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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기별

  • 한청낭은 입술을 잘근 깨물고 불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 “소첩은 언니의 상처가 걱정되어 보러 온 것입니다. 언니도 보고 저하께 사죄하라 설득하려고요… 소첩은 저하가 화내시는 걸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그런 건데 언니가 이럴 줄은…”
  •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한청연의 베개 아래를 슬쩍 훑어보았다.
  • 그제야 한청연은 자신의 베개 아래에 부채와 옥추가 놓여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 이건 사내의 소지품이었다.
  • 모영기는 표정이 굳더니 부채를 들어 펼쳐 보았다. 부채를 힐끗 본 그는 얼굴을 굳히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절절한 애모의 뜻을 담은 시구군. 한청연, 어제 그대를 살려주는 게 아니었소!”
  • 도순은 다급히 앞으로 나서며 한청낭을 손가락질했다.
  • “이건 우리 아씨의 물건이 아닙니다. 저것이 아씨에게 오명을 뒤집어씌우자고 벌인 짓입니다. 그리고 방금 전에는 아씨를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 “언니가 이렇게 무서운데 손에 아무것도 든 게 없는 제가 혼자서 언니를 뭐 어떻게 한다고요…”
  • 한청연은 부채를 주워 들더니 보지도 않고 고개를 젖힌 채, 냉소를 하였다.
  • “저하, 제가 얼마나 멍청해야 이런 시가 적힌 부채를 몸에 지니고 다니겠습니까? 혼인을 취소하고 싶으시다 했지요? 그 요구를 들어드리지요.”
  • 모영기는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 “그래, 좋다. 나랑 당장 입궐하여 기별(和离)을 신청하자꾸나.”
  • 한청연은 미소를 지었다.
  • “못할 건 없지요.”
  •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도순은 초조한 얼굴로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절대 안 됩니다요!”
  • 한청연은 왕실의 명에 거역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모영기와 함께 궁에 들어가 기별하겠다고 말한다면 그녀는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숨길 수 있는 비밀은 없었다. 한청낭은 절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언제 소문을 퍼뜨릴까 전전긍긍하면서 기다릴 바에는, 엄벌이 떨어질까 두려움에 떠는 것보다는 자발적으로 궁에 들어가는 게 훨씬 승산이 있어 보였다. 어쩌면 대비마마를 만나 사정한다면 살 수도 있지 않겠는가?
  • 이때, 한청낭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 “언니는 지금 몸이 다친 상태지 않나요? 저하, 언니가 며칠간 몸을 추스르고 화도 풀렸을 때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떤가요? 언니가 지금 화가 나서 대비마마께 무례라도 범한다면 저하의 앞날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 ‘며칠간 몸을 추슬라고? 지금 상황에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인데 한청낭이 가만있을 리가 없어. 내가 살 기회를 모조리 없애려는 거겠지.’
  • 한청연은 피식 코웃음을 치고 말했다.
  • “제 동생의 뜻은 저하께서 지금 제 몸이 허약할 때 얼른 저를 죽여 입막음 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동생이 순조롭게 왕자빈으로 되지 않겠습니까?”
  • 한청낭은 눈물을 왈칵 쏟으며 말했다.
  • “언니, 제 뜻은 그게 아니라…”
  • 모영기는 흐느끼는 한청낭의 등을 가볍게 다독여 위로를 전한 뒤, 혐오스러운 눈길로 한청연을 힐끗 보고는 홱 돌아섰다.
  • “저택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소. 할마마마 앞에서 헛소리를 지껄이면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 한청낭은 모영기가 나간 뒤, 한청연을 보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이렇게 말했다.
  • “감히 날 건드려? 어디 한 번 두고 봐!”
  • 한청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 “도순아, 옷을 갈아입혀 다오!”
  • 소박한 금색 비녀로 머리를 틀어올린 뒤, 궁복으로 갈아입은 한청연은 안색이 창백함에도 불구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녀는 도순의 부축을 받으며 대문을 나섰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의 걸음은 가벼웠지만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강단이 담겨 있었다.
  • 모영기는 그녀와 같은 마차에 타고 싶지 않아 말에 올라탔다. 짙은 녹색의 비단 궁복에 상투를 튼 그는 자태가 늠름하고 귀티가 흘렀다. 때마침 쏟아지는 봄 햇살에 그의 차갑던 이목구비는 부드럽게 풀어지는 듯했다.
  • 한청연이 돌 계단 아래로 내려가자 모영기는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는 눈앞에 서 있는 여인이 어여쁘나 화려하지는 않고, 단아하나 딱딱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세속을 벗어난 듯한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은 그녀의 뒤에 있는 화려한 저택의 대문마저 초라하게 만들었다.
  • ‘미인은 모든 화의 근원이라고 했는데 틀린 말이 아니군.’
  • 그는 콧방귀를 뀌고 더욱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한청연은 자신의 앞으로 휙 하고 지나가는 모영기를 보고는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애써 참으며 마차를 타고 그를 뒤따라갔다.
  •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아 마차는 가다가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밖을 내다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앞에 모여들어서는 흥분한 얼굴로 고개를 빼들고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 짜증이 난 모영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곧 그의 시위가 앞의 상황을 살펴보고 돌아와 고했다.
  • “대군마마께 아룁니다. 배가 부른 여인이 있는데 마을사람들이 그 여인을 들고 어디로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구경하느라 몰려들어 길이 막힌 것입니다.”
  • 시위의 말이 끝나자마자 앞쪽이 시끌벅적해지더니 머리가 산발이 된 여인 한 명이 불편한 몸으로 힘겹게 자신을 묶고 있는 밧줄을 풀고 마차 앞으로 뛰어왔다. 그러나 곧 두 명의 남자에게 잡히고 말았다.
  • 여인은 몸부림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 “저는 사내랑 놀아난 적이 없습니다! 어머님, 어머님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여태까지 어머님 곁에서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는데 제가 언제 다른 사내랑 놀아났다고 그러시는 건가요?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되죠!”
  • 그러자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 “일시적인 욕정을 못 이겨 내 아들에게 미안한 짓을 한 네가 무슨 말이 그리 많느냐? 그 일로 내 아들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고 나 역시 늘그막에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하고 있잖니.”
  • 사람들은 화를 내며 그 여인을 바라보았다.
  • 모영기는 차가운 얼굴을 돌려 문 발이 드리워진 마차 창문을 보며 비꼬았다.
  • “낭자도 이런 구경은 하고 싶지 않을 터인데, 말머리를 돌려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게 어떻겠소?”
  • “그럴 필요 없어요!”
  • 한청연은 문 발을 젖히더니 창백한 얼굴을 드러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갑자기 그 여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 “이리 와 보게.”
  •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모영기의 마차가 지나치게 시선을 끄는 탓에 구경꾼들마저 모두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 여인은 희망을 본 듯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힘겹게 걸어와 마차 앞에 무릎을 꿇은 뒤, 고개를 조아렸다.
  • “마님, 살려주십시오. 소인 정말 억울합니다.”
  • 모영기는 언짢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 “한청연, 지금 뭐 하는 짓이오?”
  • 한청연은 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여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 “자네 맥을 좀 짚어보지.”
  • 그녀의 목소리는 신비한 힘을 담고 있는 것처럼 여인은 그녀의 말에 잠깐 멍해 있었다가 순순히 일어났다. 구경꾼들은 엄청난 모영기의 기세에 눌려 감히 다가오거나 여인을 막지 못했다. 일반 양반이 아닌 것 같은 모영기의 마차에 탄 사람이면 그 신분이 어마어마할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 한청연은 여인의 맥을 짚어보고 몇 가지 질문을 한 뒤,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 “자네는 단순 복수(腹水)가 찬 것뿐이네. 의원에게 찾아간 적이 없나?”
  • 여인은 놀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속이 자꾸 울렁거리고 구토감이 들어 감히 의원에게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 “자네 목에 거미모양의 점이 나타난 것을 보아 간병으로 인한 복수네. 임신 증상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기는 하지만.”
  • 여인은 자신의 병이 치료될 수 있는지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질렀다.
  • “다들 들으셨지요? 저는 다른 사내와 놀아난 적이 없습니다!”
  • 그러자 옆에 있던 누군가가 ‘풉’하고 비웃었다.
  • “저 여인의 말 한마디에 뭐가 달라진다고? 보아하니 의원도 아닌 것 같은데.”
  • “그러게, 그렇다고 해도 결백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한대? 웬 사내가 오밤중에 저 여편네의 옷을 벗기는 걸 버젓이 본 사람도 있다지 않았나?”
  • 거짓말도 여러 사람이 하면 진실로 들리는 법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여인을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다.
  • 여인의 안색은 점차 어두워지더니 급기야 눈빛이 흐려졌다. 그녀는 옆에서 고기 파는 장수의 칼을 보더니 달려들어 칼을 빼앗았다.
  • 그녀의 돌발행동에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지만 한청연은 그녀가 칼로 자신의 배를 찌르는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