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시대인지라 음식 쪽에서는 현대보다 많이 단조로웠다. 흔히 볼 수 있는 야채 몇 가지가 다였다. 장사꾼들도 많지 않았는데 아무리 번화한 시장터라고 해도 소리를 지르며 장사하는 사람 몇 명밖에 없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와는 비교하지 못할 정도였다.
열심히 야채를 고르고 있을 때,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왕자빈마마.”
고개를 돌려보니 심인붕이 일행과 함께 말을 타고 저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멀리에서부터 한청연을 알아보고 그녀를 부른 것이었다.
심인붕은 무관인 안국공부 출신으로 현재 조정에서 우부풍(右扶风) 직을 맡고 있었다. 경조윤(京兆尹)과 함께 치안을 다스리는 직위로 젊은 나이에 앞길이 창창했다.
그는 한청연이 옳은 것을 보고 말에서 내리더니 의아한 얼굴로 나귀 수레를 보았다.
“이런 일은 아랫사람들에게 시키면 되지, 어찌 마마께서 직접 움직이시는 겁니까? 몸도 성치 않는 분이.”
한청연은 손에 든 야채를 내려놓고 말했다.
“할머님께 약을 전해드리고 돌아가는 길에 식재료를 좀 살까 해서요.”
심인붕은 초라한 나귀 수레를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눈치 빠른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좀 한가하여 동무들과 함께 사냥을 다녀왔습니다. 두어 마리 잡았는데 왕자빈마마께서 꺼리지 않으신다면 가져가서 드셔 보시지요.”
그의 말 등에는 산토끼와 꿩 몇 마리가 놓여 있었다. 사냥이 꽤 성공적이었던 것 같았다.
“도련님이 가져가서 드시고 다음에 주세요.”
“저택에 많아요. 좋은 음식거리는 아니나 마마께서 드셔보시라고 드리는 것입니다.”
심인붕은 말 등에서 산토끼 한 마리와 꿩 한 마리를 내리고는 또 동전을 꺼내 옆에 있는 고기 장수에게 주었다.
“이걸 좀 처리해 주게.”
고기 장수는 흔쾌히 허락하고 익숙한 솜씨로 손질했다. 그리고 손질 마친 고기를 깨끗이 씻은 뒤, 연잎으로 싸서 한청연에게 건네주었다.
한청연은 사양하지 않고 심인붕에게 감사를 표한 뒤, 도순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안채로 돌아와 보니 왕 어멈과 조 어멈이 모두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자 조 어멈은 내일 친정으로 돌아갈 때 싸갈 떡을 만들러 주방에 불려갔고 왕 어멈의 행방은 모른다고 했다.
아궁이는 이미 지어진 상태였지만 흙이 마르지 않아 좀 기다려야 했다. 게다가 그녀와 도순은 아궁이에 불을 땔 줄 모르니 점심식사는 아직 미정이었다.
한청연은 좀 쉬려고 누웠다. 그녀는 도순에게 토끼고기를 소금에 절이라고 한 뒤, 정원에 불을 피우라고 했다. 아궁이에 불을 땔 줄은 모르나 야외에서 불을 피울 줄은 알기 때문이었다.
도순은 재미있다고 느꼈는지 신난 표정이었다. 낑낑거리던 끝에 불을 피우는 데 성공한 도순은 철 꼬챙이에 토끼고기를 꿰고 굽기 시작했다. 다만 불꽃이 작아졌다 커졌다 하는 바람에 토끼고기는 새까맣게 타서 보기 거북할 정도였다.
그러나 껍질을 벗겨내자 잘 익은 속살이 나름대로 먹을 만했다.
둘은 자리에 앉아 단도로 고기를 발라내 소금에 찍어 맛있게 먹었다.
이때, 밖에서 수상한 머리통이 쑥 들이밀어지다가 다시 사라졌다. 아마도 누군가의 첩보원인 듯했다.
한참 뒤, 안채 밖은 떠들썩한 소리로 가득해졌다. 삼삼오오 모여들어 ‘토순이’라는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한청연은 입맛이 떨어져서 미간을 찌푸렸다.
“한청낭은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도순도 와구와구 먹던 것을 멈추고 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지금 바로 정원 문을 잠글게요. 밖에서 뭐라고 하든말든 마음대로 하라지요.”
문까지 걸어갔을 때, 한청낭이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그녀의 뒤에 선 지추가 도순을 보더니 기고만장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 마님의 설이 못 봤어?”
도순은 고개를 저었다.
“토순이? 들어본 적도 없는데.”
지추는 오만한 얼굴로 콧방귀를 뀌더니 말했다.
“토순이는 우리 마님이 키우시는 토끼야. 대군마마께서 선물로 주신 거지.”
“못 봤다니까.”
도순은 둘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그런데 정원 밖에서 토끼로 보이는 털가죽과 피를 보았는데? 설이 맞지?”
지추는 도순을 밀치더니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들어가서 봐야겠어.”
한청낭의 눈은 한청연의 손에 들린 꼬챙이에 멈춰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울먹거리다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한청연을 손가락질했다.
“너, 감히 내 토순이를 죽인 거야? 불쌍한 내 토순아!”
‘토순이’라는 소리에 한청연은 몸을 흠칫 떨었다.
‘왜 이렇게 오글거려? 미치겠네.’
그녀는 한청낭의 연기를 봐줄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잘 봐. 이 토끼는 내가 밖에서 가져온 거지, 토순인지 뭔지 하는 애는 아니라고. 울고 싶으면 초상집 제대로 찾아가 울어.”
한청연의 말에 한청낭은 더욱 심하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모질 수 있어? 아무리 짐승이라고 해도 생명인데 배 좀 채우려고 아무 죄 없는 생명을 죽인 거야? 그러고도 네가 양심 있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어?”
고기를 먹었을 뿐인데 갑자기 대역죄인이 된 한청연은 가슴이 답답했다.
‘얘는 왜 시집오더니 이렇게 보살이 된 거야? 악당은 자신이면서 나에게 이런 캐릭터를 선물하고 싶은가?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
한청연은 그녀의 울부짖는 소리를 무시한 채, 느긋하고 맛있게 토끼고기를 먹었다.
“넌 앞으로 고기도 안 먹고 채식만 하겠다는 거지? 그런데 어제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진 물고기랑 오리, 닭고기는 다 뭐였지? 네가 나보다 죄 없는 생명을 죽인 게 더 많으면서 너는 죄책감 안 들어? 여기서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네 자등원에나 가서 박혀 있어.”
그러나 작정하고 시비를 걸러 찾아온 한청낭이 그대로 물러날 리 없었다. 긴 통곡에 지친 그녀는 바닥에 축 늘어졌다.
“문 닫거라. 거 참 밥 한 번 먹기 힘들군. 입맛만 버렸어.”
한청연이 말했다.
도순 역시 화가 난 상태라 한청연의 말을 듣자마자 말했다.
“둘째 아씨, 비켜주시지요. 저희 아씨가 피곤해서요.”
지추는 한청낭의 옷소매를 살짝 잡으며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한청낭은 갑자기 뒤로 휘청거리더니 바닥에 넘어질 것처럼 허둥거렸다. 지추는 재빨리 그런 한청낭을 부축하고 나서 말했다.
“도순아, 네가 어떻게 마님을 밀칠 수 있어?”
도순은 정원 문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미친 거 아니야?’
그러나 그녀가 돌아서기도 전에 누군가의 발길질에 정원 문이 쾅 하고 열렸다. 열린 문 틈 사이로 표정이 어두운 모영기가 보였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매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도순을 노려보고 있었다.
“감히 계집종 따위가 상전에게 이토록 무례하게 구는 것이냐? 네 상전이 평소 얼마나 기고만장했는지 알 수 있겠구나.”
도순은 모영기가 온 것을 보고 그의 화난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무릎을 털썩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대군마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청연은 단도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밥 먹기 글렀군.’
“화를 내고 싶으면 어린 하녀 말고 저에게 내시지요. 제 정원까지 찾아와 도발하는 인간을 내쫓는 게 맞지, 아니면 공손하게 대문 활짝 열고 맞이하랍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