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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그녀도 가족이 생겼다

  • 주일훈의 말에 주 씨 형제는 음산하게 눈을 번뜩였다.
  • 주태석은 손목을 비틀고서 손가락 관절을 딱딱 소리 나게 꺾었다.
  •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는 다섯째 주영준은 햇볕에 검게 그을린 피부와 험악한 인상만큼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로 주일훈의 말이 끝나자마자 곧장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어딘가에서 빼돌린 것인지 철근 하나를 손에 들었다.
  • 우아함이 넘치는 기장 주현빈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 “법치사회에서 노골적으로 사람을 때리면 안 되지.”
  • 그러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지나가던 간호사 한 명을 멈춰 세웠다.
  • “혹시 여기 포대자루 있어요?”
  • 그 말에 일순 멈칫하던 간호사는 이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 “이, 있어요. 약국에 포대자루도 있고 종이 박스도 많아요…”
  • 당연히 무언가를 담을 용도로 사용할 것이라 생각한 간호사는 별다른 생각 없이 말했다. 물건을 담기에는 포대자루보다 종이 박스가 훨씬 나을 테니까.
  • 주현빈은 싱긋 미소 지었다.
  • “고마워요. 포대자루로 주시면 돼요.”
  • 먼지 나게 두들겨 패려면 포대자루가 제격이지.
  • “…”
  • **
  • 게이트를 사이에 두고 VIP 병실과 단절된 복도 끝에는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 임빈은 얼어 죽을 것 같은 추위를 견디며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불평했다.
  • 날이 밝을 때까지 밤새도록 기다렸지만 주 씨 일가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 밤늦게까지 버티던 임성철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돌아갔고 떠나기 전에 주 씨 가문이 만나줄 때까지 버티며 성의를 보이라고 신신당부했다.
  • 꽃샘추위가 한창이라 겨울밤보다 더욱 추웠다. 임빈은 춥고 피곤하고 배고프고 졸렸다.
  •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고 푹 자고 싶었다.
  • 한번 그 생각을 시작하자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한 시간을 더 기다린 끝에 임빈은 결국 이만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 지하 주차장.
  • 임빈은 어딘가에 전화를 걸면서 걸음을 옮겼다.
  • “계속 지켜보고 있다가 주 씨 일가가 나오면 바로…”
  • 미처 말을 잇기도 전에 일순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누군가 그에게 포대자루를 씌웠다.
  • 곧이어 쉴 새 없이 퍼부어지는 주먹질에 임빈은 비명을 질렀다.
  • “당신들 뭐야! 누구야!”
  • 주 씨 팔 형제는 임빈을 짓밟은 채 죽도록 두들겨팼다.
  • 원래대로라면 그들이 직접 손을 쓸 것도 없이 사람을 시켜 혼쭐을 내주었을 테지만 콩이의 몸에 난 상처와 집에 가면 밥을 먹을 수 있는지, 때리지 않을 것인지 조심스럽게 묻던 모습을 떠올리자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분노가 주체가 되지 않았다!
  • 임빈은 고통 어린 신음을 흘리며 반격할 힘도 없이 맞기만 했다.
  • “그만…”
  • “내가 누군지 알아? 난 BB 그룹 대표 임빈이야! 감히 날 건드려… 절대…”
  • 피식 코웃음을 치며 넥타이를 풀어헤친 주일훈은 손을 들어 ‘멈추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 주 씨 형제들은 곧장 동작을 멈추었고 주영준은 철근을 든 채 눈을 가늘게 떴다.
  • 구타가 멈추자 임빈은 자신의 협박이 먹혀든 것이라 생각하고 안도했다.
  • 하지만 다음 순간, 주영준이 철근을 높이 들어 올리더니 임빈의 종아리를 힘껏 내리쳤다.
  • “악—!!”
  • 지하 주차장은 임빈의 비명 소리로 가득 찼다…
  • **
  • 심한 구타를 당한 임빈은 병원 대문을 나서기도 전에 다시 응급실로 실려갔다.
  • 온몸에 성한 구석 하나 없었다. 무엇보다 화가 나는 것은 누가 그랬는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었다.
  • 범인들은 철두철미하게 모든 증거를 인멸했다. 덕분에 몸의 고통도 모자라 화병까지 생길 판국이었다.
  • 문아영은 임빈의 침상 옆에서 하염없이 훌쩍거렸다.
  • “빈이 오빠, 좀 괜찮아졌어? …”
  • 임빈이 침대에서 일어날 수만 있다면 일말의 감정도 실리지 않은 문아영의 눈동자를 눈치챘을 테지만 환자복을 입은 문아영의 모습은 영락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남편의 병상을 지키는 현모양처의 모습이었다.
  • 사실 문아영은 지금 마음이 아주 불안한 상태였다. 불안감도 불안감이지만 문아영은 질투심에 불타올랐다.
  • 그 별 볼일 없는 계집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주 씨 가문의 금지옥엽이 될 수 있단 말인가.
  • 어제 유진숙에게서 그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 이번에 유산하게 된 것도 콩이 계단에서 그녀를 밀었던 것이 아니라 문아영 스스로 계단을 굴렀기 때문이었다.
  • 지금 임 씨 가문은 재정적으로 아주 난처한 상황이었다. 임빈은 당장이라도 파산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고 끝내 사채를 끌어다 쓰기까지 했다.
  • 문아영은 뱃속의 아이 때문에 임 씨 가문에 묶이고 싶지 않았다.
  • 아직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데 임빈보다 훨씬 돈 많은 남자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 아이를 낳으면 재혼의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한시라도 빨리 뱃속의 아이를 없애야 했다.
  • 물론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잘못은 조금도 없어야 했기에 콩이가 계단에서 그녀를 밀어 굴러떨어진 것처럼 일을 꾸몄다.
  • 애초에 콩이는 엄마도 없고 임 씨 가문에서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길가의 잡초만도 못한 하찮은 존재였다.
  • 심지어 언젠가 술에 취한 임빈이 콩이는 자신의 수치라며 이 세상에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적도 있었다.
  • 그래서 콩이의 손을 빌려 뱃속의 아이를 없앤다고 해도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인데 콩이가 전설 속의 4대 명문가 중 하나인 주 씨 가문의 아이였을 줄이야!
  • 문아영은 그동안 콩이에게 저질렀던 일들이 전부 발각될까 겁이 났다.
  • 어떡하지, 이제 어떡하지!?
  • 콩이의 입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 **
  • VIP 병실.
  • 콩이 스르르 눈을 떴다. 병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고요한 적막만 감돌았다.
  • 다들 떠난 것이라 생각한 콩이는 침울한 표정으로 눈을 다시 감았다.
  • 불안감에 휩싸인 아이의 표정에 쓸쓸한 기색이 역력했다.
  • 그 순간,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주태석이 걸어 들어왔다.
  • 콩이는 바로 눈을 반짝였다. 어둡게 가라앉았던 눈동자에 다시금 생기가 돌았다.
  • 콩이가 잠에 든 사이, 주종섭이 병실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공기가 좋지 않다며 그들을 전부 쫓아냈기에 다들 병실 밖에 마련된 거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 주태석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콩아, 몸 어때? 조금 괜찮아졌어? 외삼촌에 아침 식사를 사 왔는데 조금 먹을래?”
  • 그 말에 콩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태석은 바로 아침 식사를 안으로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인기척에 놀라 깨어난 주 씨 일가도 얼른 따라 들어왔다.
  • 주종섭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 “콩이는 뭘 좋아해? 여기 새우만두도 있고 순대도 있고 갈비찜도 있고 슈크림 호빵도 있는데…”
  • 그러자 성미가 급한 주영준이 불쑥 끼어들었다.
  • “소고기 볶음면! 소고기 볶음면도 맛있어!”
  • 그 말에 주종섭은 지팡이로 주영준의 종아리를 내리치며 꾸짖었다.
  • “소고기 볶음면은 너나 처먹어! 콩이 방금 일어났는데 소고기 볶음면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 그러고는 순대를 집어 콩이에게 건넸다.
  • “콩아, 순대 먹어볼래? 이거 아주 쫀득쫀득하고 맛있어.”
  • 주현빈도 살코기 죽을 들고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죽부터 먹어도 되고.”
  • 콩이는 입술을 오므린 채 주 씨 일가를 둘러보았다. 어쩐지 코끝이 시큰하고 간질거렸다.
  •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이제 그녀에게도 가족이 생긴 건가?
  • 콩이는 코를 훌쩍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외할아버지… 순대 먹고 싶어요…”
  • 그 말에 주종섭은 눈시울을 붉히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그래, 그래, 순대, 순대 먹자!”
  • 주 씨 일가는 콩이의 모습에서 주단옥의 어린 시절 모습을 다시 보는 듯했다.
  • 아무런 걱정 없이 자란 주단옥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입술을 삐죽거리며 서슴없이 오빠들에게 화를 냈지만 콩이는 외할아버지라는 호칭도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불렀다.
  • 주저하는 눈망울에 주종섭이 불쾌해할까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 이제 겨우 세 살밖에 안 된 아이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피는 모습에 주 씨 일가는 또다시 가슴이 욱신거렸다.
  • 콩이 식사를 마치고 다시 잠에 들자 주 씨 일가는 살금살금 병실을 나갔다.
  • 눈을 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귓가에서 또다시 그 의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콩알아, 콩알아…! 」
  • 콩이는 눈을 번쩍 뜨고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 하지만 병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 꿈을 꾼 것이라 생각하고서 다시 눈을 감자 어김없이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 「콩아, 콩아, 콩알아! 」
  • 콩이는 이불을 움켜쥐고서 긴장된 표정으로 소리가 나는 방향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