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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말을 참 더럽게 하네

  • 한청연은 한숨 섞인 미소를 지으며 남은 약을 노태군의 베개 옆에 두었다.
  • “이건 심장이 불편할 때 드시는 비상약이에요. 가슴이 욱신거리고 두근거린다면 혀 아래에 넣고 녹여 드세요. 곧 효과를 보실 거예요.”
  • 그러나 노태군은 여전히 언짢은 얼굴로 구시렁거렸다.
  • “그냥 이게 끝이냐?”
  • “저택에 필요한 약재가 없을 것 같아 소첩 집으로 돌아가 알약으로 만든 뒤, 다시 사람을 보내 가져오게 하겠사옵니다. 할머님은 제때에 챙겨 드시기만 하면 됩니다.”
  • 노태군은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 “다른 자들이 뭘 안다고 그러냐? 저 아이들이 약을 잘못 줄까 걱정이 되지도 않느냐? 내일 네가 직접 가져오거라!”
  • 속사포 같은 그녀의 말에 한청연은 멍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뭐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노태군은 피곤한 얼굴로 눈을 감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의 말을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항의였다.
  • 국공 부인은 그녀의 옷자락을 잡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어머님의 뜻이니 왕자빈마마께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한청연은 노태군이 왜 이러는지 바로 눈치채고 눈시울이 빨개졌다.
  • ‘내가 전생에 무슨 복을 쌓았기에 이렇게 큰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대비마마와 노태군 마나님의 큰 총애를 받을까? 노태군 마나님은 날 지키시느라 애를 쓰시는군.’
  • 안국공부에 유능한 의원이 없을 리 없었다. 그런데 노태군이 왜 굳이 심인붕을 시켜 궁에 가서 그녀를 불러내게 했을까?
  • 한청연은 이 몸으로 깨어나는 순간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악의를 품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녀는 노태군에게서 처음으로 따뜻한 진심을 느꼈다. 순간 목이 멘 그녀는 시큰거리는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 “감사합니다, 할머님. 소첩이 내일 다시 찾아 뵐 테니 푹 쉬십시오.”
  • 노태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청연은 국공 부인과 함께 노태군의 방에서 나왔다. 방 밖에 있는 모영기의 표정은 기다리는 것에 짜증이 난 듯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 상태였다. 그는 둘이 나오는 것을 보고 다급히 국공 부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 “할머님은 어떠하십니까?”
  • 국공 부인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어머님은 대군마마의 일로 염려하셔서 그런 것이지요. 대군마마 얘기만 나오면 가슴이 답답하면서 숨이 잘 안 쉬어진다고 하시던데요. 이제는 두 분이 화해한 것을 보셨으니 안심이 되어 괜찮아지실 것입니다.”
  • 모영기는 안색이 어두워졌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 국공 부인은 웃으면서 농담을 건넸다.
  • “이게 다 의술에 능한 왕자빈마마 덕분이지요. 어머님도 왕자빈마마를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며칠간 마마께서 자주 여기에 오셔야 할 것 같으니 어머님께서 대군마마더러 왕자빈마마를 잘 보살피라고 하셨습니다.”
  • 어른을 대할 때의 모영기는 평소와 달리 예의 바르고 공손하게 굴었다. 그의 차갑던 인상도 덩달아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한청연을 힐끗 보더니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 “물론이지요.”
  • 모영기는 사람을 시켜 혜빈에게 말을 전하게 한 뒤, 정원을 빠져나왔다.
  •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본 모영기는 코웃음을 치며 한청연을 보더니 화를 꾹 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 “외할머니께 무슨 짓을 했기에 외할머니가 이렇게 그대를 감싸주는 것이오?”
  • “저하는 참 연기를 잘하십니다. 아까는 저를 끔찍이 아끼는 척하셔서 제가 어제 괜한 소란을 피운 꼴이 된 게 아니겠습니까?”
  • “내가 알기로는 좌의정 댁 큰 아씨는 의술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름난 명의조차 어쩔 수 없는 심장병을 치료한 것이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요? 또 어떻게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봉명침을 둘 줄 아는 것이오?”
  • 모영기는 그녀의 앞으로 바짝 다가들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 “다른 사람이 모른다고 해서 제가 모르는 법은 아니지요. 저하께서 잊으셨나 본데 저는 열 살이 되던 해에 시골에서 좌의정 댁으로 돌아왔습니다. 십 년간 저와 어머님, 그리고 오라버니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무리 저하라고 하셔도 다 알 수는 없겠지요. 내일 저는 또 안국공부로 와야 합니다. 저하께서 제가 노태군 마나님께 아부를 떨어 저하께 다른 수작을 걸까 걱정되신다면 따라오셔서 지켜보시면 되겠네요. 제가 아무런 기회도 잡지 못하게 말이지요.”
  • 모영기는 콧방귀를 뀌더니 말했다.
  • “외할머니께서 나 때문에 걱정이 많으시지만 않았다면 나라고 그대와 함께 다니고 싶은 줄 아시오? 시간을 며칠 줄 테니 얼른 외할머니를 치료하시오. 그동안은 그대와 다른 일로 다투지 않겠소.”
  • 한청연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 “저하께서 저까지 끌어들여 연기를 하시는 거라면 태도를 좀 더 좋게 할 수는 없나요? 그렇게 오만방자한 얼굴로 적선하는 것처럼 말씀하시니 기분이 영 안 좋네요.”
  • “우습군. 그대가 갖은 수를 써서 얻은 결과가 아니오? 그렇게 뻔뻔스럽게 기안대군부에 붙어 있는 것 역시 내 적선을 바란 게 아니오? 눈치가 있다면 헛된 기대를 품지 마시오. 그대를 보는 것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오.”
  • 한청연은 고개를 들고 실눈을 뜬 뒤, 모영기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 “저하께서 병이 심하게 드셨군요. 약물로 치료할 수 없는 심각한 병이옵니다.”
  • 모영기가 흠칫 놀랐다.
  • “그게 무슨 말이오?”
  • “저하의 병이 아주 심각하다는 말입니다.”
  • 그녀의 미소는 봄날의 꽃처럼,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밝고 눈부셨다. 그녀의 눈에서 빛나는 반짝임을 본 순간, 모영기는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 대한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 “무슨 병이라는 말이오?”
  • 한청연은 예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자아도취가 심각하니 처방으로는 거울 보기가 있겠네요. 하루 세 번씩 보름 동안 치료하면 효과를 보실 것입니다.”
  • 말을 마친 그녀는 모영기를 지나쳐 저택 밖에 세워둔 초록색 가마를 탔다.
  • 모영기는 그제야 한청연의 말속에 담긴 풍자의 뜻을 알아듣고 이를 꽉 악물었다. 그의 얼굴은 얼음이라도 낀 것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를 본 도순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고는 목을 움츠린 채, 조심스럽게 가마에 들어갔다.
  • 모영기에게서 풍기는 살기는 전쟁터에서 갈고 닦은 것이었다. 도순은 모영기의 가까이에만 다가가도 몸이 떨렸지만 그녀의 상전인 한청연은 모영기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말을 할 때도 거리낌이 없었다.
  • ‘조금만 늦게 가마를 탔더라면 대군마마께서 아씨를 벽으로 내던졌겠어.’
  • 기안대군부로 돌아온 뒤, 도순은 한청연을 부축해 창고방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한청연은 방향을 틀어 안채(主院)의 방향으로 향했다.
  • 도순이 다급히 그녀에게 귀띔했다.
  • “아씨, 저희가 묵는 곳은 저쪽이에요.”
  • 한청연은 뒤에서 따라오는 힘찬 발소리를 느끼며 입꼬리를 올렸다.
  • “나는 전하께서 직접 봉하신 왕자빈인데 창고방에 묵는다면 사람들이 저하를 두고 첩에게 정신이 팔려 조강지처를 구박한다고 하지 않겠어? 연기를 해도 제대로 해야지.”
  • “안채에 묵으려고? 그럴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오?”
  • “노태군 마나님은 저희 둘이 아주 잘 어울린다고 하셨습니다.”
  • “감히 외할머니로 날 협박하는 것이오?”
  • 모영기의 표정이 대뜸 어둡게 가라앉았다. 숨막힐 것 같은 압박감이 한청연을 감쌌다.
  • 한청연은 그의 기세에 굴하지 않고 고개를 쳐든 뒤,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 “저와 기별하시기 전까지는 전하의 어명대로 저는 이 저택의 왕자빈입니다. 그러니 제가 안채에 묵는 것 역시 당연한 일 아닙니까? 겨우 이까짓 일을 두고 협박이라니요, 가당치도 않지요. 만약 제가 저하를 협박한다면 그건 분명 사람 목숨이 달린 큰 일일 것입니다.”
  • “나와 혼인한 것을 후회하는 척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는 안채까지 들어오고 싶다? 아주 내 잠자리에도 오르고 싶다고 말하지 그러오? 그대가 얼마나 더러운 여인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오?”
  • ‘말을 참 더럽게 하네. 아주 악취가 진동해.’
  • 한청연은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 “더럽다면 멀리 떨어지시면 될 것입니다. 제가 이곳을 떠나는 날, 안채에 불을 지르지요. 저하께는 돈도 많으시니 마음에 두신 여인이랑 이곳을 새롭게 지어 알콩달콩 지내시면 되겠네요.”
  • “이건 내 집이란 말이오!”
  • 모영기는 화를 내며 씩씩거렸다.
  • 한청연은 눈을 깜박이며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 “저쪽 뜰에서는 청낭이가 저하를 눈이 빠지게 기다릴 텐데 그곳에 가서 묵으시면 될 게 아닙니까? 청낭이는 틀림없이 저하를 기쁘게 해드릴 것입니다.”
  • 한청연은 생긋 미소를 지어 보인 뒤, 그대로 모영기를 스쳐지나가 버렸다.
  • 그곳에는 화가 나 얼굴이 벌게진 모영기만 씩씩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 모영기는 뒤에서 펄쩍 뛰며 말했다.
  • “한청연, 적당히 하시오!”
  • 도순은 겁이나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 “아씨, 대군마마께서 크게 화나신 것 같습니다.”
  • 자꾸만 모영기의 심기를 건드리는 한청연 역시 심장이 두근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창고방의 위치가 너무 멀잖아? 우리가 그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누구 하나 알지 못할 거야. 안 그래?”
  • 그제야 도순은 깜짝 놀랐다.
  • ‘아씨가 모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안채에 묵으시려는 이유가 있었네. 대군마마께서 대비마마와 노마나님 때문에 어제처럼 아씨를 괴롭히지는 않을 거라지만 한청낭의 음모를 피하기는 어렵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