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6화 뜬금없이 생긴 스승

  • 텅 빈 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소리가 난 방향에는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 콩이는 침대 시트를 움켜쥐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 “누구세요?”
  • 가슴이 저절로 콩닥거렸다.
  • 이내 친밀감을 유도하는 듯한 은근한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 “나는 네 스승이란다. 사부님이라고 불러봐.”
  • 그 말에 콩이는 그 나이대 어린아이답지 않게 인상을 팍 찌푸렸다.
  • “콩이는 사부님 없어요.”
  • 단호한 어조에 중후한 목소리가 흠칫하는 것 같았다.
  • 그 순간, 침대 옆 탁자에 앉아 있는, 일반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하얀색 도포를 입은 젊은 사내의 혼백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 백지장처럼 창백한 안색에 칠흑같이 깊고 짙은 눈, 조각같이 높고 오뚝한 콧대는 전형적인 미남상이었다.
  • 짙은 주홍빛을 띠는 입술과 사악한 기운이 감도는 미간은 요야해 보이기까지 했다.
  • 사내는 눈을 부릅뜨고서 아직 논리도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세 살배기를 노려보았다.
  • 쯧, 속지 않네…
  • “콩알아…”
  • 사내가 무어라 얘기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자 콩이가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거렸다.
  • “콩알 아니에요. 콩이에요.”
  • “…”
  • 일순 말문이 막힌 사내는 이내 턱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 “난 진짜 네 사부 맞아. 너희 엄마가 살아 있을 때 널 제자로 삼으라고 내게 넘겼어.”
  •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든 콩이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툭 쏘아붙였다.
  •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 엄마가 그녀를 버렸을 리 없다. 이 수상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하다.
  • 사내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 주단옥은 죽기 직전에 그의 존재를 알아보고 자신이 죽은 뒤에 콩이와 주 씨 가문을 보호해 달라고 간청했었다.
  • 당시 콩이는 겨우 두 살이라 그의 영혼을 볼 수 없었지만 분명 절을 받았고 그는 이 어린아이의 스승이 되었다.
  • 엊그제 콩이가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어 그제야 마침내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믿지 않다니…
  • 사내는 코를 만지작거리며 회유하듯 말했다.
  • “네 엄마의 이름은 주단옥이고 네 이름은 콩이잖아. 봐. 난 다 알고 있어.”
  • 그 말에 콩이는 입술을 오므리며 대꾸했다.
  • “다른 사람들도 다 알아요.”
  • “…”
  • 사내는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 인신매매범들이 와도 고개를 흔들며 포기할 아이였다. 이렇게 속이기 어려울 줄이야.
  • 몸집이 작은 데다 가족들의 사랑이 고픈 어린아이가 아니었다면 임 씨 일가의 괴롭힘을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 사내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 “어린애가 무슨 의심이 그렇게 많아. 나중에 몸이 다 나으면 돼지고기 올려놓고 제사를 지내. 그럼 배사 의식은 끝난 거야. 난 기태웅이라고 해. 생전에는 아주 큰 인물이었지.”
  • 그 말에 콩이는 의아한 얼굴로 소리가 들려오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 기태웅? 기태웅이 누군데요?
  • 기태웅은 혼란스러워하는 아이의 눈빛을 응시하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 “너한테는 낯선 이름일 거야. 난 너랑 같은 시대를 산 사람이 아니니까. 이래 봬도 난 엄청 강해.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하게 많은 걸 가르쳐 줄 수 있어…”
  • 잠자코 듣고 있던 콩이 불쑥 물었다.
  • “큰 인물도 죽어요?”
  • “…”
  • 콩이 다시 물었다.
  • “그렇게 강한데 왜 죽어요?”
  • 허를 찌르는 질문에 기태웅은 입을 꾹 다물었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아이였다.
  • 눈을 살짝 내리깐 콩이는 이불을 꼭 움켜쥔 채 입술을 오므리며 나지막이 물었다.
  • “정말 내 사부님이 맞는다면 그동안 왜 날 내버려 두었어요…”
  •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녀가 아프거나 울어도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 지난 1 년 동안 그녀는 아버니의 눈치를 보며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녀를 향한 임 씨 일가의 눈초리는 여전히 싸늘하기만 했다.
  • 심지어 아줌마는 교묘하게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녀에게 폭행을 일삼았다…
  • 하지만 그 지옥 같은 시간들에서 그녀를 구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기태웅은 일순 멈칫했다. 안쓰러운 사연에 마음이 짠했다.
  • 기태웅은 별다른 설명 없이 조용히 말했다.
  • “착하게 굴면 이제부터 사부가 지켜줄게.”
  • 그 말에 입술을 삐죽거리던 콩이는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 기태웅은 콩이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 “사부는 나중에 다시 올 테니까 푹 쉬고 있어. 이건 우리 사랑스러운 제자한테 주는 첫 만남 선물이야.”
  • 급하게 올라오느라 저승에 미처 알리지 못했기에 다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 기태웅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콩이는 손목이 살짝 뜨거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자 다음 순간, 그녀의 손목에 빨간 끈이 묶여 있었다.
  •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콩이는 살짝 눈을 뜨고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 여전히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지만 아까와는 달리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몸의 통증도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
  • 눈 깜짝할 사이에 열흘이 흘렀다.
  • 그동안 극진한 보살핌 덕분인지 콩이의 몸에 난 상처도 거의 다 나았고 퇴원하여 서울로 돌아갈 준비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이 회복되었다.
  • 병실 문밖에서 의사의 놀라워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 “정말 놀랍습니다… 이 정도 부상은 적어도 석 달 동안 요양을 해야지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는데…”
  •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주태석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침대에 앉아 손목에 묶인 빨간 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콩이의 모습이 보였다.
  • 작고 왜소한 체구는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 “콩아.”
  • 침대로 다가간 주태석은 콩이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 “왜 그래?”
  • 그러다 문득 콩이의 손목에 묶여 있는 빨간 끈을 발견하고는 다시 물었다.
  • “이건 뭐야?”
  • 분명 응급실에 실려왔을 때만 해도 손목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기억이 잘못됐나. 주태석은 고개를 갸웃했다
  • 그때 콩이가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 “막내 외삼촌, 내 토끼 어디 있어요…”
  • 그 말에 주태석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콩이가 정신을 잃었을 때 확실히 너덜너덜한 토끼 인형을 품에 안고 있기는 했었다.
  • 당시에는 콩이의 몸에 쌓인 눈을 대충 털어내고 서둘러 응급실로 데려가느라 여념이 없어 그 토끼 인형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 주태석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 “중요한 거야? 그 토끼 지금 없는데…”
  • 그러고는 얼른 덧붙였다.
  • “외삼촌이 새 토끼 사줄까? 지금 당장 사러 가자.”
  • 그 말에 콩이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눈가에 눈물이 살짝 맺혔지만 흘리지 않으려고 꾹 참고 있는 듯했다.
  • 콩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엄마가 콩이에게 준 거예요.”
  • 엄마가 돌아가시자마자 아버지가 엄마의 물건을 전부 버린 탓에 엄마가 남긴 유품은 그 토끼 인형이 전부였다.
  • 그 토끼 인형마저 잃어버린다면…
  • 엄마를 잃고 ‘사부’도 사라졌는데 이제 그 토끼 인형마저 잃어버렸다.
  • 문을 밀고 들어온 주일훈은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인 콩이의 표정을 발견하고는 설핏 미간을 찌푸리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 “왜 애를 울리고 그래?”
  • 주태석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 “형, 나 아니야! 콩이 토끼 인형을 임가에 두고 온 것 같아.”
  • 토끼 인형을 잃어버렸다고 얘기하면 콩이 바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임가에 두고 온 것 같다고 얼버무렸지만 아직도 거기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 주일훈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 “우리 콩이 착하지. 외삼촌이 새로 사 줄게.”
  • 그까짓 토끼 인형, 콩이가 원한다면 전 세계의 토끼 인형을 전부 다 사 줄 수 있었다.
  • 주태석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 “단옥이 유일하게 콩이에게 남겨준 거래.”
  • 그 말에 주일훈은 일순 멈칫했다. 단옥이 유일하게 콩이에게 남겨준 거라고?
  • 주일훈은 바로 결단을 내렸다.
  • “가자. 지금 바로 되찾으러 가자.”
  • 토끼 인형이 아직 거기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만약 그 작자들이 버렸다면 남성의 모든 쓰레기 소각장을 뒤져서라도 반드시 그 토끼 인형을 찾아낼 것이다.
  • 그때, 잠자코 있던 콩이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린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 “큰 외삼촌… 콩이도 가고 싶어요.”
  • 사실 임가 별장에는 토끼 인형 외에도 그녀에게 아주 소중한 친구가 하나 더 있었다…
  • **
  • 임가 별장.
  • 임빈과 임성철은 망연자실한 채 1층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 얼마 전까지만 해도 휘황찬란했던 별장이 아수라장이었다.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은 전부 빚쟁이들에게 빼앗겼다.
  • 수염이 거뭇거뭇해진 임빈의 얼굴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 그 옆에서 유진숙은 목 놓아 울부짖고 있었다.
  • “아들아, 대체 왜 그렇게 사채를 끌어다 쓴 거야! 이제 우린 어떡하냐! 흑흑흑…”
  • 임빈이 구타를 당해 병원에 입원한 날, 임 씨 가문은 모든 재산을 잃었다.
  • 임 씨 가문 명의로 된 부동산 전부 저당 잡힌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현재 살고 있는 별장도 강제 집행될 판국이었다.
  • 당장 어디서 살아야 할지가 문제였다.
  • 결국 참다못한 임성철이 버럭 호통을 쳤다.
  • “그만 그치지 못해!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콩이한테 잘해주지 그랬어!”
  • 그에 유진숙도 질세라 언성을 높였다.
  • “왜 나한테만 뭐라 그래? 나만 그랬어? 당신도 그 아이 할아버지잖아. 당신도 잘한 건 없잖아!”
  • 임빈은 짜증을 내며 고함을 질렀다.
  • “그만하세요!”
  • 회사는 하룻밤 사이에 부도나고 곧 법원도 수사에 관여할 것이다.
  • 어쩌면 옥살이를 하게 될지도 몰라 가뜩이나 마음이 심란한데 부모님들까지 옆에서 싸워대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 유진숙과 임성철은 입을 꾹 다물었다. 창자가 퍼렇게 될 정도로 후회가 막급했다.
  • 콩이한테 조금만 더 잘해주었다면 이 지경까지 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주 씨 가문과 계속 사돈 관계를 유지하며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 유진숙은 증오에 찬 목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 “빌어먹을 계집애! 출세를 했으면 한 번이라도 돌아와봐야 되는 거 아냐!”
  • 여태 먹여주고 재워줬는데, 배은망덕한 년.
  • 누가 뭐라고 해도 그들은 콩이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였다! 제아무리 그들이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손녀인 콩이는 마땅히 용서해 줘야 했다!
  • 애초에 잘못이라고 할 것도 없지 않은가. 문아영을 계단 아래로 밀어 유산시킨 일은 어떻게 해도 정당화될 수 없었다.
  • 그때, 문아영이 계단을 내려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어머님, 아버님, 빈이 오빠, 조급해하지 마세요. 콩이는 반드시 돌아올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