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왕자빈마마께서는 할머니를 구하고 싶으신 마음에 내린 결정이신데 왜 이렇게 모질게 대하시는 것입니까? 왕자빈마마는 이미 중상을 입으신 몸입니다.”
모영기는 이를 악물고 차갑게 대꾸했다.
“심인붕(沈临风), 이건 내 집안일이니 네가 끼어들 게 못된다.”
한청연은 한참 뒤에야 어지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죽다가 살아난 것을 알게 된 한청연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반듯한 옷차림의 준수한 남자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바로 안국공의 손자이자 모영기의 사촌동생 심인붕이었다.
도순은 황급히 앞으로 뛰어오더니 쓰러질 것 같은 한청연을 부축했다. 한청연은 가슴을 움켜쥔 채, 눈살을 찌푸리고 모영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저하와 혼례를 치른 게 아니니 집안일이 아니지요. 저하도 저를 해칠 권리가 없습니다. 지금 저는 할머님을 구하려고 간청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한마디만 여쭙지요. 구할 것인가요? 말 것인가요? 구하지 않겠다고 하신다면 지금 바로 떠나 집으로 갈 것입니다. 간덩이가 부은 제가 설마 명을 거역하는 일로 겁먹을 것 같습니까?”
그녀의 놀랄 만큼 단호한 어조에 모영기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왕자빈마마의 의술을 당연히 믿습니다. 제발 제 할머니를 구해주십시오.”
한청연은 원래 이 일에서 손을 떼려고 했다. 하지만 노태군이 심장병으로 쓰러진 게 자신의 책임도 있는 데다가 심인붕이 간절하게 부탁하자 그녀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아픈 몸으로 노태군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의원에게서 은침을 받아들었다.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정확하게 혈자리에 침을 꽂은 뒤, 손끝으로 침을 튕겼다. 그러자 은침에서는 ‘윙윙’소리가 나며 마구 흔들렸다.
의원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봉명침(蜂鸣针)이잖아! 이럴 수가?”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또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저런 일이!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봉명침이잖아? 그런데 백 년 넘게 사라진 침술을 집에서만 곱게 자란 대갓집 규수가 어떻게 안다는 말이야?”
한편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한청연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심인붕은 이 모습이 몹시 안쓰러웠다.
“왕자빈마마…”
한청연은 땀을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버티기 힘들어서 한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이를 악물고 시침했다.
주변은 아주 조용하여 침 흔들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한청낭은 모영기의 몸에 기댄 채, 나지막한 소리로 그에게 위로를 건넸다. 모영기는 차가운 눈빛으로 한청연의 꼿꼿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움켜쥘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 일다경쯤 지나자 한청연은 노태군의 목에 손을 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는 위험에서 벗어나셨어요.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한편으로 귓가에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깨어나셨어요! 노마나님이 깨어나셨어요!”
그녀는 그제야 안심하고 의식을 잃었다.
꿈인 듯, 생시인 듯, 기절해 있던 한청연은 또다시 한 달 전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계모는 그녀와 한청낭을 데리고 향을 피우러 남산의 비구니 절로 간 적이 있었다. 그때 폭우가 내리는 바람에 그들은 남산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한청연은 불상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눈을 감고 병으로 앓아누운 오라버니를 위해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 탁자 위의 향에서 은은한 향기가 풍겼다.
술을 마신 그녀는 정신이 어지러워지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때, 절 밖에서 슬금슬금 다가오는 발소리와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그녀는 힘겹게 일어나 방으로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절 안의 촛불이 갑자기 꺼지며 사방이 온통 어둠에 싸였다. 순간 그녀는 낯선 이의 품에 안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더니 입이 막힌 채, 뒷산의 등가(紫藤架) 아래로 데려갔다.
남자의 품에서 풍기는 설련화(雪莲) 향에 취한 한청연은 덩굴처럼 남자의 허리에 칭칭 매달렸다.
번개가 번쩍이는 순간, 한청연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얼굴의 반을 가린 독수리 가면을 한, 눈썹이 짙은 사내임을 알아보았다.
이로써 순결을 뜻하는 순결점(守宫砂)이 점차 옅어지더니 이윽고 사라졌다.
남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었다.
“넌 누구냐?”
그녀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청…”
그러나 아래쪽에서 전해지는 고통에 마지막 말을 내뱉지 못했다.
이튿날이 되자 밤새 내린 폭우로 떨어진 꽃잎과 나뭇잎들이 땅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낯선 선실(禅房)에 누워 있었다. 가슴팍에 자리한 여인의 순결을 뜻하는 점은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머리카락에는 자등나무 꽃잎과 비의 습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