 노태군의 방에서 나왔다. 방 밖에 있는 모영기의 표정은 기다리는 것에 짜증이 난 듯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 상태였다. 그는 둘이 나오는 것을 보고 다급히 국공 부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할머님은 어떠하십니까?”
국공 부인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머님은 대군마마의 일로 염려하셔서 그런 것이지요. 대군마마 얘기만 나오면 가슴이 답답하면서 숨이 잘 안 쉬어진다고 하시던데요. 이제는 두 분이 화해한 것을 보셨으니 안심이 되어 괜찮아지실 것입니다.”
모영기는 안색이 어두워졌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국공 부인은 웃으면서 농담을 건넸다.
“이게 다 의술에 능한 왕자빈마마 덕분이지요. 어머님도 왕자빈마마를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며칠간 마마께서 자주 여기에 오셔야 할 것 같으니 어머님께서 대군마마더러 왕자빈마마를 잘 보살피라고 하셨습니다.”
어른을 대할 때의 모영기는 평소와 달리 예의 바르고 공손하게 굴었다. 그의 차갑던 인상도 덩달아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한청연을 힐끗 보더니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물론이지요.”
모영기는 사람을 시켜 혜빈에게 말을 전하게 한 뒤, 정원을 빠져나왔다.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본 모영기는 코웃음을 치며 한청연을 보더니 화를 꾹 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외할머니께 무슨 짓을 했기에 외할머니가 이렇게 그대를 감싸주는 것이오?”
“저하는 참 연기를 잘하십니다. 아까는 저를 끔찍이 아끼는 척하셔서 제가 어제 괜한 소란을 피운 꼴이 된 게 아니겠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좌의정 댁 큰 아씨는 의술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름난 명의조차 어쩔 수 없는 심장병을 치료한 것이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요? 또 어떻게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봉명침을 둘 줄 아는 것이오?”
모영기는 그녀의 앞으로 바짝 다가들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다른 사람이 모른다고 해서 제가 모르는 법은 아니지요. 저하께서 잊으셨나 본데 저는 열 살이 되던 해에 시골에서 좌의정 댁으로 돌아왔습니다. 십 년간 저와 어머님, 그리고 오라버니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무리 저하라고 하셔도 다 알 수는 없겠지요. 내일 저는 또 안국공부로 와야 합니다. 저하께서 제가 노태군 마나님께 아부를 떨어 저하께 다른 수작을 걸까 걱정되신다면 따라오셔서 지켜보시면 되겠네요. 제가 아무런 기회도 잡지 못하게 말이지요.”
모영기는 콧방귀를 뀌더니 말했다.
“외할머니께서 나 때문에 걱정이 많으시지만 않았다면 나라고 그대와 함께 다니고 싶은 줄 아시오? 시간을 며칠 줄 테니 얼른 외할머니를 치료하시오. 그동안은 그대와 다른 일로 다투지 않겠소.”
한청연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저하께서 저까지 끌어들여 연기를 하시는 거라면 태도를 좀 더 좋게 할 수는 없나요? 그렇게 오만방자한 얼굴로 적선하는 것처럼 말씀하시니 기분이 영 안 좋네요.”
“우습군. 그대가 갖은 수를 써서 얻은 결과가 아니오? 그렇게 뻔뻔스럽게 기안대군부에 붙어 있는 것 역시 내 적선을 바란 게 아니오? 눈치가 있다면 헛된 기대를 품지 마시오. 그대를 보는 것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오.”
한청연은 고개를 들고 실눈을 뜬 뒤, 모영기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저하께서 병이 심하게 드셨군요. 약물로 치료할 수 없는 심각한 병이옵니다.”
모영기가 흠칫 놀랐다.
“그게 무슨 말이오?”
“저하의 병이 아주 심각하다는 말입니다.”
그녀의 미소는 봄날의 꽃처럼,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밝고 눈부셨다. 그녀의 눈에서 빛나는 반짝임을 본 순간, 모영기는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 대한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병이라는 말이오?”
한청연은 예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아도취가 심각하니 처방으로는 거울 보기가 있겠네요. 하루 세 번씩 보름 동안 치료하면 효과를 보실 것입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모영기를 지나쳐 저택 밖에 세워둔 초록색 가마를 탔다.
모영기는 그제야 한청연의 말속에 담긴 풍자의 뜻을 알아듣고 이를 꽉 악물었다. 그의 얼굴은 얼음이라도 낀 것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를 본 도순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고는 목을 움츠린 채, 조심스럽게 가마에 들어갔다.
모영기에게서 풍기는 살기는 전쟁터에서 갈고 닦은 것이었다. 도순은 모영기의 가까이에만 다가가도 몸이 떨렸지만 그녀의 상전인 한청연은 모영기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말을 할 때도 거리낌이 없었다.
‘조금만 늦게 가마를 탔더라면 대군마마께서 아씨를 벽으로 내던졌겠어.’
기안대군부로 돌아온 뒤, 도순은 한청연을 부축해 창고방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한청연은 방향을 틀어 안채(主院)의 방향으로 향했다.
도순이 다급히 그녀에게 귀띔했다.
“아씨, 저희가 묵는 곳은 저쪽이에요.”
한청연은 뒤에서 따라오는 힘찬 발소리를 느끼며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전하께서 직접 봉하신 왕자빈인데 창고방에 묵는다면 사람들이 저하를 두고 첩에게 정신이 팔려 조강지처를 구박한다고 하지 않겠어? 연기를 해도 제대로 해야지.”
“안채에 묵으려고? 그럴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오?”
“노태군 마나님은 저희 둘이 아주 잘 어울린다고 하셨습니다.”
“감히 외할머니로 날 협박하는 것이오?”
모영기의 표정이 대뜸 어둡게 가라앉았다. 숨막힐 것 같은 압박감이 한청연을 감쌌다.
한청연은 그의 기세에 굴하지 않고 고개를 쳐든 뒤,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와 기별하시기 전까지는 전하의 어명대로 저는 이 저택의 왕자빈입니다. 그러니 제가 안채에 묵는 것 역시 당연한 일 아닙니까? 겨우 이까짓 일을 두고 협박이라니요, 가당치도 않지요. 만약 제가 저하를 협박한다면 그건 분명 사람 목숨이 달린 큰 일일 것입니다.”
“나와 혼인한 것을 후회하는 척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는 안채까지 들어오고 싶다? 아주 내 잠자리에도 오르고 싶다고 말하지 그러오? 그대가 얼마나 더러운 여인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오?”
‘말을 참 더럽게 하네. 아주 악취가 진동해.’
한청연은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더럽다면 멀리 떨어지시면 될 것입니다. 제가 이곳을 떠나는 날, 안채에 불을 지르지요. 저하께는 돈도 많으시니 마음에 두신 여인이랑 이곳을 새롭게 지어 알콩달콩 지내시면 되겠네요.”
“이건 내 집이란 말이오!”
모영기는 화를 내며 씩씩거렸다.
한청연은 눈을 깜박이며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저쪽 뜰에서는 청낭이가 저하를 눈이 빠지게 기다릴 텐데 그곳에 가서 묵으시면 될 게 아닙니까? 청낭이는 틀림없이 저하를 기쁘게 해드릴 것입니다.”
한청연은 생긋 미소를 지어 보인 뒤, 그대로 모영기를 스쳐지나가 버렸다.
그곳에는 화가 나 얼굴이 벌게진 모영기만 씩씩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모영기는 뒤에서 펄쩍 뛰며 말했다.
“한청연, 적당히 하시오!”
도순은 겁이나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아씨, 대군마마께서 크게 화나신 것 같습니다.”
자꾸만 모영기의 심기를 건드리는 한청연 역시 심장이 두근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창고방의 위치가 너무 멀잖아? 우리가 그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누구 하나 알지 못할 거야. 안 그래?”
그제야 도순은 깜짝 놀랐다.
‘아씨가 모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안채에 묵으시려는 이유가 있었네. 대군마마께서 대비마마와 노마나님 때문에 어제처럼 아씨를 괴롭히지는 않을 거라지만 한청낭의 음모를 피하기는 어렵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