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은 사람이 언니와 하녀밖에 없는데 누가 믿는다고 그래? 한청연, 자신의 신분 파악이 안되는 거야? 너는 가문의 수치이자 저하의 미움을 받는 천덕꾸러기라고.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녀는 봉선화 물을 들인 손톱을 천천히 펼쳐서 한청연의 창백한 얼굴에 가져다 댔다.
“내가 돌아가서 아버님께 이 얘기를 한다면 아버님은 언니를 죽이라고 할 거야. 죽는 게 소박맞았다는 것보다 덜 창피할 거 아니야? 죽으면 좌의정 댁의 명예에 누가 되지도 않고 말이야.”
도순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한청낭에게 덮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아씨에게서 손 떼세요!”
그러나 도순은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저리 비켜. 어디서 감히 말대답질이야!”
한청연은 눈으로 한기를 내뿜더니 한청낭의 손목을 잡고 힘을 주었다. 그러자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한청낭이 비명을 질렀다.
“으악!”
한청연은 이를 악문 채, 또박또박 말했다.
“도순이를 건드리기만 해봐!”
죽어가던 한청연이 이렇게 큰 힘을 쓸 줄 몰랐던 한청낭은 그대로 당하고 말았다. 그녀는 거만하던 방금 전과 달리 떨리는 목소리로 사정했다.
“언니, 잘못했어. 이거 놔. 제발…”
이때, 누군가 방문을 걷어차더니 바람과 함께 모영기가 들어왔다. 그는 무쇠처럼 단단한 손으로 한청연의 팔목을 잡고 말했다.
“한청연, 죽고 싶은 거요!”
극심한 통증에 한청연은 신음을 흘리며 한청낭의 손목을 잡은 손을 풀어주었다. 팔목이 부러질 것 같은 느낌에 그녀는 식은땀을 흘렸다.
한청낭은 가녀린 신음과 함께 모영기의 품으로 뛰어들며 어깨를 들썩였다.
“저하, 살려주세요!”
모영기는 한청연의 손을 뿌리치고는 안타까운 얼굴로 품에 안긴 한청낭을 내려다보았다.
“저 미친 여인과 거리를 두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마음이 여려서 보러 왔다가 이게 무슨 꼴이냐? 저 여인에게 널 해칠 기회만 주지 않았느냐?”
한청낭은 입술을 잘근 깨물고 불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소첩은 언니의 상처가 걱정되어 보러 온 것입니다. 언니도 보고 저하께 사죄하라 설득하려고요… 소첩은 저하가 화내시는 걸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그런 건데 언니가 이럴 줄은…”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한청연의 베개 아래를 슬쩍 훑어보았다.
그제야 한청연은 자신의 베개 아래에 부채와 옥추가 놓여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건 사내의 소지품이었다.
모영기는 표정이 굳더니 부채를 들어 펼쳐 보았다. 부채를 힐끗 본 그는 얼굴을 굳히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절절한 애모의 뜻을 담은 시구군. 한청연, 어제 그대를 살려주는 게 아니었소!”
도순은 다급히 앞으로 나서며 한청낭을 손가락질했다.
“이건 우리 아씨의 물건이 아닙니다. 저것이 아씨에게 오명을 뒤집어씌우자고 벌인 짓입니다. 그리고 방금 전에는 아씨를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언니가 이렇게 무서운데 손에 아무것도 든 게 없는 제가 혼자서 언니를 뭐 어떻게 한다고요…”
한청연은 부채를 주워 들더니 보지도 않고 고개를 젖힌 채, 냉소를 하였다.
“저하, 제가 얼마나 멍청해야 이런 시가 적힌 부채를 몸에 지니고 다니겠습니까? 혼인을 취소하고 싶으시다 했지요? 그 요구를 들어드리지요.”
모영기는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그래, 좋다. 나랑 당장 입궐하여 기별(和离)을 신청하자꾸나.”
한청연은 미소를 지었다.
“못할 건 없지요.”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도순은 초조한 얼굴로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 안 됩니다요!”
한청연은 왕실의 명에 거역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모영기와 함께 궁에 들어가 기별하겠다고 말한다면 그녀는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숨길 수 있는 비밀은 없었다. 한청낭은 절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언제 소문을 퍼뜨릴까 전전긍긍하면서 기다릴 바에는, 엄벌이 떨어질까 두려움에 떠는 것보다는 자발적으로 궁에 들어가는 게 훨씬 승산이 있어 보였다. 어쩌면 대비마마를 만나 사정한다면 살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때, 한청낭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언니는 지금 몸이 다친 상태지 않나요? 저하, 언니가 며칠간 몸을 추스르고 화도 풀렸을 때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떤가요? 언니가 지금 화가 나서 대비마마께 무례라도 범한다면 저하의 앞날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며칠간 몸을 추슬라고? 지금 상황에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인데 한청낭이 가만있을 리가 없어. 내가 살 기회를 모조리 없애려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