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밤의 피를 닦은 수건이라고? 무슨 규정이 이렇게 변태 같아? 부부 사이의 은밀한 사정을 꼭 이렇게 남에게 보여주고 평가받아야 하나? 설마 피의 색깔이나 핏자국 모양에 대해서도 요구가 있는 게 아니겠지? 게다가 나는 숫처녀의 몸도 아닌데 그런 피가 날 리 없잖아. 아니지, 설사 숫처녀가 맞다고 해도 기안대군과 합방한 적도 없는데 무슨 피를 닦아?’
무릎을 꿇고앉은 한청연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때, 옆에 있던 모영기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어제 부인이 부상을 입어 합방하지 못했습니다.”
한청연은 흠칫 놀랐다. 그녀는 자신을 증오하는 모영기가 입궐하자마자 자신이 숫처녀의 몸이 아니라는 것을 까발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만 한다면 대비는 틀림없이 그녀에게 엄벌을 내릴 것이고 모영기는 원하던 대로 한청낭과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모영기가 먼저 나서서 이 상황을 모면할 줄이야. 한청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준수한 모영기의 얼굴에는 여전히 혐오의 빛이 어려 있었다. 그는 한청연에게 시선도 돌리지 않고 일부러 그녀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내가 불쌍해서 이러는 건가? 아니면 사내의 자존심에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어서? 그것도 아니면 왕실의 체통을 위해서?’
“소인이 감히 여쭙는 건데 그럼 측빈마마의 수건은 가져오셨습니까?”
혜비는 눈살을 찌푸렸다.
“너 설마 어제 둘째의 방에서 묵은 것이냐?”
모영기는 고개를 저었다.
“소자 어제 외할머니의 건강이 염려되어 외할아버지 댁으로 갔다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서재에서 묵었지요.”
혜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음’하고 소리를 냈다.
“너는 왕실의 사람이니 절대 체통을 잘 지켜야 하고 뭐든 분수에 맞게 처사해야 한다. 네가 한씨 가문의 둘째를 마음에 품은 걸 알고 대비마마께서 은혜를 베풀어 그 아이도 함께 맞아들이게 하셨지 않느냐? 앞으로 시간이 많으니 마음을 급히 먹지 말고 정실과 첩실의 기강을 바로잡아 대비마마께 심려를 끼치는 일을 하지 말거라.”
혜비가 자신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그녀를 꾸짖지도 않았지만 한청연은 혜비의 말에서 자신에 대한 불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모영기가 혼례를 취소하겠다고 말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모영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마마마의 말씀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혜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궁녀는 재빨리 대추차 두 잔을 내오더니 모영기와 한청연의 앞에 올려놓았다.
차는 자고로 심은 뒤, 옮길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평생 함께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기도 했다. 신혼 부부가 시어머니에게 차를 권하는 것은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받아들인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청연은 저도 모르게 머뭇거리게 되었다.
‘이 차를 권해? 말아?’
모영기도 찻잔을 받지 않았지만 일어서지도 않았다. 둘은 그렇게 정적에 휩싸인 채, 누구도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어마마마, 소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할 말이 있거든 차를 권하고 난 뒤에 말하거라.”
혜비는 뒤에 서 있는 상궁을 힐끗 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모영기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일어서서 찻잔을 머리 위로 든 채, 혜비에게 올렸다. 혜비는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신 뒤,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궁녀는 쟁반을 들고 한청연의 옆으로 다가갔다. 한청연은 방금 전 혜비의 눈길에서 그녀가 기 상궁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눈치 빠르게 두 손으로 찻잔을 들었다.
궁녀가 쟁반을 치우자 한청연은 찻잔이 끓는 물에 담근 것처럼 뜨겁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지, 불에 구웠나? 펄펄 끓는 쇳물에 담근 것처럼 왜 이렇게 뜨거운 거야?’
그녀는 뜨거운 찻잔에 손이 닿는 순간 찻잔을 던지고 말았다.
한청연과 모영기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꿇고 있었는데 찻잔이 떨어지면서 둘의 몸에 차가 튀었다. 그녀도 손끝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숨을 들이쉬었다.
하얗던 손끝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모영기는 힘줄이 솟은 이마를 찌푸리며 싸늘하게 말했다.
“부인, 일부러 그런 것이오?”
혜비도 벌떡 일어서서 화를 내려고 했지만 무슨 생각에서인지 화를 꾹 참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몸의 상처가 심해서 찻잔을 들기 힘든 것이냐?”
한청연이 고개를 들자 혜비의 눈에 드리운 싸늘한 기색이 보였다. 그녀는 바로 혜비의 말이 연기라는 것을 알아챘다. 동시에 혜비의 뒤에 서 있는 상궁이 대비마마의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혜비가 어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고 자애로운 모습만 보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