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례복을 입은 채, 늠름한 자태를 뽐내던 기안대군은 흠칫 놀라더니 이내 차가운 눈에 비웃음을 담고 물었다.
“좌의정(左相) 댁에 보내. 내 집을 더럽히지 말고.”
하객들은 목소리를 낮추고 귓속말하기 시작했다.
“기안대군(麒王)이 좌의정 댁 큰 여식이랑 혼약이 있긴 했지만 서출 여식과 눈이 맞아서 대비마마께 혼약을 취소해 달라고 간청했는데 대비마마가 거절했다지 뭔가. 그래서 억지로 큰 여식과 서출 여식을 함께 맞이했다네. 겨우 시집온 큰 아씨가 왜 이런 일을 벌인 거지?”
어멈은 이런 상황이 처음인지라 겁을 잔뜩 먹은 얼굴로 신부 얼굴을 가린 면사포를 살짝 들었다. 숨을 쉬고 있나 확인해 볼 심산이었던 것이다.
가마 안에서 쓰러져 있던 새색시 한청연(冷清欢)은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어멈은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 치다 그대로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 안 죽었습니다요!”
한청연은 뻣뻣해진 몸을 움직이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안 죽었다고? 여기는 어디지?’
그녀의 기억은 바이러스 연구소가 최근 연구 개발에 성공한 나노 분자를 노린 테러리스트들의 침입을 당한 것에 멈춰 있었다. 나노 분자를 저장한 캡슐은 반지만 한 크기였는데 그곳에는 연구소의 모든 연구 성과와 엄청난 양의 약품이 들어 있었다. 만약 그것이 놈들의 손에 들어간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한청연은 동료의 도움으로 캡슐을 몸에 지닌 채, 연구소의 옥상에 다다랐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가오던 테러리스트의 사나운 표정을 끝으로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자 화려한 전통 혼례복이 보였다. 혼례복 아래로 피가 뚝뚝 떨어져 가마 밖까지 흐르고 있었다.
댕기 머리를 한 소녀가 가마에 난 창문으로 그녀를 보더니 눈물, 콧물 범벅인 얼굴로 말했다.
“안 죽었어요. 아씨 안 죽었어요! 대군마마, 저희 아씨에게 의원님 좀 불러주세요. 저희 아씨 살 수 있어요.”
‘아씨? 대군마마? 이게 무슨 상황이지?’
한청연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 죽은 게 아니라 타임슬립을 한 거야? 그것도 아기가 아니라 결혼하는 사람으로?’
모영기(慕容麒)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더니 혐오스러운 얼굴로 가마를 힐끗 보고 차갑게 말했다.
“의원을 부르거라.”
저택의 의원이 약 상자를 들고 헐떡이며 뛰어왔다. 그는 몸을 가마에 쑥 들이밀더니 한청연의 상처를 보고 손목을 짚었다. 그러더니 곧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바로 일어서서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대군마마,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구경꾼들이 가마를 빽빽이 둘러싼 채, 고개를 빼들고 구경하는 장면을 본 모영기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가마에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는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 보아라.”
의원은 언사를 고민하다가 모영기에게 다가가 말했다.
“상처는 심장이 아니니 크게 위험할 건 없으나 왕자빈마마께서는 회임한 것 같습니다.”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가마 안의 한청연은 그 소리를 정확히 들었다. 순간 그녀는 크게 벌어지는 입을 어찌할 수 없었다.
‘뭐야? 이 몸이 이제 몇 살이라고? 이때의 사람들은 이렇게 개방적이었나?’
그녀는 믿을 수 없어 자신의 맥을 짚었다. 순간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좋아, 아주 좋아!”
모영기의 차가운 목소리에 의원은 뒷걸음질쳤다. 곧이어 이를 악문 모영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좌의정 참 대단한 양반이군. 여식을 아주 잘 가르쳤어!”
한청연은 숨막힐 듯한 느낌을 받았다. 피를 많이 흘린 그녀는 원래도 어지러운 것을 겨우 참고 있었는데 숨까지 막히자 머리가 새하얗게 되는 것 같았다.
그녀가 겪은 적 없는 일들이 기억으로 변해 밀물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몰려들었다.
온몸에 살기를 띠고 있는 남자는 바로 그녀와 예전부터 혼약관계를 맺었던 서방님이자 두 번째 왕자 기안대군이었다. 왕실에서 전쟁의 신이라고 불리는 전설의 인물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외조부 안국공과 함께 전쟁터로 나가서 병법으로 책략을 세워 공을 수태 세웠다. 그는 장안(长安)의 수많은 소년들의 동경의 대상이자 수많은 소녀들이 꿈에 그리는 낭군감이었다.
한청연의 몸 주인은 그와 예로부터 혼약이 있었으나 아쉽게도 한 달 전에 절에 향 피우러 가던 길에 복면한 강도를 만나 순결을 빼앗겼다. 게다가 어제 자신이 회임한 것을 알아챘던 것이다!
왕실에 오쟁이를 지우다니. 이건 작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명인 혼인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결국 다른 방도가 없었던 몸 주인은 이 상황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가마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이미 끝장난 상황인데 내가 왜 이 몸에 들어오게 된 거야? 어차피 죽는 건 시간문제일 텐데.’
한청연은 다급히 큰소리로 외쳤다.
“이, 이거 놔!”
“이거 놔? 좌의정 댁은 대체 이 모영기를 뭐로 본 거요? 한청연, 죽고 싶어서 이런 짓을 했소? 그럼 어디 소원대로 들어주지!”
한청연은 온몸의 힘이 서서히 빠지는 느낌에 모영기가 있는 곳으로 힘겹게 기어갔다.
모영기는 어두운 눈빛으로 뒤로 슬쩍 물러났다. 지탱할 곳이 사라지자 한청연은 넝마처럼 풀썩 바닥에 쓰러졌다.
“아씨.”
하녀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겁에 질려 몸을 덜덜 떨고 있음에도 그녀는 용기를 내서 한청연의 앞으로 나섰다.
“대군마마, 저희 아씨가 부상이 심해 이렇게 내버려 둔다면 죽을지도 모릅니다.”
모영기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오더니 분노로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죽어도 싸다.”
한청연은 숨을 헐떡이다 크게 기침했다. 그 바람에 가슴팍의 상처가 벌어져 피가 더욱 심하게 흘러내렸다.
“저하!”
좌의정 댁 둘째 딸 한청낭(冷清琅)이 어멈의 부축을 받으며 뛰어왔다. 면사포를 들어올리자 눈물이 글썽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는 가냘픈 몸을 휘청거리며 다가와 모영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다 소녀가 잘못한 것이니 언니를 원망하지 마시옵소서. 저하와 혼인하는 게 강직한 성격의 언니로는 견디기 힘들어서 이런 선택을 했을 것입니다. 저하께서 탓하시려면 청낭이 저한테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한청연을 위해 애원하는 듯하지만 순식간에 한청연에게 동생을 질투하는 죄명을 뒤집어씌웠다.
순간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동생한테도 야박하게 구는 여인이니 덕도 없을 터, 그래서 대군마마가 아내로 맞이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러니까, 둘째 아씨 마음이 얼마나 고와? 평소 집에서 큰 아씨의 구박을 호되게 당한 게 분명해!”
모영기의 차갑던 눈동자는 한청낭을 본 순간,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는 한청낭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인데 네가 왜 신경을 쓰는 것이냐? 이곳은 좌의정 댁이 아니니 네가 설움을 참고 버틸 필요가 없단다.”
한청낭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위로 들더니 가녀린 손을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언니와 저하의 혼약이 먼저인데 저와 함께 시집오는 게 못마땅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저하께서 저를 다시 집으로 보내주시옵서소. 저는 자매의 정에 금이 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모영기는 직접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 언짢은 얼굴로 콧방귀를 뀌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 내가 측빈을 들이겠다는데 그녀의 허락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말이냐? 죽음으로 날 좌우지하려 들다니. 집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닌 저 여인이다. 여봐라, 당장 이 여인을 좌의정 댁으로 보내서 좌의정더러 잘 가르치라고 하여라.”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혼인 날에 소박을 맞다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좌의정 댁 큰 아씨는 너무 자기 주제를 모르는 게 아니야? 감히 기안대군에게 밉보이다니, 고생을 사서 하는군.’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하녀와 달리 한청연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우는 소리를 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걸 얻었군. 서출 동생이라고 하던데 보통 인물이 아니야. 그래서 이 몸 주인을 내쫓고 자신이 그 자리를 꿰찬 거였어!’
한청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나기로 했다. 원래의 몸 주인이 순결을 잃은 걸 모영기가 아직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가 떠나지 않고 버틴다면 모영기가 좌의정 체면이고 뭐고 그녀의 치욕스러운 일을 까발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