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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압정이라고!

  • 혜빈은 흠칫 놀라며 한청연을 힐끗 보고 물었다.
  • “인붕이가 궁에 들어오는 경우가 극히 적은데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다더냐?”
  • “노마나님 옥체에 이상이 생기셨는데 저택의 의원은 아무 도움이 못되고… 기안대군 저택으로 왕자빈마마를 찾으러 가셨으나 왕자빈마마께서 입궐하셨다는 말을 듣고 궁까지 찾아오셨답니다.”
  • 혜빈은 모친이 아프다는 말에 대뜸 당황하기 시작했다.
  • “또 편찮으시다는 거냐?”
  • “아직 심각한 것은 아니니 마마께서 염려하시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저 심장이 조이는 느낌이라고 하셨습니다.”
  • 혜빈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둘을 재촉했다.
  • “그럼 뭣들 하는 것이냐? 영기야, 얼른 어미를 대신하여 외할머니를 뵈러 가려무나. 무슨 일이 생긴다면 꼭 사람을 보내 이 어미에게 소식을 전해주고.”
  • 모영기도 무엇이 중요한지를 잘 알기에 기별의 일로 고집을 부리지 않고 고개를 돌려 한청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어마마마.”
  • 한청연은 모영기를 좋다 싫다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녀는 오늘 모영기와 깔끔하게 끝내기를 바란 한편, 혹시나 자신에게 큰 재앙이 닥쳐 명예가 더럽혀지고 상황이 처참해질까 은근히 불안하기도 했다.
  • 그러던 차에 안국공부에서 그녀를 찾는다고 하자 그녀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 모영기가 부랴부랴 떠날 준비를 하자 그녀도 묵묵히 몸을 돌렸다. 입구까지 걸어갔을 때, 한청연은 고개를 돌리고 혜빈을 보며 말했다.
  • “아까 어마마마께 말씀드리는 것을 깜빡했습니다. 소첩이 찻잔을 떨어뜨린 것은 그 차에 설사약이 들어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기 상궁이 있어서 소첩은 달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그리 한 것입니다.”
  • 말을 마친 한청연은 혜빈의 반응을 살피지도 않고 모영기를 따라 침궁(寝殿)을 떠났다.
  • 뒤에서 궁녀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쇤네 억울합니다. 혜빈마마, 정말 억울합니다.”
  • 한청연은 피식 하고 냉소를 하였다. 혜빈은 그녀의 말을 듣고 진위를 가리기 위해서 꼭 어의를 불러 검사하게 할 것이다. 그러면 분명 바닥에 떨어진 찻잔 파편에서 설사약이 발견될 것이고 차를 올린 궁녀를 끝까지 문책할 것이다.
  • ‘겸하전에 사람이 몇인데 그 궁녀가 누구도 모르게 일을 꾸몄을 리 없어.’
  • 이빨 빠진 호랑이도 호랑이라고, 그녀는 어찌 되었건 좌의정의 적통 여식이자 명의 상으로 기안대군의 정실이었다. 그런데 감히 궁녀가 이런 수작을 부리다니?
  • ‘내가 만만히 당할 것 같아? 눈에는 눈, 이에는 이지. 나 한청연은 남들이 마음대로 밟아도 되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압정이라고!’
  • 침궁을 나선 모영기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기다렸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한청연을 보더니 입꼬리를 올리고 비꼬았다.
  • “좌의정 댁 여식이라 그런지 사람 상대하는 재주가 놀랍군 그려. 농처럼 던진 한마디로 사람 목숨을 앗아가게 하다니 말이오.”
  • 한청연은 흠칫 놀랐다.
  • ‘이자는 나를 아주 싫어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내가 몰래 손쓴 걸 안 거지? 아까 이자가 받았던 찻잔도 뜨거워서 아는 건가?’
  • “남이 내 따귀를 쳐서 받은 대로 돌려준 것인데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건지요. 차에 독을 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사정을 봐준 것입니다. 저하께서 아까의 그 궁녀가 안쓰럽게 여겨지신다면 혜빈마마께 사정해 보시지요.”
  • 모영기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 “이제 보니 말을 참 잘하는군.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테지만 조금 뒤에 안국공부에 도착한다면 외할머니 앞에서 수작을 부리지 말고 병을 잘 치료해 주시오. 내가 그대에게 관심을 가질 일은 없을 터이니.”
  • 한청연은 경사방 상궁 앞에서 모영기가 그녀를 감싸준 것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오만방자한 발언을 듣는 순간, 한청연은 너털웃음만 나왔다.
  • “저하는 참 스스로를 대단하게 생각하시네요. 저 역시 저하에게 관심이 없어요.”
  • “자결한다 만다 하면서 나에게 시집오겠다 한 것은 그대였소.”
  • 한청연은 그제야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대비가 둘의 혼인을 결정지은 뒤, 전쟁터에서 돌아온 모영기는 혼인할 생각이 없다고 한 적이 있었다.
  • 그때는 한청낭이 모영기를 꼬시기 전이었다. 이렇게 좋은 사윗감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좌의정은 대비에게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한청연이 혼인을 취소한다는 말에 평생 모영기가 아닌 남자와는 혼인을 하지 않겠다 하면서 자결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그때 그의 연기가 얼마나 진짜 같고 과장스러웠는지 결국 고집을 못 이긴 모영기는 혼인을 허락하고 말았다.
  • 한청연은 생각에 잠겼다.
  • ‘자결 소동은 무슨. 몸 주인도 기껏해야 눈물 두어 방울 흘린 게 다겠지.’
  • 하지만 이 일로 모영기에게 약점이 잡힌 그녀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 “그때는 안목이 없었지요. 어린 마음에 쓸데없는 오기를 부린 것 같습니다.”
  • 그녀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모영기는 매서운 눈빛으로 한청연을 노려보더니 또박또박 말했다.
  • “잊을 뻔했군. 다른 사내를 마음에 품고 있으니 당연히 내가 눈에 들어오지 않겠지.”
  • 그의 날카로운 말에 한청연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 그제야 모영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콧방귀를 뀌더니 옷소매를 툭툭 털고 앞으로 걸어갔다.
  • ‘이렇게 날 깎아내리는 게 결국 자신을 욕하는 것임을 모르나? 아내가 불륜남을 둔 게 뭐가 좋은 일이라고 저렇게 신났어?’
  • 줄곧 한청연의 뒤를 따르고 있던 도순은 몇 번이고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꾹 참았다. 궁에 듣는 귀가 많아서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말없이 한청연을 부축한 채, 궁을 나섰다.
  • 심인붕이 궁문 밖에 서 있었다. 은색의 비단옷을 입고 은실의 자수가 놓인 허리띠에 옥패를 단 그는 보기만 해도 따뜻한 기운을 풍기는 미남이었다.
  • 그는 멀리서부터 한청연이 걸어오는 것을 보자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눈을 빛내며 다가가 꾸벅 인사했다. 그리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
  • “할머님께서 편찮으셔서 왕자빈마마께서 안국공부까지 행차해 주셨으면 합니다.”
  • 한청연은 심인붕에 대한 인상이 좋았던지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셋은 급히 안국공부로 자리를 옮겼다.
  • 한청연은 중상을 입은 몸으로 오전 내내 궁을 돌아다니느라 많이 지친 상태였다. 상처가 너무 아픈 탓에 그녀는 마취제를 얼른 투여하고 싶었다.
  • 심인붕은 아주 섬세하고 자상한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안국공부에 먼저 도착한 뒤, 문 앞에서 마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한청연이 대문에 도착해 보자 건장한 사내 두 명이 가마를 들고 대문 앞에서 한청연이 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한청연은 고마움을 표한 뒤, 마차 안에 들어갔다. 그렇게 그녀는 조금 편하게 노태군의 방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 노태군은 보료(软塌)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서는 귀티가 흐르는 여인이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한청연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사람을 시켜 방석을 가져오게 한 뒤, 낮은 목소리로 노태군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 이 사람은 모영기의 외숙모이자 안국공부의 국공 부인이었다. 또 심인붕의 어머니기도 했다.
  • 한청연은 그녀에게 예를 올린 뒤, 맥을 짚는 틈을 타서 반지를 이용해 노태군의 몸을 스캔했다. 검사 결과는 곧 한청연의 머릿속에 나타났다. 노태군의 병은 흔히 보는 심근경색이었다. 어제 충격을 받은 데다 일시적으로 흥분하여 심장병이 도진 것이었다.
  • 현재의 환경은 기계 치료와 수술 치료가 모두 불가능한 상태인데다 노태군 역시 나이가 많아 치료를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한청연은 고혈지를 완화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옷소매에서 질산글리세린(硝酸甘油) 한 알을 꺼내 노태군의 입에 넣어 주었다. 이 약을 혀 아래에 물고 있으면 바로 효과가 날 것이다.
  • 한청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 “어르신, 좀 괜찮으세요?”
  • 노태군은 눈을 뜨더니 그녀를 힐끗 보고 대답했다.
  • “괜찮지 않다.”
  • 한청연은 약효가 없는 줄 알고 물었다.
  • “그럼 어르신,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 말고 다른 증상이 있나요?”
  • 그제야 노태군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 “어르신, 어르신, 이제는 날 할머님이라고 부르기도 싫다는 것이냐?”
  • 한청연은 멍해지고 말았다.
  • ‘이 할머니가 왜 이러시지? 늙으면 애가 된다더니 정말 그러네.’
  •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노태군의 뜻대로 불렀다.
  • “할머님.”
  • 그제야 노태군은 표정이 풀어졌다.
  • “그래, 이제야 좀 괜찮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