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첩은 언니의 상처가 걱정되어 보러 온 것입니다. 언니도 보고 저하께 사죄하라 설득하려고요… 소첩은 저하가 화내시는 걸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그런 건데 언니가 이럴 줄은…”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한청연의 베개 아래를 슬쩍 훑어보았다.
그제야 한청연은 자신의 베개 아래에 부채와 옥추가 놓여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건 사내의 소지품이었다.
모영기는 표정이 굳더니 부채를 들어 펼쳐 보았다. 부채를 힐끗 본 그는 얼굴을 굳히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절절한 애모의 뜻을 담은 시구군. 한청연, 어제 그대를 살려주는 게 아니었소!”
도순은 다급히 앞으로 나서며 한청낭을 손가락질했다.
“이건 우리 아씨의 물건이 아닙니다. 저것이 아씨에게 오명을 뒤집어씌우자고 벌인 짓입니다. 그리고 방금 전에는 아씨를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언니가 이렇게 무서운데 손에 아무것도 든 게 없는 제가 혼자서 언니를 뭐 어떻게 한다고요…”
한청연은 부채를 주워 들더니 보지도 않고 고개를 젖힌 채, 냉소를 하였다.
“저하, 제가 얼마나 멍청해야 이런 시가 적힌 부채를 몸에 지니고 다니겠습니까? 혼인을 취소하고 싶으시다 했지요? 그 요구를 들어드리지요.”
모영기는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그래, 좋다. 나랑 당장 입궐하여 기별(和离)을 신청하자꾸나.”
한청연은 미소를 지었다.
“못할 건 없지요.”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도순은 초조한 얼굴로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 안 됩니다요!”
한청연은 왕실의 명에 거역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모영기와 함께 궁에 들어가 기별하겠다고 말한다면 그녀는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숨길 수 있는 비밀은 없었다. 한청낭은 절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언제 소문을 퍼뜨릴까 전전긍긍하면서 기다릴 바에는, 엄벌이 떨어질까 두려움에 떠는 것보다는 자발적으로 궁에 들어가는 게 훨씬 승산이 있어 보였다. 어쩌면 대비마마를 만나 사정한다면 살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때, 한청낭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언니는 지금 몸이 다친 상태지 않나요? 저하, 언니가 며칠간 몸을 추스르고 화도 풀렸을 때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떤가요? 언니가 지금 화가 나서 대비마마께 무례라도 범한다면 저하의 앞날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며칠간 몸을 추슬라고? 지금 상황에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인데 한청낭이 가만있을 리가 없어. 내가 살 기회를 모조리 없애려는 거겠지.’
한청연은 피식 코웃음을 치고 말했다.
“제 동생의 뜻은 저하께서 지금 제 몸이 허약할 때 얼른 저를 죽여 입막음 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동생이 순조롭게 왕자빈으로 되지 않겠습니까?”
한청낭은 눈물을 왈칵 쏟으며 말했다.
“언니, 제 뜻은 그게 아니라…”
모영기는 흐느끼는 한청낭의 등을 가볍게 다독여 위로를 전한 뒤, 혐오스러운 눈길로 한청연을 힐끗 보고는 홱 돌아섰다.
“저택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소. 할마마마 앞에서 헛소리를 지껄이면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한청낭은 모영기가 나간 뒤, 한청연을 보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이렇게 말했다.
“감히 날 건드려? 어디 한 번 두고 봐!”
한청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도순아, 옷을 갈아입혀 다오!”
소박한 금색 비녀로 머리를 틀어올린 뒤, 궁복으로 갈아입은 한청연은 안색이 창백함에도 불구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녀는 도순의 부축을 받으며 대문을 나섰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의 걸음은 가벼웠지만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강단이 담겨 있었다.
모영기는 그녀와 같은 마차에 타고 싶지 않아 말에 올라탔다. 짙은 녹색의 비단 궁복에 상투를 튼 그는 자태가 늠름하고 귀티가 흘렀다. 때마침 쏟아지는 봄 햇살에 그의 차갑던 이목구비는 부드럽게 풀어지는 듯했다.
한청연이 돌 계단 아래로 내려가자 모영기는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는 눈앞에 서 있는 여인이 어여쁘나 화려하지는 않고, 단아하나 딱딱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세속을 벗어난 듯한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은 그녀의 뒤에 있는 화려한 저택의 대문마저 초라하게 만들었다.
‘미인은 모든 화의 근원이라고 했는데 틀린 말이 아니군.’
그는 콧방귀를 뀌고 더욱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한청연은 자신의 앞으로 휙 하고 지나가는 모영기를 보고는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애써 참으며 마차를 타고 그를 뒤따라갔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아 마차는 가다가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밖을 내다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앞에 모여들어서는 흥분한 얼굴로 고개를 빼들고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짜증이 난 모영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곧 그의 시위가 앞의 상황을 살펴보고 돌아와 고했다.
“대군마마께 아룁니다. 배가 부른 여인이 있는데 마을사람들이 그 여인을 들고 어디로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구경하느라 몰려들어 길이 막힌 것입니다.”
시위의 말이 끝나자마자 앞쪽이 시끌벅적해지더니 머리가 산발이 된 여인 한 명이 불편한 몸으로 힘겹게 자신을 묶고 있는 밧줄을 풀고 마차 앞으로 뛰어왔다. 그러나 곧 두 명의 남자에게 잡히고 말았다.
여인은 몸부림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저는 사내랑 놀아난 적이 없습니다! 어머님, 어머님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여태까지 어머님 곁에서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는데 제가 언제 다른 사내랑 놀아났다고 그러시는 건가요?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되죠!”
그러자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일시적인 욕정을 못 이겨 내 아들에게 미안한 짓을 한 네가 무슨 말이 그리 많느냐? 그 일로 내 아들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고 나 역시 늘그막에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하고 있잖니.”
사람들은 화를 내며 그 여인을 바라보았다.
모영기는 차가운 얼굴을 돌려 문 발이 드리워진 마차 창문을 보며 비꼬았다.
“낭자도 이런 구경은 하고 싶지 않을 터인데, 말머리를 돌려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게 어떻겠소?”
“그럴 필요 없어요!”
한청연은 문 발을 젖히더니 창백한 얼굴을 드러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갑자기 그 여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리 와 보게.”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모영기의 마차가 지나치게 시선을 끄는 탓에 구경꾼들마저 모두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여인은 희망을 본 듯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힘겹게 걸어와 마차 앞에 무릎을 꿇은 뒤, 고개를 조아렸다.
“마님, 살려주십시오. 소인 정말 억울합니다.”
모영기는 언짢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청연, 지금 뭐 하는 짓이오?”
한청연은 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여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네 맥을 좀 짚어보지.”
그녀의 목소리는 신비한 힘을 담고 있는 것처럼 여인은 그녀의 말에 잠깐 멍해 있었다가 순순히 일어났다. 구경꾼들은 엄청난 모영기의 기세에 눌려 감히 다가오거나 여인을 막지 못했다. 일반 양반이 아닌 것 같은 모영기의 마차에 탄 사람이면 그 신분이 어마어마할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한청연은 여인의 맥을 짚어보고 몇 가지 질문을 한 뒤,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단순 복수(腹水)가 찬 것뿐이네. 의원에게 찾아간 적이 없나?”
여인은 놀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속이 자꾸 울렁거리고 구토감이 들어 감히 의원에게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자네 목에 거미모양의 점이 나타난 것을 보아 간병으로 인한 복수네. 임신 증상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기는 하지만.”
여인은 자신의 병이 치료될 수 있는지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질렀다.
“다들 들으셨지요? 저는 다른 사내와 놀아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누군가가 ‘풉’하고 비웃었다.
“저 여인의 말 한마디에 뭐가 달라진다고? 보아하니 의원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 그렇다고 해도 결백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한대? 웬 사내가 오밤중에 저 여편네의 옷을 벗기는 걸 버젓이 본 사람도 있다지 않았나?”
거짓말도 여러 사람이 하면 진실로 들리는 법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여인을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다.
여인의 안색은 점차 어두워지더니 급기야 눈빛이 흐려졌다. 그녀는 옆에서 고기 파는 장수의 칼을 보더니 달려들어 칼을 빼앗았다.
그녀의 돌발행동에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지만 한청연은 그녀가 칼로 자신의 배를 찌르는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