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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각자 살다

  • 한청낭의 거처는 자등원(紫藤小筑)이라 불리는 곳이었는데 정원 밖에는 새로 세운 자등 등가가 있었다. 다른 곳에서 옮겨온 듯한 그것은 자등이 시들 계절인 지금도 유난히 풍성한 잎사귀를 자랑하며 싱싱함을 뽐냈다.
  • 한청연은 등가를 지나다 발걸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은 뒤, 입꼬리를 올리고 뜰 안으로 들어갔다.
  • 문이 열리자마자 익숙한 얼굴인 왕 어멈이 보였다. 그녀는 지추와 함께 처마 밑에 서서 뭐라고 소곤거리다가 한청연이 들어온 것을 보더니 어색한 표정을 짓고 황급히 다가왔다.
  • 한청연은 직설적으로 물었다.
  • “한청낭은?”
  • 왕 어멈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지추가 먼저 거만하게 한청연을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 “지금은 때가 아닌 듯합니다. 대군마마께서 지금 방에서 술을 드시고 계시니 왕자빈마마는 내일 다시 오시지요.”
  • 한청연은 그녀의 말을 듣고는 곧추 방으로 들어갔다.
  • “만나든 말든 너 따위 하녀가 상관할 바 아니다.”
  • 지추가 말리려고 하자 왕 어멈이 뒤에서 그녀의 옷자락을 조용히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가게 해.”
  • 한청연은 도순을 데리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확 풍기는 음식 향과 술 향에 잔뜩이나 배가 고팠던 한청연은 더욱 허기졌다.
  • 모영기와 한청낭은 인기척을 듣고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한청낭은 한청연이 찾아온 것을 보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 그녀의 얼굴은 발그레하게 상기된 상태였다. 한눈에 봐도 야살스럽고 발칙한 생각을 하는 듯했다.
  • 한청연은 생긋 웃더니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 “저하도 계셨군요. 이런 우연이.”
  • 모영기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
  • “우연 같지가 않은데? 오히려 작정하고 찾아왔다고 당당하게 인정했다면 그대를 달리 보았을 텐데 말이오.”
  • 한청연은 탁자 앞에 마주앉아 산해진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한청낭의 앞에 놓인 백숙을 접시채로 자신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 “저하는 오해하시는 게 취미인 듯합니다. 저는 그저 뭐 먹을까 없나 찾아온 것이지, 저하를 찾아온 게 아닙니다. 저하를 만난다고 배가 차는 것도 아니니 이 닭고기보다 못하지요.”
  • 한청연은 옷소매를 걷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바닥에는 반짝거리는 수술용 매스가 들려 있었다.
  • 이를 본 한청낭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그대로 모영기의 품에 와락 안긴 채, 벌벌 떨었다.
  • “언니, 뭐 하시는 겁니까?”
  • 한청연은 매스로 닭다리를 베어 뒤에 있는 도순의 손에 쥐여주었다.
  • “맛이 아주 좋구나.”
  • 닭다리를 받은 도순은 먹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모영기의 차가운 눈빛에 그녀는 얼어붙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을 확인한 한청낭은 모영기의 품에서 나오며 말했다.
  • “언니가 또 자결할까 얼마나 놀랐는데요.”
  • “그래?”
  • 한청연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 “그래서 너는 저하에게 안겨 저하가 나에게서 비수를 빼앗지 못하게 막은 거로구나. 내가 죽기를 참 바라나 본데?”
  • 모영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 “한청연, 일부러 시비를 걸려고 온 것이오?”
  • 한청연은 얇은 매스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닭껍질을 발라냈다. 그리고 젓가락도 사용하지 않고 하얀 손으로 닭고기를 집어 입에 넣었다. 체통이라고는 전혀 없는 행동이지만 그녀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 “기안대군 저택은 형편이 좋지 않나 봅니다. 제가 고기를 두어 점만 먹었을 뿐인데 이렇게 불같이 화를 내시다니요. 저랑 도순이는 이곳에 온 뒤로 쌀죽 한 번 제대로 먹지 못했어요.”
  • 모영기의 멍한 표정을 보니 이런 상황에 대해 전혀 몰랐던 것 같았다. 곧이어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 “내 집에서는 할 일 없는 사람이나 외부인을 대접하지 않지.”
  • ‘참 좀생이야. 그래서 이 나이가 되도록 이제야 장가 들었지.’
  • 한청연은 그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몸에 상처가 났기에 지나치게 기름진 음식을 피해야 하는 건 맞지만 영양을 섭취해 체력을 회복하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이었다.
  • “맞는 말씀이세요. 아직은 저하와 기별한 사이가 아니라고는 하나 계산은 확실하게 해야 하는 법이니 제대로 하는 게 좋겠어요. 나중에 밥값으로 다투는 꼴 나지 않게 말이죠.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떤가요? 내일부터 저랑 제 하녀는 안채의 정원에서 따로 음식을 해먹죠. 절대 기안대군부의 쌀 한 톨도 안 먹고요. 어떤가요?”
  • “내 눈에 띄지만 않는다면 다 좋소! 하지만 지금 묵고 있는 안채도 기안대군부의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 ‘역시 좀생이라니까.’
  • 한청연은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 “저하도 잊으신 게 있나 본데 저하의 할머니, 외할머니, 그리고 어머님까지 제가 이곳을 떠나는 걸 원치 않으시죠. 제가 싫어서 떠나지 않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 모영기는 말문이 막혔다.
  • “그건 다 그대가 비열한 수단으로 사람 마음을 현혹시켰기 때문이잖소.”
  • 한청연은 눈을 깜박거리며 받아쳤다.
  • “제가 노태군 마나님의 병을 치료하는 게 싫으시다면 그만두겠습니다.”
  • 모영기는 콧방귀를 뀌었다.
  • “한청연, 믿는 구석이 있다고 너무 방자하게 굴지 마시오!”
  • “참 상상력이 풍부하십니다. 저하는 지금 저더러 반드시 기안대군부의 쌀을 먹으라고 하시는 거지요?”
  • 모영기는 실눈을 뜨고 차가운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지금 먹고 있는 게 바로 우리 집의 음식이지 않소!”
  • 한청연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 “밥 한 끼에도 이렇게 인색하게 구시는데 제 예물 역시 언젠가는 다시 좌의정 댁으로 돌려보내시겠죠? 혹여 빠뜨린 게 있다면 사람들이 기안대군부에서 꿀꺽했다고 오해할 수 있으니 이따 저하께서 친히 제 거처까지 가져다주시는 게 어떨까요? 수고해 주세요.”
  • “그 까짓 예물 따위는 내 눈에 들어오지도 않소.”
  • “그럼 그렇게 약속한 거로 할게요. 동생, 넌 아쉬운 것 없지?”
  • 옆에 있던 한청낭은 모영기가 화를 내는 것을 보고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데 한청연이 이때다 싶어 예물을 모두 가져가려 할 줄이야. 한청낭은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 한청연의 예물을 그녀의 어머니가 많이 빼돌렸지만 정실 소생인데다 왕자빈으로 시집가는지라 예법에 의해 혼수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한청연의 예물은 그녀의 것보다 훨씬 가지수도 많고 푸짐했다. 겨우 그것을 꿀꺽했는데 다시 토해내게 생겼으니 생각만 해도 배가 아팠다.
  • 하지만 한청낭은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 ‘이렇게라도 한청연이 순순히 떠난다면 이 기안대군부가 다 내 것이 될 텐데 그 까짓 예물이 다 뭐라고?’
  • 그녀는 딱딱하게 웃으며 말했다.
  • “언니도 참 괜한 걱정을 하시네요. 방금 전에도 왕 어멈에게 이 일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어요. 이따 사람을 시켜 언니에게 예물을 보내주기로 했고요.”
  • 한청연의 살 발라내는 솜씨에 통닭은 곧 뼈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만족스럽게 트림한 뒤,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고 일어났다.
  • “동생은 먼 곳을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니 이 까짓 예물을 아쉬워하지는 않겠지. 아, 그리고 내일부터 저는 따로 음식을 해서 먹을 터이니 매일마다 식재료를 구매해야겠네요. 제 아랫사람이 저택 밖에 못 나가는 경우가 없도록 저하께서 미리 언질을 해주세요.”
  • 그녀의 느긋한 반응에 모영기는 울화가 치밀었다. 코로 내뿜는 숨결마저 불처럼 뜨거운 느낌이었다.
  • “다른 사람은 다 되는데 그대는 밖에 나갈 수 없소.”
  • “왜죠?”
  • “내 명예에 누가 될까 그러오.”
  • 한청연도 화가 나 이가 근질거렸다.
  • ‘말도 참 얄밉게 한단 말이야. 내 약점을 잡았다고 자꾸 물고 늘어지잖아. 전갈 꼬리도 이 인간의 혀보다는 독하지 않겠어.’
  • 그녀는 이를 갈고는 둘에게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죄송해서 어쩌죠? 오늘 노태군 마나님이 특별히 저더러 매일 안국공부에 약을 전하러 오라고 하셨는데. 마차는 좀 덜 요란한 거로 부탁드릴게요. ‘기안대군부’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쓰여진 건 좀 보기 거북하더라고요.”
  • 말을 마친 한청연은 그대로 홱 돌아서서 밖을 나갔다.
  • 뒤에서 술잔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 그녀는 화가 난다고 물건을 깨부수는 남자가 제일 싫었다.
  • ‘이 남자는 좀생이일 뿐만 아니라 분노조절장애가 있어. 게다가 색을 밝히고 멍청하기 짝이 없지. 한청낭과 아주 환상의 짝이야.’
  • 도순은 아까부터 쥐고 있던 닭다리를 들고서 그녀의 뒤를 따라 정원을 나왔다. 그제야 그녀는 죽다 살아난 사람처럼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아씨, 방금 전에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 한청연은 고개를 돌리고 자등원을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 “아쉽군.”
  • “뭐가 아쉬운데요?”
  • “남아서 둘이 잠자리를 하는 장면을 보지 못한 게 아쉬워.”
  • 그녀의 말에 도순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 “아씨! 어떻게 이런 남사스러운 말을… 민망해 죽겠어요.”
  • 한청연은 옷소매 속의 약을 만지작거리며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성질 더러운 모영기가 찾아올까 두렵지 않았다면 그녀는 한청낭의 음식에 강력 설사약을 탔을 것이다.
  • 둘이 끈적하게 서로에게 엉겨붙어 있을 때, 한청낭이 방귀를 연속 뿡뿡 뀌다가 기관총처럼 설사하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특히 그 냄새에 미간을 찌푸린 모영기의 표정 역시 가관일 것 같았다.
  • ‘그럼 모영기는 그 순간에 성욕을 잃고 평생 잠자리를 하려고 할 때마다 그 생각이 들겠지.’
  • 하지만 이렇게 한다면 너무 티가 나기에 그녀는 상상으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