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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 “형님, 왕자빈마마께서는 할머니를 구하고 싶으신 마음에 내린 결정이신데 왜 이렇게 모질게 대하시는 것입니까? 왕자빈마마는 이미 중상을 입으신 몸입니다.”
  • 모영기는 이를 악물고 차갑게 대꾸했다.
  • “심인붕(沈临风), 이건 내 집안일이니 네가 끼어들 게 못된다.”
  • 한청연은 한참 뒤에야 어지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죽다가 살아난 것을 알게 된 한청연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반듯한 옷차림의 준수한 남자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바로 안국공의 손자이자 모영기의 사촌동생 심인붕이었다.
  • 도순은 황급히 앞으로 뛰어오더니 쓰러질 것 같은 한청연을 부축했다. 한청연은 가슴을 움켜쥔 채, 눈살을 찌푸리고 모영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 “아직 저하와 혼례를 치른 게 아니니 집안일이 아니지요. 저하도 저를 해칠 권리가 없습니다. 지금 저는 할머님을 구하려고 간청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한마디만 여쭙지요. 구할 것인가요? 말 것인가요? 구하지 않겠다고 하신다면 지금 바로 떠나 집으로 갈 것입니다. 간덩이가 부은 제가 설마 명을 거역하는 일로 겁먹을 것 같습니까?”
  • 그녀의 놀랄 만큼 단호한 어조에 모영기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 “왕자빈마마의 의술을 당연히 믿습니다. 제발 제 할머니를 구해주십시오.”
  • 한청연은 원래 이 일에서 손을 떼려고 했다. 하지만 노태군이 심장병으로 쓰러진 게 자신의 책임도 있는 데다가 심인붕이 간절하게 부탁하자 그녀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아픈 몸으로 노태군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의원에게서 은침을 받아들었다.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정확하게 혈자리에 침을 꽂은 뒤, 손끝으로 침을 튕겼다. 그러자 은침에서는 ‘윙윙’소리가 나며 마구 흔들렸다.
  • 의원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 “봉명침(蜂鸣针)이잖아! 이럴 수가?”
  •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또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 “어떻게 저런 일이!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봉명침이잖아? 그런데 백 년 넘게 사라진 침술을 집에서만 곱게 자란 대갓집 규수가 어떻게 안다는 말이야?”
  • 한편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한청연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 심인붕은 이 모습이 몹시 안쓰러웠다.
  • “왕자빈마마…”
  • 한청연은 땀을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버티기 힘들어서 한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이를 악물고 시침했다.
  • 주변은 아주 조용하여 침 흔들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 한청낭은 모영기의 몸에 기댄 채, 나지막한 소리로 그에게 위로를 건넸다. 모영기는 차가운 눈빛으로 한청연의 꼿꼿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움켜쥘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또 일다경쯤 지나자 한청연은 노태군의 목에 손을 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잠시는 위험에서 벗어나셨어요. 그러나…”
  •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 정신이 아득해지는 한편으로 귓가에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 “깨어나셨어요! 노마나님이 깨어나셨어요!”
  • 그녀는 그제야 안심하고 의식을 잃었다.
  • 꿈인 듯, 생시인 듯, 기절해 있던 한청연은 또다시 한 달 전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계모는 그녀와 한청낭을 데리고 향을 피우러 남산의 비구니 절로 간 적이 있었다. 그때 폭우가 내리는 바람에 그들은 남산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 한청연은 불상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눈을 감고 병으로 앓아누운 오라버니를 위해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 탁자 위의 향에서 은은한 향기가 풍겼다.
  • 술을 마신 그녀는 정신이 어지러워지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 이때, 절 밖에서 슬금슬금 다가오는 발소리와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그녀는 힘겹게 일어나 방으로 피하려고 했다.
  • 그런데 절 안의 촛불이 갑자기 꺼지며 사방이 온통 어둠에 싸였다. 순간 그녀는 낯선 이의 품에 안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더니 입이 막힌 채, 뒷산의 등가(紫藤架) 아래로 데려갔다.
  • 남자의 품에서 풍기는 설련화(雪莲) 향에 취한 한청연은 덩굴처럼 남자의 허리에 칭칭 매달렸다.
  • 번개가 번쩍이는 순간, 한청연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얼굴의 반을 가린 독수리 가면을 한, 눈썹이 짙은 사내임을 알아보았다.
  • 이로써 순결을 뜻하는 순결점(守宫砂)이 점차 옅어지더니 이윽고 사라졌다.
  • 남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었다.
  • “넌 누구냐?”
  • 그녀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한… 청…”
  • 그러나 아래쪽에서 전해지는 고통에 마지막 말을 내뱉지 못했다.
  • 이튿날이 되자 밤새 내린 폭우로 떨어진 꽃잎과 나뭇잎들이 땅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낯선 선실(禅房)에 누워 있었다. 가슴팍에 자리한 여인의 순결을 뜻하는 점은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머리카락에는 자등나무 꽃잎과 비의 습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