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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당장 쫓아내

  • 주 씨 가문에는 아침 회의 때 휴대전화를 켜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흐름이 끊기는 걸 싫어하는 주종섭의 주도하에 엄격히 지켜지는 암묵적인 룰이었다.
  • 주태석은 불호령이 떨어질까 황급히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서 종료 버튼을 누르려 했지만 주종섭의 냉랭한 호통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받아!”
  • 주태석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 “낯선 번호입니다. 안 받아도 괜…”
  • 주종섭은 찻잔을 옆으로 치우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받고 스피커폰으로 돌려!”
  • 주 씨 가문 넷째와 셋째는 동정 어린 눈으로 주태석을 응시했다.
  • 주태석은 어쩔 수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서 스피커폰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 아주 앳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예고도 없이 그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 “여보세요… 막내 외삼촌? 나는 콩이예요… 우리 엄마는 주단옥이에요… 막내 외삼촌 주태석 맞아요?”
  • 정해진 멘트라도 읽듯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기계적인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꺼져버릴 듯 작고 가냘펐다.
  • 일순 주 씨 일가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 툭… 주종섭이 손에 들고 있던 펜 뚜껑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 누군가 목을 조르기라도 한 듯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 전화기 너머로 앳된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 “외삼촌… 콩이 춥고 배고파요… 콩이는 아줌마를 밀지 않았는데 아무도 내 말 믿지 않아요… 아빠가 문 앞에서 무릎 꿇고 있으래요… 콩이 너무 추워요… 막내 외삼촌, 콩이 데리러 와주면 안 돼요? …”
  • 끝에 갈수록 여자아이의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져갔다.
  • 전화기 너머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소리는 어렴풋이 들렸지만 여자아이의 목소리는 뚝 그쳤다.
  • 황급히 휴대전화를 입가에 가져다 댄 주태석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 “여보세요. 코… 콩아? 지금 어디야? 어딘지 외삼촌한테 말해! 외삼촌이 데리러 갈게!”
  •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 주종섭은 아연실색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짧은 사이에 10 년은 늙은 듯한 얼굴에 방금 전 주태석을 몰아붙이던 딱딱하고 엄숙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 “지금 당장 이 번호로 위치 추적해! 얼른! 서둘러!”
  • **
  • 콩이는 미처 통화를 마치기도 전에 정신을 잃었고 휴대전화는 눈밭에 툭 떨어졌다.
  •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전화를 찾으러 나온 임빈은 꿈쩍도 하지 않는 콩이를 발견하고는 가차 없이 발길질을 가했다.
  • “흥! 진작에 뒈질 것이지.”
  • 기분 잡친 임빈은 퉤 하고 침을 내뱉었다.
  • 4년 전 길 가다가 너덜너덜한 누더기를 걸친 여자 하나를 주운 임빈은 선심을 베풀어 그녀를 자신의 아파트에 들였다.
  • 그런데 깨끗이 씻기고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힌 그 여자는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 그때 임빈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약간 멍청한 그녀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 사랑에 빠진 병신처럼 관계를 강요하지 않는다고 그녀를 달래면서 과거에 상관없이 그녀를 아껴주었는데…
  •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 길거리를 떠돌면서 그 몸뚱이를 어떻게 굴려댔을지 모를 일이었다.
  • 당장 콩이만 봐도 그의 흔적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 의심이 들었지만 임빈은 꿋꿋이 친자 확인을 의뢰하지 않았다.
  • 콩이가 그의 딸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는 남성에서 제일가는 병신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휴대전화를 챙겨들고 따뜻한 서재로 들어온 임빈은 쉴 새 없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 “안녕하세요… 최 대표님, 임빈입니다. 서울 주 씨 가문 쪽에 아는 분이 계십니까?”
  • “여보세요, 오 사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서울 주 씨 가문에 아는 분 계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저희 회사 사정이 조금…”
  • **
  • 서재 밖은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콩이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눈밭에 엎드려 있었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고 어느새 날도 어두워졌다.
  • 희미하게 의식은 있었지만 눈을 뜰 힘조차 없었다.
  • 엄마가 돌아가시고 한 번도 운 적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수없이 구타를 당했을 때에도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았는데 지금은 조금 울고 싶었다.
  • 외삼촌에게 연락을 했지만 그쪽에서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들도 그녀를 버리려는 건가.
  • 이 세상에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엄마도 그럴까? 죽고 하늘에서 엄마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지금 그녀의 모습을 보면 엄마도 그녀를 버릴까?
  • 콩이는 얼어서 자줏빛이 된 입술을 달싹이며 마음속으로 반복해서 되뇌었다.
  • 엄마… 콩이 울지 않아요. 콩이 아주 착해요…
  • 바로 그때, 땅을 흔드는 자동차 엔진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 임가 별장으로 7,8대의 검은색 차량이 돌진했다. 선두에 있던 차량에서 검은색 패딩 코트를 입은 사내가 내리더니 다짜고짜 임가 별장 대문을 걷어찼다.
  •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콩이의 왜소한 체구는 그대로 묻혀 버렸다.
  • 주태석은 초조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전화에서 콩이는 분명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고 얘기했었다.
  • 그 순간, 현관문 앞에 소복이 쌓인 작은 눈더미가 시야에 들어왔다. 주태석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 허겁지겁 달려간 주태석은 손이 빨갛게 얼어붙을 정도로 허둥지둥 눈을 파헤쳤다. 마침내 눈더미 아래에서 작은 형체를 발견했다.
  • “콩아!?”
  • 주태석은 황급히 아이를 안아올렸다. 콩이의 작은 얼굴을 보는 순간 그 아이가 주 씨 가문의 아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 아이의 작은 얼굴은 여동생의 어릴 적 모습을 쏙 빼닮았다.
  • 이 아이는 그들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여동생의 아이, 콩이였다!
  •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콩이는 어렴풋이 따뜻한 품 안에 안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사람은 옷을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기도 했다.
  • 너무 오랫동안 추위에 떨고 있었던 탓에 감각이 마비되었지만 찰나와도 같은 따뜻한 순간이 지나고 뼛속까지 스며드는 차가운 기운에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려왔다.
  • 콩이는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몸을 떨며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마침내 사내의 얼굴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 그는 엄마와 닮은 것 같기도, 닮은 것 같지 않기도 했다.
  • 콩이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가냘프게 물었다.
  • “막내… 외삼촌이세요? … 외삼촌… 콩이는 아줌마를 밀지 않았어요…”
  • 이미 의식을 잃은 콩이는 거의 본능적으로 중얼거렸다.
  • 잔뜩 흥분한 주태석과 달리, 콩이는 온기도 감정도 없는 로봇처럼 고요했다.
  • 주태석은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 품에 안긴 아이는 얇은 잠옷 차림으로 그 혹독한 추위를 견뎠던 것이다.
  • 아이의 작은 얼굴은 추위에 보랏빛으로 물들었고 마르고 갈라진 입술은 검게 변했다.
  • 얼음으로 조각된 조각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아이의 모습에 주태석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조금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 같았다.
  • “콩아… 막내 외삼촌 왔어. 막내 외삼촌이랑 집에 가자.”
  • 주태석은 저도 모르게 목이 메었다. 여태 이 작은 몸으로 어떻게 버텨냈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 조금만 늦었다면 이대로 죽었을지도 몰랐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 조심스럽게 콩이를 안아든 주태석은 콩이에게 온 신경을 집중한 채 주차된 차를 향해 달려갔다.
  • “콩아, 조금만 버텨.”
  • 주태석은 잔뜩 갈라지고 쉰 목소리로 아이에게 쉼 없이 속삭였다.
  • “자면 안 돼…”
  • “콩아, 외삼촌 말 들려?”
  • “콩아…”
  • 콩이는 이미 의식을 잃었다.
  • 바들거리며 뛰어온 주종섭은 살짝 부풀어 오른 주태석의 옷 앞섶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물었다.
  • “어떻게 됐어?”
  • 주태석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 “빨리! 병원으로, 병원으로 가!”
  •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주 씨 일가는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 그때 소식을 들은 임빈이 기쁨과 설렘이 가득한 얼굴로 헐레벌떡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 방금 전, 주 씨 일가족들이 쳐들어왔을 때 경비원에게 제지당했는데 주일훈이 자신의 이름을 대자 경비원은 곧장 그 사실을 임빈에게 알렸다.
  • 마침 주 씨 가문에 어떻게 줄을 대야 할지 골머리를 앓던 임빈은 순간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 주 씨 일가가 갑자기 여기까지 온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한 번 비벼볼 수 있었다.
  • 이제 임 씨 가문에도 볕 뜰 날이 찾아왔다!
  •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린 임빈은 황급히 옆에 선 고용인에게 지시했다.
  • “그 망할 계집애 아직도 현관문 앞에서 무릎 꿇고 있어? 당장 쫓아내!”
  • 그 재수 없는 년은 자기 어미를 죽인 거로도 모자라 이제 그의 회사까지 망치고 있었다.
  • 어떻게 만난 귀인인데, 그 하찮은 계집 때문에 수포로 돌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