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청연은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아주 상쾌한 느낌이 전해지며 사지로 뻗어갔다. 그녀는 머릿속에서 지령을 받고 비밀번호를 입력한 뒤, 분자 창고를 열었다. 첫 번째 미션은 자신의 몸을 스캔하는 것이었다.
분자 창고에는 CT, NMR, MRI 등 의료 검사 기능이 모두 들어 있어 스캔 한 번이면 뇌파로 검사 결과를 모조리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다행히 폐나 기타 내장이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상처가 깊은 탓에 피를 많이 흘려 회복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손을 옷소매에 넣은 채, 분자 창고에서 약품을 꺼내려고 시도해 보았다. 그런데 정말 가능할 줄이야! 죽다 살아난 것 같은 기쁨에 그녀는 손까지 덜덜 떨렸다.
“도순아,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문 좀 지키고 있어. 상처를 치료해야 하니까.”
도순은 순순히 마차 문 쪽으로 옮겨가서는 문 발을 내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한청연은 돌아서서 봉합실과 바늘, 파상풍약 등 수술용품을 꺼냈다. 그녀는 상처를 봉합한 뒤, 붕대로 감싸고 옷을 입었다. 때마침 마차도 궁문 앞에 도착했다.
모영기는 말에서 내린 뒤, 말고삐를 궁문 앞에 있는 시위에게 건네주고는 한청연을 뒤돌아보지 않은 채, 혼자서 성큼성큼 들어갔다.
몸집이 건장한 그는 바람을 일구며 힘차게 걸어갔다. 한편, 부상을 입은 한청연은 식은땀을 흘리며 힘겹게 그를 뒤따라갔다.
모영기는 멀리 떨어진 한청연과 도순을 돌아보며 짜증 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한청연이 가벼운 외상을 입은 것뿐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뻔뻔스럽게 그에게 시집온 여인이 기별에 허락한 것은 분명 연기일 것이고, 어제 갑자기 쓰러진 것 역시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궁까지 오자 당황한 한청연이 일부러 아픈 척 시간을 끈다고 생각해 짜증이 났다.
그는 먼저 임금이 거처하는 연경궁(衍庆宫)으로 갔으나 임금이 보이지 않았다. 내시는 임금과 대신들이 어서방(御书房)에서 국사를 논의하고 있으니 가지 말라고 했다.
그는 발걸음을 돌려 대비마마의 자안궁으로 향했다. 대비의 측근 내시는 대비가 몸이 불편하여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중전 역시도 그들을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그녀는 궁녀를 시켜 만약 둘이 입궐한다면 모영기의 생모인 혜비에게 인사를 올리라고만 했다.
그들은 모두 궁에 있지만 소문이 빨라 어제 기안대군 저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 둘을 만나지 않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실망한 것이 분명했다.
돌아선 모영기의 얼굴은 아주 어두웠다. 그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청연은 그에게 어디 가냐고 묻지도 않고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 궁 전체를 반쯤 돌았다. 죽을 듯이 지쳤을 때쯤에야 둘은 혜비의 거처인 겸하전(蒹葭殿)에 도착했다. 땀에 젖은 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은 한청연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궁녀는 공손한 자세로 둘을 안으로 데려갔다. 상석에 앉은 혜비는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한청연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왔느냐?”
한청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모영기와 함께 혜비에게 절을 올렸다. 아까 들어올 때 보았던 진주가 박힌 분홍색 자수 꽃신이 떠올랐다.
혜비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상궁은 둘에게 예를 올리고 입을 열었다.
“소인 대군마마와 왕자빈마마께 감축드리옵니다.”
혜비는 생글생글 웃더니 짐짓 꾸짖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탁자를 두드리는 봉선화 꽃물을 들인 손톱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경사방(敬事房)의 기(其) 상궁이 여기서 오전 내내 기다렸다. 너희 둘, 잠도 여간 많은 게 아니구나. 어찌 이제서야 온 것이냐?”
상궁은 다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혜비마마도 참, 소인은 혜비마마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 일부러 일찍 온 것입니다.”
한청연은 상황 파악이 빠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어제 혼례식에서 피운 소란이 얼마나 큰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일로 모영기의 외할머니가 고질병으로 쓰러졌으니 시어머니인 혜비가 그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혜비는 그녀를 다정하게 맞아주었다.
“소첩 잘못했습니다.”
혜비는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싸늘한 눈빛에서는 웃음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