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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또 버림받게 될까요?

  • 임빈은 곧장 주변을 돌며 영문을 물었지만 하나같이 아무것도 모른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을 뿐이었다.
  • 차가운 복도에서 벌벌 떨고 있는 것도 서러운데 주 씨 일가가 만나주지도 않자 괴롭기 그지없었다.
  • 유진숙은 결국 첫 번째로 줄행랑을 쳤다.
  • “난 아영이한테 다녀올게…”
  • 문아영도 이 병원의 산부인과 병동에 입원해 있었다.
  • 임빈과 임성철도 포기하고 싶었지만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아 묵묵히 견디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마음속에 불만이 가득 쌓였지만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 **
  • 규칙적인 기계음과 웅성거리는 소리가 뒤얽힌 희미한 의식 속에서 유독 한 사람의 목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귓전을 파고들었다.
  • 「콩아, 콩아… 얘, 콩알아! 」
  • 「얼른 눈을 떠, 응? 너 계속 그렇게 자기만 할 거면 내가…」
  • 마치 작은 벌떼가 귓가에서 쉴 새 없이 윙윙거리는 것처럼 시끄러운 목소리였다.
  • 누구세요? 대체 누구 목소리이지?
  • 콩이가 속눈썹을 움찔거리더니 마침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온통 새하얀 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 콩이는 입술을 달싹이며 침대 주변에 몰려있는 사람들을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 주태석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 “콩아, 정신이 들어? 막내 외삼촌이야…”
  • 주 씨 일가는 숨소리조차 죽인 채 긴장한 얼굴로 콩이를 바라보았다.
  • 콩이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 “막내 외삼촌?”
  • 깨지기 쉬운 도자기 인형 같은 예쁜 얼굴은 어떤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고 ‘막내 외삼촌’이라는 단어만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 임성철은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체구가 왜소한 콩이 침상에 누워있자 침상이 유독 커 보였다.
  • 깡마르고 작은 아이의 모습에 임성철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 주태석은 목소리를 가다듬고서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 “콩아, 외삼촌은 콩이 엄마 막내 오빠야. 주태석이라고 해. 얼마 전에 나랑 통화한 적 있는데, 기억해?”
  • 그 말에 속눈썹을 움찔하던 콩이는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 기억이 났다…
  • 막내 외삼촌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 그녀를 신경 쓰지 않던 사람 아니었나?
  • “날… 데리러 왔어요?”
  • 콩이 기어들어갈 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 그 말에 침대 주변에 몰려있던 사내들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현빈이 입을 열었다.
  • “콩아, 난 셋째 외삼촌이야. 콩이를 데리러 왔어.”
  • 목이 메어 한참 동안 숨을 고르던 주종섭도 맞장구를 쳤다.
  • “맞아. 콩아, 우리랑 집에 가자. 앞으로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할 거야. 누가 콩이를 괴롭힌다면 할아버지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 콩이는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 집에?
  • 콩이는 이 사람들을 따라 ‘집’에 가면 버림받지 않을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 이 사람들도 그녀를 때리고 밥을 안 주면 어떡하지?
  •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콩이의 모습에 주 씨 가문 사내들은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 육아 경험이 전무한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주일훈과 주민준을 향했다.
  • 올해 40 살인 장남 주일훈은 슬하에 두 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고 38 살인 둘째 주민준 역시 두 아이를 둔 아빠였다.
  • 하지만 아이가 있다고 해서 아이를 잘 달래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주일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 “콩이는 뭘 걱정하고 있어?”
  • 평소와 다름없이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에 바로 다른 형제들의 눈총을 받았다.
  • 주민준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원래도 말수가 적은 사람이라 한참을 입술을 달싹였지만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 한숨을 내뱉으며 침대 옆에 바짝 다가간 주태석은 다정하게 콩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 “콩이 이름은 뭐야? 외삼촌한테 알려줄 수 있어?”
  •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천장을 응시하던 콩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 “콩이는 이름이 없어요. 콩이는 콩이예요.”
  • 아버지는 이름을 짓는 것도 귀찮다며 아줌마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콩이라는 이름도 엄마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 주태석은 가슴이 욱신거렸다. 여태 이름조차 없었다니. 대체 임 씨 가문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었던 거야.
  • 주태석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억누르며 다시 물었다.
  • “그럼 외삼촌한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려줄 수 있어?”
  • 마침내 정신을 차린 콩이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자신을 막내 외삼촌이라고 부르는 사내를 응시했다.
  • 그날 어둠으로 얼어붙은 그녀의 세상에 눈앞의 사내가 짙은 어둠을 헤치고 한줄기 빛처럼 다가왔었다.
  • 콩이는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
  • “막내 외삼촌, 집에 가면… 콩이 밥 먹을 수 있어요?”
  • 그 말에 주 씨 일가는 일순 멈칫했다.
  • 집에 가면 밥을 먹을 수 있냐니…
  • 아무런 대답이 없자 콩이가 또다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 “콩이를 때릴 거예요?”
  • 짧은 두 마디에 주종섭은 눈물을 글썽였다.
  • 밥을 먹지 못할까 걱정하고 맞을까 두려움에 떨고 있다니, 대체 임 씨 가문에서 얼마나 학대를 받은 거야?!
  •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숨 한번 크게 못 쉬고 밤에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나거나 여름에 땀으로 옷이 흠뻑 젖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지옥 같은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만 떠올려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 결국 등을 돌린 주종섭은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질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
  • 주 씨 형제들도 분노에 몸을 떨며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지만 혹시라도 콩이 겁을 먹을까 겉으로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 주태석은 콩이의 작은 손을 잡고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대더니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콩아, 걱정하지 마. 집에 가면 콩이가 먹고 싶은 건 뭐든 먹을 수 있고 아무도 널 때리지 않을 거야. 저기 봐. 이분은 첫째 외삼촌이고 여기 이분은 둘째 외삼촌, 셋째 외삼촌이야… 다들 엄청 강한 사람들이고 아무도 콩이를 해칠 수 없도록 보호할 거야.”
  • 콩이는 이불을 꼭 움켜쥔 채 한참을 멍하니 허공만 응시했다.
  • 주 씨 일가가 더 이상 콩이에게서 아무 말을 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콩이가 돌연 입을 열었다.
  • “외삼촌, 콩이는 아무도 밀지 않았어요. 아버지랑 할아버지가 콩이에게 잘못을 시인하라고 했지만 콩이는 시인하지 않았어요…”
  • 콩이는 고집스러운 표정과 흐린 눈빛으로 집요하게 그 말을 반복했다.
  • 콩이는 삼촌들이 정말 그녀를 좋아하는지 궁금했다.
  • 그녀가 잘못을 시인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도 그녀처럼 말을 듣지 않는 나쁜 아이를 데려가려 할까?
  • 순간 주태석은 목구멍이 솜뭉치로 막힌 것 같은 느낌에 눈시울을 붉혔다. 주종섭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가를 훔쳤다.
  • 주일훈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 “외삼촌은 네가 아니라고 믿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시인하는 건 잘못된 일이지.”
  • 주태석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잘못한 건 그 사람들이야. 콩이는 아무 잘못 없어. 아주 잘했어.”
  • 그 말에 콩이가 입을 삐죽거리더니 눈물을 뚝뚝 흘렸다.
  • 마치 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결국 의지를 배반하고 스스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 콩이는 울음을 참으려는 듯 고집스레 눈에 힘을 주었지만 목소리에는 물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 “하지만 아빠는 콩이를 믿지 않았어요. 콩이가 동생을 죽였대요. 할아버지도 잘못을 인정할 때까지 나오지 말라고 했어요.”
  • 마침내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생각에 그동안 쌓고 쌓았던 울분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 아무리 내색을 하지 않아도 결국은 세 살짜리 아이였기에 서럽고 고통스러운 마음은 주체가 되지 않았다.
  • 주태석은 애써 분노를 참으며 잇새로 짓씹듯 말했다.
  • “그 사람은 네 아빠가 될 자격이 없어!”
  • 주일훈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제지했다.
  • “태석아!”
  • 주태석은 잠자코 입을 닫았지만 마음은 온통 분노와 불쾌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임빈이 아직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자 쇠 파이프를 들고 흠씬 두들겨 패고 싶었다.
  • 그 뒤로도 몇 마디 하소연을 쏟아내던 콩이는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 병실 밖, 결국 참다못한 주태석이 물었다.
  • “형, 임 씨 일가를 이대로 내버려 둘 거야?”
  • 파산만으로는 절대 성에 찰 수 없었다.
  • 주일훈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고서 소매를 걷어 올리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 “8 대 1이면 충분해?”
  • 자고로 다구리 앞에 장사 없다고 했다. 오늘 임빈은 멀쩡한 몸으로 절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