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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후회해 보시지요

죽도록 후회해 보시지요

소울유

Last update: 2025-05-01

제1화

  • “꺄악!”
  • 혼례식을 돕는 어멈의 새된 비명이 축하를 뜻하는 꽹과리 소리를 뒤덮었다.
  • “새, 새색시가… 깨어나지 않아요!”
  • 기안대군의 저택에 축하하러 온 사람들이 헉 하고 놀랐다.
  • “죽었다고?”
  • 혼례복을 입은 채, 늠름한 자태를 뽐내던 기안대군은 흠칫 놀라더니 이내 차가운 눈에 비웃음을 담고 물었다.
  • “좌의정(左相) 댁에 보내. 내 집을 더럽히지 말고.”
  • 하객들은 목소리를 낮추고 귓속말하기 시작했다.
  • “기안대군(麒王)이 좌의정 댁 큰 여식이랑 혼약이 있긴 했지만 서출 여식과 눈이 맞아서 대비마마께 혼약을 취소해 달라고 간청했는데 대비마마가 거절했다지 뭔가. 그래서 억지로 큰 여식과 서출 여식을 함께 맞이했다네. 겨우 시집온 큰 아씨가 왜 이런 일을 벌인 거지?”
  • 어멈은 이런 상황이 처음인지라 겁을 잔뜩 먹은 얼굴로 신부 얼굴을 가린 면사포를 살짝 들었다. 숨을 쉬고 있나 확인해 볼 심산이었던 것이다.
  • 가마 안에서 쓰러져 있던 새색시 한청연(冷清欢)은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어멈은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 치다 그대로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 “아, 안 죽었습니다요!”
  • 한청연은 뻣뻣해진 몸을 움직이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 ‘안 죽었다고? 여기는 어디지?’
  • 그녀의 기억은 바이러스 연구소가 최근 연구 개발에 성공한 나노 분자를 노린 테러리스트들의 침입을 당한 것에 멈춰 있었다. 나노 분자를 저장한 캡슐은 반지만 한 크기였는데 그곳에는 연구소의 모든 연구 성과와 엄청난 양의 약품이 들어 있었다. 만약 그것이 놈들의 손에 들어간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 한청연은 동료의 도움으로 캡슐을 몸에 지닌 채, 연구소의 옥상에 다다랐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가오던 테러리스트의 사나운 표정을 끝으로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 고개를 숙이자 화려한 전통 혼례복이 보였다. 혼례복 아래로 피가 뚝뚝 떨어져 가마 밖까지 흐르고 있었다.
  • 댕기 머리를 한 소녀가 가마에 난 창문으로 그녀를 보더니 눈물, 콧물 범벅인 얼굴로 말했다.
  • “안 죽었어요. 아씨 안 죽었어요! 대군마마, 저희 아씨에게 의원님 좀 불러주세요. 저희 아씨 살 수 있어요.”
  • ‘아씨? 대군마마? 이게 무슨 상황이지?’
  • 한청연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 ‘나 죽은 게 아니라 타임슬립을 한 거야? 그것도 아기가 아니라 결혼하는 사람으로?’
  • 모영기(慕容麒)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더니 혐오스러운 얼굴로 가마를 힐끗 보고 차갑게 말했다.
  • “의원을 부르거라.”
  • 저택의 의원이 약 상자를 들고 헐떡이며 뛰어왔다. 그는 몸을 가마에 쑥 들이밀더니 한청연의 상처를 보고 손목을 짚었다. 그러더니 곧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바로 일어서서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 “대군마마,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구경꾼들이 가마를 빽빽이 둘러싼 채, 고개를 빼들고 구경하는 장면을 본 모영기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가마에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는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 “솔직히 말해 보아라.”
  • 의원은 언사를 고민하다가 모영기에게 다가가 말했다.
  • “상처는 심장이 아니니 크게 위험할 건 없으나 왕자빈마마께서는 회임한 것 같습니다.”
  •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가마 안의 한청연은 그 소리를 정확히 들었다. 순간 그녀는 크게 벌어지는 입을 어찌할 수 없었다.
  • ‘뭐야? 이 몸이 이제 몇 살이라고? 이때의 사람들은 이렇게 개방적이었나?’
  • 그녀는 믿을 수 없어 자신의 맥을 짚었다. 순간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 “좋아, 아주 좋아!”
  • 모영기의 차가운 목소리에 의원은 뒷걸음질쳤다. 곧이어 이를 악문 모영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좌의정 참 대단한 양반이군. 여식을 아주 잘 가르쳤어!”
  • 한청연은 숨막힐 듯한 느낌을 받았다. 피를 많이 흘린 그녀는 원래도 어지러운 것을 겨우 참고 있었는데 숨까지 막히자 머리가 새하얗게 되는 것 같았다.
  • 그녀가 겪은 적 없는 일들이 기억으로 변해 밀물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몰려들었다.
  • 온몸에 살기를 띠고 있는 남자는 바로 그녀와 예전부터 혼약관계를 맺었던 서방님이자 두 번째 왕자 기안대군이었다. 왕실에서 전쟁의 신이라고 불리는 전설의 인물이었다.
  • 그는 어렸을 때부터 외조부 안국공과 함께 전쟁터로 나가서 병법으로 책략을 세워 공을 수태 세웠다. 그는 장안(长安)의 수많은 소년들의 동경의 대상이자 수많은 소녀들이 꿈에 그리는 낭군감이었다.
  • 한청연의 몸 주인은 그와 예로부터 혼약이 있었으나 아쉽게도 한 달 전에 절에 향 피우러 가던 길에 복면한 강도를 만나 순결을 빼앗겼다. 게다가 어제 자신이 회임한 것을 알아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