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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초상집 제대로 찾아가 울어

  • 기안대군부로 돌아가는 길에 한청연과 도순은 생활필수품과 식재료를 샀다.
  • 시대가 시대인지라 음식 쪽에서는 현대보다 많이 단조로웠다. 흔히 볼 수 있는 야채 몇 가지가 다였다. 장사꾼들도 많지 않았는데 아무리 번화한 시장터라고 해도 소리를 지르며 장사하는 사람 몇 명밖에 없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와는 비교하지 못할 정도였다.
  • 열심히 야채를 고르고 있을 때,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왕자빈마마.”
  • 고개를 돌려보니 심인붕이 일행과 함께 말을 타고 저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멀리에서부터 한청연을 알아보고 그녀를 부른 것이었다.
  • 심인붕은 무관인 안국공부 출신으로 현재 조정에서 우부풍(右扶风) 직을 맡고 있었다. 경조윤(京兆尹)과 함께 치안을 다스리는 직위로 젊은 나이에 앞길이 창창했다.
  • 그는 한청연이 옳은 것을 보고 말에서 내리더니 의아한 얼굴로 나귀 수레를 보았다.
  • “이런 일은 아랫사람들에게 시키면 되지, 어찌 마마께서 직접 움직이시는 겁니까? 몸도 성치 않는 분이.”
  • 한청연은 손에 든 야채를 내려놓고 말했다.
  • “할머님께 약을 전해드리고 돌아가는 길에 식재료를 좀 살까 해서요.”
  • 심인붕은 초라한 나귀 수레를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눈치 빠른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오늘 좀 한가하여 동무들과 함께 사냥을 다녀왔습니다. 두어 마리 잡았는데 왕자빈마마께서 꺼리지 않으신다면 가져가서 드셔 보시지요.”
  • 그의 말 등에는 산토끼와 꿩 몇 마리가 놓여 있었다. 사냥이 꽤 성공적이었던 것 같았다.
  • “도련님이 가져가서 드시고 다음에 주세요.”
  • “저택에 많아요. 좋은 음식거리는 아니나 마마께서 드셔보시라고 드리는 것입니다.”
  • 심인붕은 말 등에서 산토끼 한 마리와 꿩 한 마리를 내리고는 또 동전을 꺼내 옆에 있는 고기 장수에게 주었다.
  • “이걸 좀 처리해 주게.”
  • 고기 장수는 흔쾌히 허락하고 익숙한 솜씨로 손질했다. 그리고 손질 마친 고기를 깨끗이 씻은 뒤, 연잎으로 싸서 한청연에게 건네주었다.
  • 한청연은 사양하지 않고 심인붕에게 감사를 표한 뒤, 도순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 안채로 돌아와 보니 왕 어멈과 조 어멈이 모두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자 조 어멈은 내일 친정으로 돌아갈 때 싸갈 떡을 만들러 주방에 불려갔고 왕 어멈의 행방은 모른다고 했다.
  • 아궁이는 이미 지어진 상태였지만 흙이 마르지 않아 좀 기다려야 했다. 게다가 그녀와 도순은 아궁이에 불을 땔 줄 모르니 점심식사는 아직 미정이었다.
  • 한청연은 좀 쉬려고 누웠다. 그녀는 도순에게 토끼고기를 소금에 절이라고 한 뒤, 정원에 불을 피우라고 했다. 아궁이에 불을 땔 줄은 모르나 야외에서 불을 피울 줄은 알기 때문이었다.
  • 도순은 재미있다고 느꼈는지 신난 표정이었다. 낑낑거리던 끝에 불을 피우는 데 성공한 도순은 철 꼬챙이에 토끼고기를 꿰고 굽기 시작했다. 다만 불꽃이 작아졌다 커졌다 하는 바람에 토끼고기는 새까맣게 타서 보기 거북할 정도였다.
  • 그러나 껍질을 벗겨내자 잘 익은 속살이 나름대로 먹을 만했다.
  • 둘은 자리에 앉아 단도로 고기를 발라내 소금에 찍어 맛있게 먹었다.
  • 이때, 밖에서 수상한 머리통이 쑥 들이밀어지다가 다시 사라졌다. 아마도 누군가의 첩보원인 듯했다.
  • 한참 뒤, 안채 밖은 떠들썩한 소리로 가득해졌다. 삼삼오오 모여들어 ‘토순이’라는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 한청연은 입맛이 떨어져서 미간을 찌푸렸다.
  • “한청낭은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 도순도 와구와구 먹던 것을 멈추고 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 “지금 바로 정원 문을 잠글게요. 밖에서 뭐라고 하든말든 마음대로 하라지요.”
  • 문까지 걸어갔을 때, 한청낭이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그녀의 뒤에 선 지추가 도순을 보더니 기고만장한 얼굴로 물었다.
  • “우리 마님의 설이 못 봤어?”
  • 도순은 고개를 저었다.
  • “토순이? 들어본 적도 없는데.”
  • 지추는 오만한 얼굴로 콧방귀를 뀌더니 말했다.
  • “토순이는 우리 마님이 키우시는 토끼야. 대군마마께서 선물로 주신 거지.”
  • “못 봤다니까.”
  • 도순은 둘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 “그런데 정원 밖에서 토끼로 보이는 털가죽과 피를 보았는데? 설이 맞지?”
  • 지추는 도순을 밀치더니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 “들어가서 봐야겠어.”
  • 한청낭의 눈은 한청연의 손에 들린 꼬챙이에 멈춰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울먹거리다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한청연을 손가락질했다.
  • “너, 감히 내 토순이를 죽인 거야? 불쌍한 내 토순아!”
  • ‘토순이’라는 소리에 한청연은 몸을 흠칫 떨었다.
  • ‘왜 이렇게 오글거려? 미치겠네.’
  • 그녀는 한청낭의 연기를 봐줄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 “잘 봐. 이 토끼는 내가 밖에서 가져온 거지, 토순인지 뭔지 하는 애는 아니라고. 울고 싶으면 초상집 제대로 찾아가 울어.”
  • 한청연의 말에 한청낭은 더욱 심하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어떻게 이렇게 모질 수 있어? 아무리 짐승이라고 해도 생명인데 배 좀 채우려고 아무 죄 없는 생명을 죽인 거야? 그러고도 네가 양심 있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어?”
  • 고기를 먹었을 뿐인데 갑자기 대역죄인이 된 한청연은 가슴이 답답했다.
  • ‘얘는 왜 시집오더니 이렇게 보살이 된 거야? 악당은 자신이면서 나에게 이런 캐릭터를 선물하고 싶은가?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
  • 한청연은 그녀의 울부짖는 소리를 무시한 채, 느긋하고 맛있게 토끼고기를 먹었다.
  • “넌 앞으로 고기도 안 먹고 채식만 하겠다는 거지? 그런데 어제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진 물고기랑 오리, 닭고기는 다 뭐였지? 네가 나보다 죄 없는 생명을 죽인 게 더 많으면서 너는 죄책감 안 들어? 여기서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네 자등원에나 가서 박혀 있어.”
  • 그러나 작정하고 시비를 걸러 찾아온 한청낭이 그대로 물러날 리 없었다. 긴 통곡에 지친 그녀는 바닥에 축 늘어졌다.
  • “문 닫거라. 거 참 밥 한 번 먹기 힘들군. 입맛만 버렸어.”
  • 한청연이 말했다.
  • 도순 역시 화가 난 상태라 한청연의 말을 듣자마자 말했다.
  • “둘째 아씨, 비켜주시지요. 저희 아씨가 피곤해서요.”
  • 지추는 한청낭의 옷소매를 살짝 잡으며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한청낭은 갑자기 뒤로 휘청거리더니 바닥에 넘어질 것처럼 허둥거렸다. 지추는 재빨리 그런 한청낭을 부축하고 나서 말했다.
  • “도순아, 네가 어떻게 마님을 밀칠 수 있어?”
  • 도순은 정원 문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 ‘미친 거 아니야?’
  • 그러나 그녀가 돌아서기도 전에 누군가의 발길질에 정원 문이 쾅 하고 열렸다. 열린 문 틈 사이로 표정이 어두운 모영기가 보였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매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도순을 노려보고 있었다.
  • “감히 계집종 따위가 상전에게 이토록 무례하게 구는 것이냐? 네 상전이 평소 얼마나 기고만장했는지 알 수 있겠구나.”
  • 도순은 모영기가 온 것을 보고 그의 화난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무릎을 털썩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 “대군마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 한청연은 단도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 ‘밥 먹기 글렀군.’
  • “화를 내고 싶으면 어린 하녀 말고 저에게 내시지요. 제 정원까지 찾아와 도발하는 인간을 내쫓는 게 맞지, 아니면 공손하게 대문 활짝 열고 맞이하랍니까?”
  • 한청낭은 모영기가 온 것을 보고 더욱 눈물을 펑펑 흘렸다.
  • “저하, 오늘 저하께서 선물로 주신 토순이 말입니다, 언니… 언니가 그걸 드셨지 뭐예요!”
  • 모영기는 차가운 얼굴로 한청연 앞의 모닥불을 보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원래도 먹으라고 사온 토끼 아니더니? 내일 한 마리 더 사오라고 할 테니 울지 말거라.”
  • 그러나 한청낭은 숨이 넘어갈 정도로 꺽꺽 울었다.
  • “전 다시는 토끼를 키우지 않겠습니다. 언니는 절 싫어해서 제가 좋아하는 거라면 다 망가뜨렸지요. 특히 저하께서 주신 거라면 더더욱요. 저는 무언가를 좋아할 자격도 없나 봅니다.”
  • 짧은 말 한마디로 그녀는 한청연을 질투쟁이로 만들어 보였다.
  • 모영기는 한청낭이 울음을 그치지 않자 정원 안으로 성큼 들어와서 한청연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차가운 시선을 한청연의 얼굴에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 “일부러 그런 것이오?”
  • 한청연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 “다시 한 번 말하는 건데 이 토끼는 저택 밖에서 가져온 거라고요. 좀 쓸데없는 죄명을 저에게 뒤집어씌우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 감당하기 버거워서 그래요.”
  • “청낭이의 토끼가 사라졌다고 하지 않소?”
  • “그 토순이를 죽인 게 누구인지 알 게 뭔가요? 저를 모함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아이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