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전 합의서가 얼마나 값진 건데, 고아연은 그가 동의할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설령 그가 동의한다 해도 그녀는 지금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그와 이혼해서 고 씨 집안에 먹칠하지 않을 것이다.
셔츠를 정리한 뒤 문을 열고 나가려던 유수영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
“내일 밤 자선 파티에 난 파트너가 있으니 너는 안 가도 돼.”
“…”
몇 마디 쏘아붙이려던 고아연은 갑자기 말이 너무 무기력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가 350억이라는 구멍에 내어 더이상 고위 공직자도 아닌데다 금성 전체가 그녀의 고 씨 집안을 입방아에 올리고 있다. 내일 밤 자선 파티에는 각계의 동료들이 참석할 테니 그는 아마 그녀를 데리고 가는 것이 창피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내일 밤 자선 파티에는 국회의 사람도 온다 했고 어쩌면 그녀 아버지 사건과 관련 있을지도 몰랐기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가야 했다.
체면을 중히 여기는 고아연은 이럴 때 유수영에게 고개 숙여 부탁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꺼내 절친 조서희에게 문자를 보냈다.
한시간 뒤 고아연의 차가 챠밍 나이트의 입구에 멈춰섰고 차가 멈추기 무섭게 차 문을 열고 내린 그녀는 키를 경비원에게 던져주고 빠르게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술을 주문한 핫핫 크롭티 차림의 조서희는 불빛 속에서 유난히 매혹적이었다.
“아연아, 빨리 와서 앉아! 네가 어쩌다 약속 잡았으니 오늘 밤은 우리 취할 때까지 마시는 거야!”
그녀는 말하며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 한 잔을 고아연 앞에 밀어놓았다.
고아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그녀 맞은 켠에 앉았다.
조서희가 이어 말했다.
“어? 이런 술 기억나? 첫날밤 술! 그때 네가 유수영 씨와 결혼할 때 내가 한 잔 만들어줬잖아! 어때? 그런 느낌 좋지 않아?!”
고아연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은 채 무언가가 목에 걸린 듯 입을 열기 어려웠다.
심지어 결혼 첫날 밤 유수영이 자신에게 손조차 대지 않았다는 말을 어떻게 서희에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물론 유수영은 신혼 첫날밤만 그녀에게 손을 대지 않은 것이 아니라 결혼 후 6년동안 단 한번도 그녀를 건드린 적 없었다.
“서희야, 나 술 안 마실 거니까 너도 그만 마셔, 더 마시면 취할 거야.”
고아연은 곽승윤이 곧 약혼을 하지만 약혼녀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서희가 속상해서 요즘 알콜로 자신을 마비시키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연아, 술이란 건 참 좋은 거야. 마시면 기분 나쁜 일들은 다 잊을 수 있거든.”
조서희가 입 꼬리를 끌어당기자 억지로 짓고있던 웃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안타깝게도 나는 주량이 좋아서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아.”
“…”
그녀를 위로하려던 고아연은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자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서희보다도 더 비참한 것 같았다. 적어도 서희는 부모님이 건재하고 먹고 입을 걱정은 없지만 그녀는…
차가운 음료수를 한 입에 털어 넣은 조서희는 갑자기 정신이 들었는지 이내 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고아연 앞에 내밀었다.
“자! 네가 원하던 자선 파티 초대장.”
고아연은 약간 놀라며 물었다 .
“이거 어디서 구했어?”
내일 밤 자선 파티는 입장 요구가 매우 높았기에 고아연은 조서희에게 문자를 보낼 때까지만 해도 큰 희망을 품지 않았다. 조서희는 부모님이 이혼한 뒤 어머니가 그녀를 데리고 곽 씨 집안으로 시집 갔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재벌가에 들어간 것 같지만 실은 기껏해야 남에게 얹혀사는 정도였다.
고아연은 원래 곽 씨 집안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파티장 안까지는 못 들어가도 밖을 서성일 생각이었는데 조서희가 그녀에게 초대장을 구해다 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곽승윤에게서 훔쳐온 거야.”
조서희는 냉소를 지으며 매혹적인 빨간 입술을 움직였다.
“그는 그토록 예쁜 부잣집 약혼녀가 있으니 앞으로 두 집안이 틀림없이 강한 연합이 될 텐데 이런 자선 파티에 참가해서 뭐 하겠어?! 유명인사들 만나게? 곽승윤은 필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