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혜비마마도 어제 일을 조용히 넘기고 싶어한다는 얘기인데 누가 찻잔에 수작을 부린 거지? 나에게 골탕을 먹일 만한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지금은 찻잔이 깨진 상태라 온도도 내려가서 그녀가 아무리 해명해도 믿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괜히 그녀가 유난을 떤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녀는 데어서 빨갛게 된 손가락을 소매 안으로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를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어마마마. 방금 전에는 손이 떨려 제대로 들지 못 했사옵니다.”
혜비는 딱딱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다, 네가 아픈 몸이라는 것을 깜빡 잊었구나. 또 다칠라 얼른 일어나거라.”
한청연이 힘겹게 일어나자 눈치 빠른 기 상궁이 바로 작별을 고했다.
“왕자빈마마께서 옥체 불편하다고 하시니 소인은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 혜비마마.”
혜비는 온화한 표정으로 몇 마디 인사치레를 한 뒤, 궁녀를 불러 기 상궁을 배웅하도록 했다. 기 상궁이 나간 뒤, 혜비의 얼굴은 얼음이라도 낀 것처럼 차가워졌다. 그녀는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
“네 안색이 말이 아니구나. 몸이 불편한 것이냐, 아니면 대비마마의 사람이 보는 앞에서 나를 골탕 먹이려고 한 짓이냐?”
한청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옆에 서서 평온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마도 과다출혈 때문인 듯합니다.”
“과다출혈?”
혜비는 피식 웃더니 탁자를 쾅 하고 내리쳤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잘 좀 얘기해 보아라. 혼례날에 자결이라니, 너 때문에 온통 시끄럽구나. 어머님은 병으로 쓰러지셨고 나 역시도 다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이게 무슨 일이냐? 내 아들이 좌의정 댁 아가씨인 너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한청연은 억울하고 답답했다. 몸 주인이 아이를 밴 탓에 그녀가 지금 다른 사람의 질책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결국 이 몸이 잘못한 것이기에 그녀는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소첩이 저하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영기는 이때다 싶어 찾아온 의도를 밝혔다.
“소자는 전하와 할마마마께 혼인을 취하하거나 기별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드리러 온 것입니다. 소자는 둘째 낭자를 정실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혜비는 멍하니 있다 버럭 화를 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세상에 다투지 않는 부부가 어디 있다더냐? 작은 갈등 때문에 죽네 사네 하는 게 가당키나 한 짓이냐? 기별이라고? 네 안중에 전하와 대비마마가 있기라도 한 것이냐?”
한청연은 기 상궁도 떠났겠다, 원래도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혜비가 바로 허락할 줄 알았다. 그런데 혜비가 생각도 하지 않고 반대할 줄이야.
혜비는 눈앞에 있는 며느리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어제 일어난 소동 때문에 빈정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그녀는 세상 모든 시어머니처럼 새색시 며느리의 기를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한청연은 좌의정 댁의 적통 여식이기에 가문 배경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대비가 직접 추진한 혼인이기에 더욱 그랬다. 만약 모영기가 자꾸 한청연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대비도 기분이 나쁠 수 있고 좌의정 댁과 척을 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여러가지 상황을 생각한 결과, 그녀는 대비의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한청연을 다정히 대해주었다.
“소자 이미 정한 일이니 어마마마께서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영기는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안 된다면 안 되는 것이다!”
혜비가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그 댁 둘째 여식이 마음에 들면 곁에 두고 마음껏 품으면 되지 않느냐? 너무 과한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누가 너한테 뭐라고 하겠느냐? 하지만 혼인하자마자 아무 이유 없이 기별이라니, 대비마마께서 노여워하시지 않겠느냐? 좌의정 나리의 체면은 또 뭐가 되겠느냐?”
혜비는 일부러 ‘아무 이유 없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모영기는 싸늘한 눈빛으로 한청연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저희 둘이 모두 원해서 하는 일입니다. 단순히 소박을 놓는 게 아니라 합의로 이루어진 기별이라는 말입니다.”
한청연도 목소리를 냈다.
“어마마마께서 허락해 주십시오.”
셋의 고집에 방의 분위기는 딱딱하게 변했다.
밖에서 궁녀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며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마마께 아룁니다. 안국공부(国公府)의 도련님께서 왕자빈마마를 급히 만나려고 하십니다.”
‘심인붕? 날 왜 찾아온 거지?’
혜비는 흠칫 놀라며 한청연을 힐끗 보고 물었다.
“인붕이가 궁에 들어오는 경우가 극히 적은데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다더냐?”
“노마나님 옥체에 이상이 생기셨는데 저택의 의원은 아무 도움이 못되고… 기안대군 저택으로 왕자빈마마를 찾으러 가셨으나 왕자빈마마께서 입궐하셨다는 말을 듣고 궁까지 찾아오셨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