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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 ‘그렇다면 혜비마마도 어제 일을 조용히 넘기고 싶어한다는 얘기인데 누가 찻잔에 수작을 부린 거지? 나에게 골탕을 먹일 만한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 지금은 찻잔이 깨진 상태라 온도도 내려가서 그녀가 아무리 해명해도 믿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괜히 그녀가 유난을 떤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 그녀는 데어서 빨갛게 된 손가락을 소매 안으로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 “염려를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어마마마. 방금 전에는 손이 떨려 제대로 들지 못 했사옵니다.”
  • 혜비는 딱딱하게 웃으며 말했다.
  • “아니다, 네가 아픈 몸이라는 것을 깜빡 잊었구나. 또 다칠라 얼른 일어나거라.”
  • 한청연이 힘겹게 일어나자 눈치 빠른 기 상궁이 바로 작별을 고했다.
  • “왕자빈마마께서 옥체 불편하다고 하시니 소인은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 혜비마마.”
  • 혜비는 온화한 표정으로 몇 마디 인사치레를 한 뒤, 궁녀를 불러 기 상궁을 배웅하도록 했다. 기 상궁이 나간 뒤, 혜비의 얼굴은 얼음이라도 낀 것처럼 차가워졌다. 그녀는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
  • “네 안색이 말이 아니구나. 몸이 불편한 것이냐, 아니면 대비마마의 사람이 보는 앞에서 나를 골탕 먹이려고 한 짓이냐?”
  • 한청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옆에 서서 평온하게 대답했다.
  • “아닙니다, 아마도 과다출혈 때문인 듯합니다.”
  • “과다출혈?”
  • 혜비는 피식 웃더니 탁자를 쾅 하고 내리쳤다.
  •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잘 좀 얘기해 보아라. 혼례날에 자결이라니, 너 때문에 온통 시끄럽구나. 어머님은 병으로 쓰러지셨고 나 역시도 다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이게 무슨 일이냐? 내 아들이 좌의정 댁 아가씨인 너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 한청연은 억울하고 답답했다. 몸 주인이 아이를 밴 탓에 그녀가 지금 다른 사람의 질책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결국 이 몸이 잘못한 것이기에 그녀는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 “소첩이 저하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모영기는 이때다 싶어 찾아온 의도를 밝혔다.
  • “소자는 전하와 할마마마께 혼인을 취하하거나 기별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드리러 온 것입니다. 소자는 둘째 낭자를 정실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 그의 말을 들은 혜비는 멍하니 있다 버럭 화를 냈다.
  • “말도 안 되는 소리! 세상에 다투지 않는 부부가 어디 있다더냐? 작은 갈등 때문에 죽네 사네 하는 게 가당키나 한 짓이냐? 기별이라고? 네 안중에 전하와 대비마마가 있기라도 한 것이냐?”
  • 한청연은 기 상궁도 떠났겠다, 원래도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혜비가 바로 허락할 줄 알았다. 그런데 혜비가 생각도 하지 않고 반대할 줄이야.
  • 혜비는 눈앞에 있는 며느리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어제 일어난 소동 때문에 빈정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그녀는 세상 모든 시어머니처럼 새색시 며느리의 기를 죽이고 싶었다.
  • 하지만 한청연은 좌의정 댁의 적통 여식이기에 가문 배경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대비가 직접 추진한 혼인이기에 더욱 그랬다. 만약 모영기가 자꾸 한청연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대비도 기분이 나쁠 수 있고 좌의정 댁과 척을 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여러가지 상황을 생각한 결과, 그녀는 대비의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한청연을 다정히 대해주었다.
  • “소자 이미 정한 일이니 어마마마께서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 모영기는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 “안 된다면 안 되는 것이다!”
  • 혜비가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 “그 댁 둘째 여식이 마음에 들면 곁에 두고 마음껏 품으면 되지 않느냐? 너무 과한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누가 너한테 뭐라고 하겠느냐? 하지만 혼인하자마자 아무 이유 없이 기별이라니, 대비마마께서 노여워하시지 않겠느냐? 좌의정 나리의 체면은 또 뭐가 되겠느냐?”
  • 혜비는 일부러 ‘아무 이유 없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 모영기는 싸늘한 눈빛으로 한청연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 “저희 둘이 모두 원해서 하는 일입니다. 단순히 소박을 놓는 게 아니라 합의로 이루어진 기별이라는 말입니다.”
  • 한청연도 목소리를 냈다.
  • “어마마마께서 허락해 주십시오.”
  • 셋의 고집에 방의 분위기는 딱딱하게 변했다.
  • 밖에서 궁녀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며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 “마마께 아룁니다. 안국공부(国公府)의 도련님께서 왕자빈마마를 급히 만나려고 하십니다.”
  • ‘심인붕? 날 왜 찾아온 거지?’
  • 혜비는 흠칫 놀라며 한청연을 힐끗 보고 물었다.
  • “인붕이가 궁에 들어오는 경우가 극히 적은데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다더냐?”
  • “노마나님 옥체에 이상이 생기셨는데 저택의 의원은 아무 도움이 못되고… 기안대군 저택으로 왕자빈마마를 찾으러 가셨으나 왕자빈마마께서 입궐하셨다는 말을 듣고 궁까지 찾아오셨답니다.”
  • 혜비는 모친이 아프다는 말에 대뜸 당황하기 시작했다.
  • “또 편찮으시다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