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영기는 버럭 화를 냈다. 그녀의 담담하고 대수롭지 않은 어조 때문에 더욱 크게 화난 듯했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잠재우기 힘들었다.
“청낭이는 토끼를 좋아하여 자신의 정원에서 키우고 있었소. 세상 여인들이 다 그대처럼 모질고 악독한 줄 아시오?”
한청연은 화가 나서 실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모영기를 올려다보는 게 기분이 내키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고기 좀 먹었을 뿐인데 대역죄인이 되어버렸군요. 저하께서는 전쟁터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 눈살 한 번이라도 찌푸린 적 있어요?”
모영기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한청연을 보면서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내가 사람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인다는 것을 안다면 앞으로 자꾸 내 심기를 건드리지 마시오. 할마마마께서 기별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아내를 여의면 그만이오!”
그의 차가운 목소리보다 더욱 소름이 돋는 것은 그가 한 말이었다.
그러나 한청연은 전혀 기죽지 않고 모영기를 바라보았다.
“저하께서는 지금 첩을 위해 정실을 죽이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게 뭐 어떻소? 다시 한 번 경고하는데 이곳은 좌의정 댁이 아니고 청낭이도 내 측빈이라는 거요. 더 이상 예전처럼 청낭이를 괴롭힐 생각 하지 마시오.”
자신의 여자를 지키는 남자는 멋지고 패기가 넘쳤지만 그의 안목은 정말 엉망이었다.
한청연은 고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제 말을 믿지 않고 저더러 모질고 악독한 여인이라고 단정지었으면서 묻기는 왜 묻는 것인가요? 사내가 되어서 당신처럼 멍청한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지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영기는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한청연은 끈 떨어진 연처럼 붕 날았다가 땅에 쿵 하고 떨어졌다.
겨우 아문 가슴팍의 상처가 또 터진 것 같았다. 그녀는 극심에 통증에 식은땀을 흘렸다.
“참아 보려고 했는데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끝까지 무례하군. 한청연, 내 오늘 그대에게 사람을 괴롭히는 건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임을 가르쳐 주겠소.”
모영기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청연의 목을 움켜쥐었다.
한청연은 이를 악문 채, 기죽지 않고 모영기의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모영기는 그녀의 행동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부상당한 여인이 자신을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의 자만 때문인지 믿을 수 없도록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한청연의 손에 침이 들려 있었던 것이다. 모영기가 한청연의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가하기도 전에 한청연은 침으로 그의 살을 찔렀다. 그가 당황한 틈을 타서 한청연은 미꾸라지처럼 쏙 빠져나갔다.
그는 전쟁터에서 천군만마를 상대해 봤지만 실수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한 여인에게 이렇게 지다니, 아주 창피한 일이었다. 이상하게 바늘침이 살갗을 파고드는 순간, 시큰거리는 느낌이 온몸에 퍼지며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화난 눈빛으로 한청연을 노려보았다.
“감히 독침으로 나를 찌른 것이냐?”
이미 독에 당한 지금, 하등 쓸데없는 소리였다.
한청연은 실눈을 뜨고 힘겹게 일어나며 말했다.
“저는 여인에게 손대는 사내가 제일 싫어요. 저하도 계속해서 제 선을 건드리고 있거든요. 대비마마께서 기별을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저도 과부로 살아갈 수 있어요.”
“무엄하다!”
그의 입안에서 간신히 한마디가 비집고 나왔다. 모영기는 평생 겪어본 적 없는 수모에 이가 덜덜 떨렸다.
“너를 갈기갈기 찢어죽일 것이다!”
“예전에는 그럴 용기가 없었는데 저하의 협박을 듣고 보니 과부로 사는 게 더 나을 것 같네요.”
한청연은 하얀 손바닥에서 검은색 알약 한 알을 꺼내고는 모영기를 보며 요염하게 웃었다.
“이 알약 한 알이면 소도 죽일 수 있는데 반만 입에 넣어드릴까요? 온몸의 구멍이라는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면 마음 약한 우리 동생이 놀랄까 봐 그래요.”
그녀는 손을 들고 모영기의 턱을 잡았다. 그러나 곧 그녀의 손목은 모영기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그의 손은 힘이 세지 않았으나 그녀의 손에 든 알약을 떨어뜨리기는 충분했다. 알약은 손가락 틈사이로 흘러나와 모영기의 손바닥에 들어갔다.
‘이 남자, 인간이 맞나?’
아까 한청연이 사용한 약은 연구소의 특효약 리도카인(利多卡因)이었다. 그런데 그는 일 분도 지나지 않아 손을 자유자재로 움직인 것이다.
‘이건 말도 안 되는데.’
한청연은 자신이 모영기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약효가 가시기 전에 재빨리 모영기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모영기는 그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게 힘들어보였지만 발걸음은 여전히 힘찼다.
“감히 나에게 독침을 찌르다니. 한청연, 죽고 싶어 환장했군.”
한청연은 냉소를 하며 말했다.
“쥐도 궁지에 물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 못 들었어요? 모영기 씨, 어제 제가 입궐했을 때, 저를 사지로 몰지 않은 게 고마워서 잠시 동안만 기안대군부로 돌아온 거예요. 하지만 왕자빈이라는 신분은 저에게 대단하지 않아요. 정말 그 명분을 소중히 여겼다면 혼례날에 자결하려고 하지도 않았겠죠. 노태군 마나님을 위해 연기에 협조할 수는 있으나 서로의 삶을 건드리지 않고 방해하지 않는 게 원칙이죠. 둘이 자꾸만 이렇게 저를 못살게 군다면 다 같이 죽는 수가 있어요!”
한청연은 칼처럼 매섭고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그와 대문 옆에 서 있는 한청낭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에서는 소름 끼치는 한기가 느껴졌다.
모영기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약효로 뻣뻣한 몸 때문에 그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를 악물고 또박또박 말했다.
“오늘 일은 그대가 먼저 시작한 게 아니오?”
“제가 먼저 시작했다고?”
한청연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이 토끼는 제가 저택 밖에서 가져온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오늘 집으로 오던 길에 심씨 도련님을 만났는데 그분이 저에게 사냥한 산토끼를 주시더군요. 믿지 못하시겠으면 그분께 물어보면 될 거 아닌가요?”
모영기는 여전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
“인붕이는 공무가 다망한데 언제 한가하게 사냥이나 하겠소? 하인들이 이 정원 입구에서 털가죽과 핏자국을 봤다고 했소.”
“제가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항상 반박만 하시지요. 아니면 내기할까요?”
한청연이 웃으며 물었다.
“무슨 내기?”
“쉬워요. 개 두 마리를 풀어 자등원 근처에서 수색하는 거죠. 꼭 저하가 원하시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모영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말 그대로예요. 입구에서 핏자국을 찾았다고 하니 동생의 토순이가 이미 죽은 것 같은데… 저하께서는 동생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분 아니신가요? 토순이를 다시 찾아서 묻어주는 게 어때요?”
그러자 뒤에 있던 한청낭은 안색이 변하며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참상을 보고 싶지 않아요!”
그러더니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모영기는 망설이는 눈치였다.
한청연은 피가 떨어지는 가슴팍을 움켜쥐고 코웃음을 쳤다.
“아까까지 동생은 내가 피를 흘리는 모습을 즐거운 얼굴로 보고 있었잖아? 이제 보니 함께 자란 친언니가 오늘 방금 얻은 토끼 한 마리보다 못하다는 거군.”
그녀는 일어서서 방으로 걸어갔다. 방문까지 갔을 때,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모영기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에게 보낸 조 어멈이 오늘 주방으로 불려갔더군요. 저하께서 내일 친정으로 돌아가는 행사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시나 봅니다.”
모영기는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
“좌의정에게 그대가 아파서 못 돌아간다고 말을 전했소. 내일에는 청낭이만 데리고 갈 거요.”
“잘됐네요. 마침 할머님께 약을 전하러 가야 해서 집으로 갈 시간이 없었거든요.”
모영기는 입술을 깨물고 화를 참으며 물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거요?”
“협박이라뇨. 제 가족 앞에서 연기를 하는 게 귀찮으신 것 같은데 제가 왜 저하의 체면을 살펴야 하는 건데요?”
한청연이 되물었다.
모영기는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한청연처럼 뻔뻔스럽고 말이 통하지 않는 여인을 본 적이 없었다. 분명 그에게 시집오겠다고 떼를 쓴 건 그녀였으면서 이제 와서 기고만장하게 구는 것이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그 역시도 그녀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외할머니가 일부러 둘을 이어주려고 애쓴다고 하지만 혼례날 화가 나서 기절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모영기는 외할머니 때문에 이런 여인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지금 상황에 짜증이 치밀었다.
그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갈 염치가 있다면 따라오든지.”
한청연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방에 들어갔다.
“저는 나쁜 짓을 한 적도 없고 일부러 저고리를 풀어헤친 채, 물에 빠져 언니의 서방님을 꼬신 적도 없는데 집으로 못 갈 건 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