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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기별이 안 된다면 과부로 살 거야

  • “허튼소리!”
  • 모영기는 버럭 화를 냈다. 그녀의 담담하고 대수롭지 않은 어조 때문에 더욱 크게 화난 듯했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잠재우기 힘들었다.
  • “청낭이는 토끼를 좋아하여 자신의 정원에서 키우고 있었소. 세상 여인들이 다 그대처럼 모질고 악독한 줄 아시오?”
  • 한청연은 화가 나서 실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모영기를 올려다보는 게 기분이 내키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 “고기 좀 먹었을 뿐인데 대역죄인이 되어버렸군요. 저하께서는 전쟁터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 눈살 한 번이라도 찌푸린 적 있어요?”
  • 모영기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한청연을 보면서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 “내가 사람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인다는 것을 안다면 앞으로 자꾸 내 심기를 건드리지 마시오. 할마마마께서 기별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아내를 여의면 그만이오!”
  • 그의 차가운 목소리보다 더욱 소름이 돋는 것은 그가 한 말이었다.
  • 그러나 한청연은 전혀 기죽지 않고 모영기를 바라보았다.
  • “저하께서는 지금 첩을 위해 정실을 죽이겠다는 말씀이신가요?”
  • “그게 뭐 어떻소? 다시 한 번 경고하는데 이곳은 좌의정 댁이 아니고 청낭이도 내 측빈이라는 거요. 더 이상 예전처럼 청낭이를 괴롭힐 생각 하지 마시오.”
  • 자신의 여자를 지키는 남자는 멋지고 패기가 넘쳤지만 그의 안목은 정말 엉망이었다.
  • 한청연은 고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 “제 말을 믿지 않고 저더러 모질고 악독한 여인이라고 단정지었으면서 묻기는 왜 묻는 것인가요? 사내가 되어서 당신처럼 멍청한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지요!”
  •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영기는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한청연은 끈 떨어진 연처럼 붕 날았다가 땅에 쿵 하고 떨어졌다.
  • 겨우 아문 가슴팍의 상처가 또 터진 것 같았다. 그녀는 극심에 통증에 식은땀을 흘렸다.
  • “참아 보려고 했는데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끝까지 무례하군. 한청연, 내 오늘 그대에게 사람을 괴롭히는 건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임을 가르쳐 주겠소.”
  • 모영기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청연의 목을 움켜쥐었다.
  • 한청연은 이를 악문 채, 기죽지 않고 모영기의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모영기는 그녀의 행동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부상당한 여인이 자신을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 그의 자만 때문인지 믿을 수 없도록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한청연의 손에 침이 들려 있었던 것이다. 모영기가 한청연의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가하기도 전에 한청연은 침으로 그의 살을 찔렀다. 그가 당황한 틈을 타서 한청연은 미꾸라지처럼 쏙 빠져나갔다.
  • 그는 전쟁터에서 천군만마를 상대해 봤지만 실수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한 여인에게 이렇게 지다니, 아주 창피한 일이었다. 이상하게 바늘침이 살갗을 파고드는 순간, 시큰거리는 느낌이 온몸에 퍼지며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 그는 이를 악물고 화난 눈빛으로 한청연을 노려보았다.
  • “감히 독침으로 나를 찌른 것이냐?”
  • 이미 독에 당한 지금, 하등 쓸데없는 소리였다.
  • 한청연은 실눈을 뜨고 힘겹게 일어나며 말했다.
  • “저는 여인에게 손대는 사내가 제일 싫어요. 저하도 계속해서 제 선을 건드리고 있거든요. 대비마마께서 기별을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저도 과부로 살아갈 수 있어요.”
  • “무엄하다!”
  • 그의 입안에서 간신히 한마디가 비집고 나왔다. 모영기는 평생 겪어본 적 없는 수모에 이가 덜덜 떨렸다.
  • “너를 갈기갈기 찢어죽일 것이다!”
  • “예전에는 그럴 용기가 없었는데 저하의 협박을 듣고 보니 과부로 사는 게 더 나을 것 같네요.”
  • 한청연은 하얀 손바닥에서 검은색 알약 한 알을 꺼내고는 모영기를 보며 요염하게 웃었다.
  • “이 알약 한 알이면 소도 죽일 수 있는데 반만 입에 넣어드릴까요? 온몸의 구멍이라는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면 마음 약한 우리 동생이 놀랄까 봐 그래요.”
  • 그녀는 손을 들고 모영기의 턱을 잡았다. 그러나 곧 그녀의 손목은 모영기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그의 손은 힘이 세지 않았으나 그녀의 손에 든 알약을 떨어뜨리기는 충분했다. 알약은 손가락 틈사이로 흘러나와 모영기의 손바닥에 들어갔다.
  • ‘이 남자, 인간이 맞나?’
  • 아까 한청연이 사용한 약은 연구소의 특효약 리도카인(利多卡因)이었다. 그런데 그는 일 분도 지나지 않아 손을 자유자재로 움직인 것이다.
  • ‘이건 말도 안 되는데.’
  • 한청연은 자신이 모영기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약효가 가시기 전에 재빨리 모영기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 모영기는 그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게 힘들어보였지만 발걸음은 여전히 힘찼다.
  • “감히 나에게 독침을 찌르다니. 한청연, 죽고 싶어 환장했군.”
  • 한청연은 냉소를 하며 말했다.
  • “쥐도 궁지에 물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 못 들었어요? 모영기 씨, 어제 제가 입궐했을 때, 저를 사지로 몰지 않은 게 고마워서 잠시 동안만 기안대군부로 돌아온 거예요. 하지만 왕자빈이라는 신분은 저에게 대단하지 않아요. 정말 그 명분을 소중히 여겼다면 혼례날에 자결하려고 하지도 않았겠죠. 노태군 마나님을 위해 연기에 협조할 수는 있으나 서로의 삶을 건드리지 않고 방해하지 않는 게 원칙이죠. 둘이 자꾸만 이렇게 저를 못살게 군다면 다 같이 죽는 수가 있어요!”
  • 한청연은 칼처럼 매섭고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그와 대문 옆에 서 있는 한청낭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에서는 소름 끼치는 한기가 느껴졌다.
  • 모영기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약효로 뻣뻣한 몸 때문에 그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를 악물고 또박또박 말했다.
  • “오늘 일은 그대가 먼저 시작한 게 아니오?”
  • “제가 먼저 시작했다고?”
  • 한청연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처음부터 이 토끼는 제가 저택 밖에서 가져온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오늘 집으로 오던 길에 심씨 도련님을 만났는데 그분이 저에게 사냥한 산토끼를 주시더군요. 믿지 못하시겠으면 그분께 물어보면 될 거 아닌가요?”
  • 모영기는 여전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
  • “인붕이는 공무가 다망한데 언제 한가하게 사냥이나 하겠소? 하인들이 이 정원 입구에서 털가죽과 핏자국을 봤다고 했소.”
  • “제가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항상 반박만 하시지요. 아니면 내기할까요?”
  • 한청연이 웃으며 물었다.
  • “무슨 내기?”
  • “쉬워요. 개 두 마리를 풀어 자등원 근처에서 수색하는 거죠. 꼭 저하가 원하시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 모영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 “그게 무슨 말이오?”
  • “말 그대로예요. 입구에서 핏자국을 찾았다고 하니 동생의 토순이가 이미 죽은 것 같은데… 저하께서는 동생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분 아니신가요? 토순이를 다시 찾아서 묻어주는 게 어때요?”
  • 그러자 뒤에 있던 한청낭은 안색이 변하며 급히 고개를 저었다.
  • “아니에요, 저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참상을 보고 싶지 않아요!”
  • 그러더니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 모영기는 망설이는 눈치였다.
  • 한청연은 피가 떨어지는 가슴팍을 움켜쥐고 코웃음을 쳤다.
  • “아까까지 동생은 내가 피를 흘리는 모습을 즐거운 얼굴로 보고 있었잖아? 이제 보니 함께 자란 친언니가 오늘 방금 얻은 토끼 한 마리보다 못하다는 거군.”
  • 그녀는 일어서서 방으로 걸어갔다. 방문까지 갔을 때,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모영기를 돌아보며 말했다.
  • “저에게 보낸 조 어멈이 오늘 주방으로 불려갔더군요. 저하께서 내일 친정으로 돌아가는 행사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시나 봅니다.”
  • 모영기는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
  • “좌의정에게 그대가 아파서 못 돌아간다고 말을 전했소. 내일에는 청낭이만 데리고 갈 거요.”
  • “잘됐네요. 마침 할머님께 약을 전하러 가야 해서 집으로 갈 시간이 없었거든요.”
  • 모영기는 입술을 깨물고 화를 참으며 물었다.
  • “지금 날 협박하는 거요?”
  • “협박이라뇨. 제 가족 앞에서 연기를 하는 게 귀찮으신 것 같은데 제가 왜 저하의 체면을 살펴야 하는 건데요?”
  • 한청연이 되물었다.
  • 모영기는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한청연처럼 뻔뻔스럽고 말이 통하지 않는 여인을 본 적이 없었다. 분명 그에게 시집오겠다고 떼를 쓴 건 그녀였으면서 이제 와서 기고만장하게 구는 것이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그 역시도 그녀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것이었다.
  • 외할머니가 일부러 둘을 이어주려고 애쓴다고 하지만 혼례날 화가 나서 기절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모영기는 외할머니 때문에 이런 여인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지금 상황에 짜증이 치밀었다.
  • 그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 “갈 염치가 있다면 따라오든지.”
  • 한청연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방에 들어갔다.
  • “저는 나쁜 짓을 한 적도 없고 일부러 저고리를 풀어헤친 채, 물에 빠져 언니의 서방님을 꼬신 적도 없는데 집으로 못 갈 건 뭔가요?”
  • 그러자 한청낭이 발끈하더니 눈물을 흘렸다.
  • “언니는 지금 저를 저격하시는 건가요?”
  • “그렇게 느껴진다니 달리 할 말이 없네. 내일 봐!”
  • 모영기는 화가 나 이마의 실핏줄이 툭툭 뛰었다.
  • “해독약은 어디 있소? 그 독침에 바른 약은 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