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 왕실에 오쟁이를 지우다니. 이건 작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명인 혼인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결국 다른 방도가 없었던 몸 주인은 이 상황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가마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 ‘이미 끝장난 상황인데 내가 왜 이 몸에 들어오게 된 거야? 어차피 죽는 건 시간문제일 텐데.’
- 한청연은 다급히 큰소리로 외쳤다.
- “이, 이거 놔!”
- “이거 놔? 좌의정 댁은 대체 이 모영기를 뭐로 본 거요? 한청연, 죽고 싶어서 이런 짓을 했소? 그럼 어디 소원대로 들어주지!”
- 한청연은 온몸의 힘이 서서히 빠지는 느낌에 모영기가 있는 곳으로 힘겹게 기어갔다.
- 모영기는 어두운 눈빛으로 뒤로 슬쩍 물러났다. 지탱할 곳이 사라지자 한청연은 넝마처럼 풀썩 바닥에 쓰러졌다.
- “아씨.”
- 하녀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겁에 질려 몸을 덜덜 떨고 있음에도 그녀는 용기를 내서 한청연의 앞으로 나섰다.
- “대군마마, 저희 아씨가 부상이 심해 이렇게 내버려 둔다면 죽을지도 모릅니다.”
- 모영기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오더니 분노로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 “죽어도 싸다.”
- 한청연은 숨을 헐떡이다 크게 기침했다. 그 바람에 가슴팍의 상처가 벌어져 피가 더욱 심하게 흘러내렸다.
- “저하!”
- 좌의정 댁 둘째 딸 한청낭(冷清琅)이 어멈의 부축을 받으며 뛰어왔다. 면사포를 들어올리자 눈물이 글썽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는 가냘픈 몸을 휘청거리며 다가와 모영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 “다 소녀가 잘못한 것이니 언니를 원망하지 마시옵소서. 저하와 혼인하는 게 강직한 성격의 언니로는 견디기 힘들어서 이런 선택을 했을 것입니다. 저하께서 탓하시려면 청낭이 저한테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 한청연을 위해 애원하는 듯하지만 순식간에 한청연에게 동생을 질투하는 죄명을 뒤집어씌웠다.
- 순간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 “자신의 동생한테도 야박하게 구는 여인이니 덕도 없을 터, 그래서 대군마마가 아내로 맞이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 “그러니까, 둘째 아씨 마음이 얼마나 고와? 평소 집에서 큰 아씨의 구박을 호되게 당한 게 분명해!”
- 모영기의 차갑던 눈동자는 한청낭을 본 순간,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는 한청낭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인데 네가 왜 신경을 쓰는 것이냐? 이곳은 좌의정 댁이 아니니 네가 설움을 참고 버틸 필요가 없단다.”
- 한청낭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위로 들더니 가녀린 손을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 “언니와 저하의 혼약이 먼저인데 저와 함께 시집오는 게 못마땅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저하께서 저를 다시 집으로 보내주시옵서소. 저는 자매의 정에 금이 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 모영기는 직접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 언짢은 얼굴로 콧방귀를 뀌었다.
- “말도 안되는 소리. 내가 측빈을 들이겠다는데 그녀의 허락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말이냐? 죽음으로 날 좌우지하려 들다니. 집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닌 저 여인이다. 여봐라, 당장 이 여인을 좌의정 댁으로 보내서 좌의정더러 잘 가르치라고 하여라.”
-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 혼인 날에 소박을 맞다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 ‘좌의정 댁 큰 아씨는 너무 자기 주제를 모르는 게 아니야? 감히 기안대군에게 밉보이다니, 고생을 사서 하는군.’
-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하녀와 달리 한청연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 ‘우는 소리를 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걸 얻었군. 서출 동생이라고 하던데 보통 인물이 아니야. 그래서 이 몸 주인을 내쫓고 자신이 그 자리를 꿰찬 거였어!’
- 한청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나기로 했다. 원래의 몸 주인이 순결을 잃은 걸 모영기가 아직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가 떠나지 않고 버틴다면 모영기가 좌의정 체면이고 뭐고 그녀의 치욕스러운 일을 까발릴 수 있었다.
- 그녀는 힘겹게 일어나며 말했다.
- “도순아, 이만 가자.”
- 고개를 숙인 한청낭의 눈에 의기양양한 빛이 어렸다.
- 모영기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 “눈치는 있네.”
- “잠깐!”
- 수군거리는 사람들 뒤로 조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발의 노파가 지팡이를 짚은 채, 하인의 부축을 받으며 기안대군의 저택 대문에 나타났다.
- 모영기는 살짝 당황한 얼굴로 노파를 불렀다.
- “외할머니.”
- 노파는 모영기의 외조모이자 안국공의 부인이었다.
- “이게 뭐 하는 짓이냐?”
- 노파는 바닥의 핏자국을 보더니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녀는 핏기가 가신 창백한 입술을 깨물며 숨을 몰아쉬었다.
- “얼른 왕자빈마마를 저택으로 모시고 의원을 부르거라. 이러다 사람 목숨이 위험하겠구나.”
유료회차
결제 방식을 선택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