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동생의 뜻은 저하께서 지금 제 몸이 허약할 때 얼른 저를 죽여 입막음 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동생이 순조롭게 왕자빈으로 되지 않겠습니까?”
한청낭은 눈물을 왈칵 쏟으며 말했다.
“언니, 제 뜻은 그게 아니라…”
모영기는 흐느끼는 한청낭의 등을 가볍게 다독여 위로를 전한 뒤, 혐오스러운 눈길로 한청연을 힐끗 보고는 홱 돌아섰다.
“저택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소. 할마마마 앞에서 헛소리를 지껄이면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한청낭은 모영기가 나간 뒤, 한청연을 보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이렇게 말했다.
“감히 날 건드려? 어디 한 번 두고 봐!”
한청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도순아, 옷을 갈아입혀 다오!”
소박한 금색 비녀로 머리를 틀어올린 뒤, 궁복으로 갈아입은 한청연은 안색이 창백함에도 불구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녀는 도순의 부축을 받으며 대문을 나섰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의 걸음은 가벼웠지만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강단이 담겨 있었다.
모영기는 그녀와 같은 마차에 타고 싶지 않아 말에 올라탔다. 짙은 녹색의 비단 궁복에 상투를 튼 그는 자태가 늠름하고 귀티가 흘렀다. 때마침 쏟아지는 봄 햇살에 그의 차갑던 이목구비는 부드럽게 풀어지는 듯했다.
한청연이 돌 계단 아래로 내려가자 모영기는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는 눈앞에 서 있는 여인이 어여쁘나 화려하지는 않고, 단아하나 딱딱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세속을 벗어난 듯한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은 그녀의 뒤에 있는 화려한 저택의 대문마저 초라하게 만들었다.
‘미인은 모든 화의 근원이라고 했는데 틀린 말이 아니군.’
그는 콧방귀를 뀌고 더욱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한청연은 자신의 앞으로 휙 하고 지나가는 모영기를 보고는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애써 참으며 마차를 타고 그를 뒤따라갔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아 마차는 가다가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밖을 내다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앞에 모여들어서는 흥분한 얼굴로 고개를 빼들고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짜증이 난 모영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곧 그의 시위가 앞의 상황을 살펴보고 돌아와 고했다.
“대군마마께 아룁니다. 배가 부른 여인이 있는데 마을사람들이 그 여인을 들고 어디로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구경하느라 몰려들어 길이 막힌 것입니다.”
시위의 말이 끝나자마자 앞쪽이 시끌벅적해지더니 머리가 산발이 된 여인 한 명이 불편한 몸으로 힘겹게 자신을 묶고 있는 밧줄을 풀고 마차 앞으로 뛰어왔다. 그러나 곧 두 명의 남자에게 잡히고 말았다.
여인은 몸부림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저는 사내랑 놀아난 적이 없습니다! 어머님, 어머님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여태까지 어머님 곁에서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는데 제가 언제 다른 사내랑 놀아났다고 그러시는 건가요?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되죠!”
그러자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일시적인 욕정을 못 이겨 내 아들에게 미안한 짓을 한 네가 무슨 말이 그리 많느냐? 그 일로 내 아들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고 나 역시 늘그막에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하고 있잖니.”
사람들은 화를 내며 그 여인을 바라보았다.
모영기는 차가운 얼굴을 돌려 문 발이 드리워진 마차 창문을 보며 비꼬았다.
“낭자도 이런 구경은 하고 싶지 않을 터인데, 말머리를 돌려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게 어떻겠소?”
“그럴 필요 없어요!”
한청연은 문 발을 젖히더니 창백한 얼굴을 드러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갑자기 그 여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리 와 보게.”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모영기의 마차가 지나치게 시선을 끄는 탓에 구경꾼들마저 모두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여인은 희망을 본 듯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힘겹게 걸어와 마차 앞에 무릎을 꿇은 뒤, 고개를 조아렸다.
“마님, 살려주십시오. 소인 정말 억울합니다.”
모영기는 언짢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청연, 지금 뭐 하는 짓이오?”
한청연은 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여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네 맥을 좀 짚어보지.”
그녀의 목소리는 신비한 힘을 담고 있는 것처럼 여인은 그녀의 말에 잠깐 멍해 있었다가 순순히 일어났다. 구경꾼들은 엄청난 모영기의 기세에 눌려 감히 다가오거나 여인을 막지 못했다. 일반 양반이 아닌 것 같은 모영기의 마차에 탄 사람이면 그 신분이 어마어마할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한청연은 여인의 맥을 짚어보고 몇 가지 질문을 한 뒤,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단순 복수(腹水)가 찬 것뿐이네. 의원에게 찾아간 적이 없나?”
여인은 놀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속이 자꾸 울렁거리고 구토감이 들어 감히 의원에게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자네 목에 거미모양의 점이 나타난 것을 보아 간병으로 인한 복수네. 임신 증상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