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7화 다시 임가로

  • 문아영은 손에 들고 있는 토끼 인형은 다름 아닌 콩이의 토끼 인형이었다.
  • “어머님, 아버님, 걱정 마세요. 콩이는 분명 이 인형을 찾으러 돌아올 거예요.”
  • 다른 사람들은 이 토끼 인형이 콩이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지 못하지만 문아영은 알고 있었다.
  • 이 토끼 인형은 단명한 콩이의 모친이 그녀에게 남긴 유일한 물건이었다.
  • 그 망할 계집은 매일같이 이 인형을 껴안고 있었고 그녀에게 심하게 맞을 때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 한 번은 아무리 힘껏 꼬집어도 콩이 울지 않자 아이의 손에서 토끼 인형을 빼앗아 귀를 자른 적도 있었다.
  • 그러자 고집스럽게 입술을 깨물고 있던 아이는 금세 울음을 터뜨렸다.
  • 문아영이 손에 들고 있는 너덜너덜한 토끼 인형을 힐끗 바라보던 임빈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 “정말 돌아올까?”
  • 그까짓 낡은 토끼 인형이 뭐라고. 임빈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 문아영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빈이 오빠는 평소에 콩이랑 함께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모르나 본데, 콩이는 이 토끼 인형을 아주 끔찍이 아껴. 죽은 엄마가 유일하게 남긴 물건이라 콩이에게는 아주 소중한 거야.”
  •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유진숙도 그 말에 수긍했다.
  • 지난 1 년 동안 그 계집이 토끼 인형을 손에서 놓은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화장실에 갈 때도 토끼 인형을 꼭 껴안고 갔다.
  • 유진숙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 “아영이 말이 맞아. 그 계집이 정말 돌아왔으면 좋겠어!”
  • 돌아오기만 한다면 까짓것 어린아이 하나 달래지 못할까.
  • 문아영은 눈을 내리깔고서 음산하게 번뜩이는 눈동자를 감추었다.
  • 콩이는 분명히 돌아올 것이다. 이 토끼 인형 외에도 콩이에게 아주 소중한 친구인 앵무새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 누가 잃어버린 앵무새인지 어느 순간부터 임가 별장 뒤의 작은 숲에서 살고 있었다.
  • 아무도 그 앵무새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고 콩이에게만 곁을 내주었다.
  • 문아영이 콩이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 토끼 인형은 사람을 보내서 가져갈 수 있지만 그 앵무새는 콩이가 직접 와서 데려가야만 했다.
  • 문아영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 “해진 곳은 꿰매고 깨끗이 씻었으니 콩이가 돌아오면 많이 기뻐할 거야.”
  • 그 말에 임빈은 환히 미소 지으며 문아영을 덥석 끌어안았다.
  • “고생했어! 아, 당신은 정말 너무 착해. 콩이는 당신을 계단에서 밀었는데 원망하기는커녕 그 아이의 인형을 꿰매주다니… 이번 위기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뭐든 보답할게.”
  • 문아영은 임빈의 품에 기대며 능청스럽게 연기했다.
  • “난 그냥 오빠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었을 뿐이야.”
  • 그때 유진숙이 날카롭게 외쳤다.
  • “얼른 집안을 깨끗이 청소해!”
  • 파산하고 고용인들을 전부 내보냈기에 이제 임가 별장에는 고용인이 한 명도 없었다.
  • 방금 전까지 뭐든 보답하겠다던 약속은 그새 까맣게 잊은 것인지 임빈은 바로 문아영에게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라고 명령했다.
  • 문아영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랐지만 내리깐 두 눈에 독기가 가득했다.
  • **
  • 검은색 마이바흐 몇 대가 임가 별장 앞에 일제히 멈춰 섰다.
  • 이내 건장하고 비범한 외모의 여덟 사내가 차에서 내렸다. 그 뒤에서 부축을 받으며 차에서 내린 노인이 바로 한 세기를 주름잡던 주종섭이었다.
  • 전체 주 씨 일가의 행차는 서울에서도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 그런데 그게 고작 토끼 인형을 되찾으러 오기 위함이라니…
  • 문아영은 가족들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가 손님을 맞는 대신 3층 발코니에 숨어 창밖을 훔쳐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찼다.
  • 저들이 주 씨 가문 도련님들이구나!
  • 남다른 아우라를 내뿜는 여덟 사내들의 모습에 문아영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저들 중 한 명이라도 꼬실 수만 있다면…
  • 그때, 한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주위를 둘러보며 무심하게 금테 안경을 밀어 올리는 검은색 셔츠의 사내를 발견한 문아영은 일순 멈칫했다.
  • 짐짓 점잖은 듯하지만 어딘가 불량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 사내는 다름 아닌 주나헌이었다.
  • 문아영은 황급히 입을 틀어막고서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삼켰다. 주나헌은 국민배우이자 문아영의 이상형이었다.
  • 꿈에도 그리던 남신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문아영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얼굴도 빨갛게 달아올랐다.
  • 일찌감치 현관문 앞에서 기다리던 임 씨 일가는 정말로 찾아온 주 씨 일가의 모습에 얼른 그들을 맞이했다.
  • “아이고, 사돈! 주 대표님! 어서 오세요…”
  • 그러고는 주일훈과 악수하려는 듯 손을 뻗었다.
  • 주일훈은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불쾌하다는 듯 싸늘한 표정으로 임빈을 일별했다.
  • 임성철이 환히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 “사돈, 남성은 처음이시죠? 어쩐지 요즘 날씨가 화창하더라니, 사돈이 오실 줄 알고 날씨도 맑게 개었나 봅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 주종섭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 “그렇게 날씨가 좋아서 내 금쪽같은 손녀를 동사로 입원하게 만들었나. 아주 좋아.”
  • 그 말에 임성철의 표정에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 유진숙이 얼른 입을 열었다.
  • “아유, 사돈도 참,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우리가 콩이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그날은 콩이가 자기 새엄마한테 짜증을 내니까 우리 아들이 참지 못하고 아주 살짝 혼을 냈던 거예요…”
  • 그렇게 말하며 유진숙은 인자하게 웃으며 콩이를 바라보았다.
  • “얘, 콩아, 얼른 할머니한테 와. 할머니가 안아보자! 며칠 못 보니까 얼마나 보고 싶던지!”
  • 콩이는 입술을 오므린 채 주태석의 셔츠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 주종섭은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 “화를 참지 못해? 그래서 내 귀한 손녀를 뼈가 부러질 정도로 때리고 얇은 잠옷 차림으로 눈밭에 무릎을 꿇게 했나? 이게 아주 살짝 혼을 낸 거라고?”
  • 임 씨 일가는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 파산까지 한 마당에 교훈이랍시고 임빈도 먼지 나게 맞았으니 그만하면 충분한 거 아닌가…
  • 그래도 사돈인데!
  • 그때 임성철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며 성큼 한 발짝 나가더니 집 안으로 주종섭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 “들어가서 얘기하죠. 어쨌든 우리 빈이는 콩이 아버지인데… 아이를 아버지 없는 아이로 키울 수는 없잖아요.”
  • 그렇게 말하며 임성철은 임빈에게 눈짓을 보냈다.
  • 임빈도 얼른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 “네, 네, 맞습니다. 콩아, 전에는 아빠가 잘못했어. 아빠를 용서해 주겠니? 아무리 네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렇게 때리면 안 되는 거였는데.”
  • 임빈은 후회하고 가슴 아파하는 표정을 지으며 콩이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경호원들이 기민하게 막아섰다.
  • 콩이는 그에게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주태석의 뺨 옆에 가만히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 그 모습에 임빈은 기분이 언짢았다. 이 망할 계집애, 이번 만남이 임 씨 가문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고작 그거 하나 처맞았다고 어디서 유세를 부려!
  • “콩아.”
  • 임빈은 일부러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 이렇게 부르기만 해도 바로 꼬리를 내리고 순순히 그의 말을 따르던 콩이였다.
  •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목소리와 어조에 작은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 그 모습에 주 씨 일가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 역시 그날 아예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임빈을 살려둔 게 실수였다!
  • 그때, 주태석이 입을 열었다.
  •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두고 간 물건을 가지러 왔습니다.”
  • 주종섭이 지팡이를 짚으며 차갑게 물었다.
  • “콩이의 토끼 인형은 어디 있지?”
  • 그 말에 유진숙은 눈을 반짝이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 “안에 있어요. 눈에 파묻혀서 망가진 걸 콩이 새엄마가 꿰매주고 있어요! 사돈,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 주일훈이 손을 들자 검은 정장 차림의 경호원들이 우르르 현관문으로 쳐들어갔다. 임빈은 또 맞을 줄 알고 얼른 머리를 감싸 안았다.
  • 그러다 경호원들이 자신을 지나쳐 곧장 별장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 주일훈이 코웃음을 쳤다.
  • “고작 이 정도에 쫄았나?”
  • 감히 콩이에게 손을 댈 때부터 세상이 무서운 줄 알았어야지.
  • 임빈은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콩이를 응시했다.
  • “제 잘못입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콩아, 일단 들어가서 다시 얘기할까?”
  • 주태석이 거절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던 찰나, 콩이 주태석의 셔츠 자락을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 “외삼촌…”
  • 콩이의 주저하는 눈빛이 임 씨 별장을 향했다. 그녀의 연두가 아직 저 안에 있었다. 그녀 외에 연두를 데리고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그 모습에 임 씨 일가의 표정이 대번에 환해졌다. 그들은 콩이 분명 마음이 약해진 것이라 생각했다.
  • 역시 아이는 아이였다. 멀쩡한 집이 있는데 자기 집을 내버려 두고 아버지를 떠나려는 아이가 어디 있겠는가.
  • “자자, 사돈, 얼른 들어와요!”
  • 임성철과 유진숙은 활짝 웃으며 별장 안으로 안내했다.
  • 주일훈은 콩이를 힐끗 바라보았다. 콩이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데려다줄 생각이었다.
  •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채 임가 별장으로 발을 내디딘 주 씨 일가는 낡고 허름은 별장을 둘러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주 씨 일가의 눈에 임가 별장은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 그동안 콩이는 어떻게 이렇게 허름한 별장에서 지내왔지?
  •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경호원들은 별장에 있는 모든 인형을 들고 1층 거실로 내려왔다.
  • 재빨리 주태석의 품에서 벗어난 콩이는 개중에서 가장 낡은 토끼 인형을 품에 안았다.
  • 아이의 얼굴에 이내 안도하는 기색이 서렸다.
  • 토끼야, 콩이 왔어. 콩이는 절대 널 두고 가지 않을 거야…
  • 콩이는 토끼 인형을 꼭 껴안았다. 토끼 인형 외에도 콩이에게는 연두라는 친구가 더 있었다.
  •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마음이 불안해진 콩이는 곧장 뒷마당으로 뛰어가려는 듯 안절부절못했지만 곧 다시 돌아와 주태석의 손을 잡았다.
  • 같은 시각, 임가 별장 뒷마당.
  • 문아영은 숲속에 몸을 숨긴 채 콩이가 나타나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 콩이는 앵무새가 사람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분명 앵무새를 찾기 위해 스스로 빠져나올 것이다.
  • 주변에 아무도 없다면 콩이 하나쯤이야 얼마든지 손에 쥐고 쥐락펴락할 수 있었다.
  • 그녀는 그냥 콩이가 스스로 그물에 걸려들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