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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혼자가 아니야, 아기 프린세스

결코 혼자가 아니야, 아기 프린세스

울림

Last update: 2024-05-19

제1화 잘못을 시인하지 않으면 그냥 꿇어

  • 리안시, 센트럴 별장, 임가.
  • 정월대보름을 맞아 환하게 불을 밝힌 덕에 평소 스산했던 임가 저택에도 한 가닥의 사람 냄새가 풍기는 듯했다.
  • 날이 천천히 저물어가던 그때, 불현듯 어디선가 귀를 찌르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 “꺄악—”
  • 쿵쿵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남산만 한 여자가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 화들짝 놀란 사람들은 서둘러 여자 곁으로 모여들었다.
  • 임가의 대표인 임빈이 다급히 물었다.
  • “아영아, 괜찮아?”
  • 여자의 다리 사이로 검붉은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고 여자는 잔뜩 겁에 질린 채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 “빈이 오빠, 나 너무 아파……우리 아이……빨리 우리 아이 좀 구해줘!”
  • 유진숙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 문아영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계단 위로 시선을 돌렸다.
  • 모두가 그녀를 따라 시선을 옮겼고 곧이어 계단 맨 위에 우두커니 서있는 어린 여자아이가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 세 살 반 정도 되어 보이는 그 여자아이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 저도 모르게 토끼 인형을 꽉 끌어안았다.
  • 임성철은 크게 노하며 으름장을 놓았다.
  • “네가 아영이를 아래로 밀었어?!”
  • 여자아이는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 “아니에요. 제가 아니에요……”
  • 문아영은 눈물을 훔치며 임성철을 말렸다.
  • “아니에요……아버님, 콩이 잘못 아니에요. 콩이는 아직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니까, 일부러 그러진 않았을 거예요……”
  • 그러나 그녀의 말은 곧 콩이를 단죄하는 것과도 마찬가지였다.
  • 임빈의 두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는 더 이상 질문도 필요 없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당장 저 요망한 계집애를 다락방에 가두어라! 돌아오면 아주 혼을 내줄 테니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어!”
  • 사람들은 문아영을 데리고 허둥지둥 병원으로 향했다.
  • 어린 콩이는 다락방으로 끌려가면서 신발 한 짝까지 잃어버렸지만, 눈물을 흘리거나 용서를 빌기는커녕 잔뜩 고집스러운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않는 다락방은 춥고 어두웠다. 창문이 바람에 흔들리며 쿵 하는 소리를 낼 때마다 마치 괴물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 콩이는 품 안에 있는 토끼 인형을 더욱 꽉 끌어안으며 구석에 웅크려 있었다.
  • ‘추워……’
  • ‘나는 정말로 밀치지 않았는데, 왜 누구도 나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걸까?’
  • 창밖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칼바람이 창문 틈새로 들어와 한 겹, 또 한 겹 콩이의 작은 몸을 덮쳤다.
  •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하룻밤이 지났다.
  • 그날 밤, 콩이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날, 문아영에게 벌을 받고 밥을 한 끼도 먹지 못한 콩이가 이미 정신을 잃기 직전인 상황에 놓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 임성철은 콩이가 잘못을 시인하기 전에는 다락방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 “엄마……”
  • 몸이 꽁꽁 얼어붙은 콩이는 입술이 퍼렇게 질린 채 덜덜 떨었다. 아이는 눈을 꼭 감고 중얼거렸다.
  • “엄마……콩이는 잘못하지 않았어. 콩이는 잘못 없어……”
  • 아이는 일 년 전, 엄마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엄마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는 또 다른 아줌마를 데려왔고 곧이어 아줌마의 뱃속에는 아기가 생겼다……
  • 하지만 그 아줌마는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콩이를 다정하게 대해줬지만, 둘만 있을 때면 악마로 변했다.
  • “엄마……”
  • 생각에 잠겨있던 콩이는 토끼 인형의 귀를 손에 꼭 잡은 채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다락방 문이 열렸다.
  • 임빈은 분노에 찬 얼굴로 정신을 잃은 콩이를 잡고 계단 아래로 질질 끌고 가더니 그대로 눈밭에 휙 던져버렸다.
  • 어린 콩이는 치명적인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며 힘겹게 눈을 떴다……
  • “아빠…… 배고파요……”
  • 아이는 본능적으로 말했다.
  • 임빈은 차갑게 웃으며 대꾸했다.
  • “아영이의 뱃속에 있던 남동생을 죽이고 감히 배고프다는 소리가 나와? 나 임빈에게서 어떻게 너처럼 악독한 딸이 나올 수 있었는지 모르겠네.”
  • 몸이 얼어붙은 콩이는 두 눈이 생기를 잃었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 임빈은 아이의 모습에 더더욱 화가 치밀었다. 잘못을 저지른 주제에 아직도 고집을 피워?
  • 이토록 어린 것이 어쩜 마음이 이렇게 지독한 것일까.
  • “아이의 잘못은 부모의 죄라고 했지. 지금 남동생을 죽였는데, 커서는 살인 하나 저지르지 못할까! 내가 오늘 너를 제대로 훈육을 시키지 못하면, 네 아비가 아니다!”
  •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구석에 놓여있던 빗자루를 집어 들고는 발로 밟아 절반 부러트렸다.
  • 손가락 두 개 굵기만큼 넓은 막대기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콩이의 몸에 닿자 콩이는 비명을 내질렀다.
  • “잘못했어 안 했어?!”
  • 임빈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 “내가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 내가 안 그랬어요!”
  • 콩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작은 얼굴에는 고집이 묻어났다.
  • 임빈은 더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 “네가 아니면 아줌마 혼자 넘어졌다는 거야?! 임신 6개월이나 되는 사람이 무슨 이득을 본다고 무턱대고 계단을 구르겠어?!”
  • 그는 문득 출혈 과다로 목숨이 위태롭다는 진단을 두 번이나 받은 문아영이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면서도 여전히 콩이를 탓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 문아영은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불쌍한 콩이가 남동생이 태어나면 더 이상 사랑을 받지 못할까 두려워 그런 것이지, 일부러 자신을 밀친 건 아닐 거라며 호소했다.
  • 임빈은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어 계속해서 콩이를 때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 “계속 억지를 부려? 어디 또 변명해 봐!”
  • 그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콩이를 막대기로 내리쳤다.
  • 얼마나 이성을 잃고 때렸으면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진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던 그는 콩이가 완전히 기절을 한 후에야 겨우 때리던 동작을 멈췄다.
  • “넌 그냥 여기서 무릎 꿇고 있어! 아줌마가 퇴원할 때까지 한 발짝도 움직일 생각하지 마!”
  • 임빈은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막대기를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자리를 떠났다.
  • 그는 최근 심각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회사에 큰 문제가 생겨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보름을 넘게 애걸복걸했지만,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 게다가 오늘 문아영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6개월 된 아들이 요절하는 바람에 임가에서 손꼽아 기다리던 유일한 후손마저 잃고 말았다.
  •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오는 악재에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어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끝내 그는 그 분노를 전부 어린 콩이에게 쏟아버렸던 것이다.
  • 콩이의 토끼 인형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아이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또다시 눈밭에 픽 쓰러지고 말았다……
  • 아이는 왠지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죽으면 엄마를 만날 수 있진 않을까?
  • 이때, 콩이의 귓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 [콩아, 얼른 외삼촌에게 전화를 걸어!]
  • [너의 외삼촌 이름은 주태석이고 전화번호는 010……]
  • “전화……”
  • 콩이는 천천히 눈을 떴다.
  • 이때, 바닥에 떨어진 검은색 휴대폰 하나를 발견한 콩이는 생존본능에 의해 필사적으로 휴대폰을 향해 기어갔다.
  • “010……”
  • 콩이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손이 꽁꽁 얼어붙은 탓에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던 아이는 오랜 시간 노력한 끝에야 겨우 전화를 걸 수 있었다……
  • **
  • 한편, 서울에 위치한 한옥 저택 안.
  • 주종섭의 훈화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 “또 일 년이 지났군. 주태석, 분명 올해에 의학교수 시험을 넘을 수 있을 거라 했었지?!”
  • 주가의 여덟 형제는 시선을 내려 깐 채 단정히 앉아있었고 주태석은 코를 만지작거렸다.
  • 이때, 불현듯 어르신이 말머리를 돌려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 “그리고 벌써 4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너희 여동생을 찾지 못했단 말이냐?”
  • 여덟 형제의 낯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그들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르신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던 형제들마저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 그들의 여동생인 주단옥은 백혈병으로 인해 어릴 때부터 수혈과 항암화학요법, 그리고 골수 이식까지 받았다……
  • 주가는 20년 동안 주단옥의 곁을 지키며 조심스럽게 간호를 이어왔지만, 그녀의 병은 갈수록 악화되었고 급기야 뇌기능마저 영향을 받아 그녀의 기억에 손상을 주기 시작했다……
  • 그러다 4년 전, 그녀는 갑자기 실종이 되었다.
  • 주태석은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암 센터의 주치의로서 주단옥의 치료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었다.
  • 어느 날, 주태석은 한 중증 환자의 응급 구조에 투입되었고 하필이면 그날…… 주단옥이 감쪽같이 사라졌던 것이다.
  • 4년 내내, 자책과 후회에 사로잡혀있던 주태석은 그 누구와도 비할 바 없이 천부적인 의학적 재능을 갖고 있음에도 더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 여덟 명의 아들이 있는 주가에서 주단옥은 유일한 딸이었다.
  • 딸이 사라지자 엄마인 이은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몸져누웠고 아버지인 주종섭도 성격이 나날이 괴팍해졌다.
  • 주 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은 마치 큰 돌덩이 하나가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듯 숨 막히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 주가의 맏아들 주일훈은 JS 상업 제국의 주인장으로서 쉬지 않고 끊임없는 야근을 이어가며 목숨을 걸고 일을 하는 탓에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매일 약을 먹어야만 했다.
  • 주가의 둘째 아들인 주현빈은 J 항공사에서 가장 명망이 높은 기장이었지만, 정신건강 테스트에서 불합격을 받는 바람에 벌써 4년째 출근하지 못하고 집에서 마음을 수련하는 중이었다.
  • 주가의 셋째 아들은……
  • 서재에는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 이때, 불현듯 주태석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