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황혼이 가까워 오는데도 통 유리창 밖의 햇살은 여전히 눈이 부셨다. 난간 앞에 서있는 부시양이 손을 살짝 들자 준수한 얼굴이 이내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기분을 종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전화기 너머의 사람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줄곧 온화한 웃음을 띠고 있던 그의 얼굴이 몸을 돌린 순간 굳어져 있었다.
“상대가 얼마를 요구하는데?”
얇은 입술을 움직인 그의 목소리에는 화가 은은하게 섞여있었다. 그러나 교양이 넘쳤던 그는 표정에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17억이요.”
“17억?”
부시양은 마치 태어나서 가장 큰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냉소를 금치 못했다. 파텍 필립의 그 디자인이 20억 상당이 되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 시계는 아주 특별하게 디자인 된 것으로 공예가 더욱 복잡하고 더욱 완벽하게 제작된 것을 떠나 시계끈에 부시양의 이름이 새겨져 있기에 잃어버렸다 해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부 회장님, 경찰에 신고할까요?”
“됐어.”
부시양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빛을 등지고 차갑게 웃었다.
“50억 주는 김에 그녀 정체도 한번 알아봐.”
“네.”
“시계는 내가 바로 받아야겠어.”
입 꼬리를 올린 부시양의 빛나던 눈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리츠칼튼 1208, 네가 직접 가져와.”
“네.”
스위트룸 안, 박연은 혼자 와인을 마시며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전화를 끊고 발코니에서 들어온 부시양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뭘 그렇게 찾고 있나, 박연 씨?”
“여자 찾죠!”
박연은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금치 못했다.
“이 바닥에서 시양 씨가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고 소문이 나서 평이 너무 좋잖아요. 근데 나는 안 믿거든요. 시양 씨도 서른이 넘었죠? 정상적인 남자라면 당연히 성생활이 있을 거고 여자친구는 없다 해도 그런 파트너는 있을 거잖아요?”
부시양은 쑥스러워 하지도 화도 내지 않은 채 여전히 담담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래서 한바퀴 둘러보고 난 뒤 결론 얻었어?”
“정말 여자의 흔적이 없네요.”
박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시양 씨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거나 아니면…”
“아니면?”
부시양이 눈을 가늘게 떴다.
박연이 손에 든 와인 잔을 흔들자 튀어나온 와인 한 방울이 마침 그녀의 어깨에 튀어 붉은 그녀 입술을 더욱 요염하고 돋보이게 만들었다.
“나를 좋아하는 거예요.”
부시양은 맑은 눈으로 인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가자, 자선 파티 곧 시작해.”
박연은 그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항상 홀로 자유롭게 지내며 여자들과 거의 만남을 가지지 않는 그가 먼저 그녀에게 꽃을 선물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도 호감 정도는 갖고 있겠지?
필경 금성에서 명성을 떨친 아가씨들은 많지 않았고 마침 그중 손꼽히는 사람이 박연이었다.
자선 파티에 참석한 게스트들은 다들 귀한 몸이었기에 주최측도 아주 엄격하게 체크했다. 고아연처럼 초대장과 이름이 부합되지 않는 게스트들은 신분도 확인해야 하고 또 일련의 등기도 해야 했다.
고아연이 호텔 파티장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만찬이 시작된 뒤였다.
각계 권력가들이 빛나는 조명과 오가는 술잔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너도나도 눈부신 불빛 아래서 움직이며 자신의 미래를 위해 길을 닦아줄 목표를 찾아 헤맸다.
고아연도 일찍 아버지를 따라 여러 번 참석했기에 금성의 대다수 권력가들은 다 알아볼 수 있었다.
왼 손에 와인 잔을 들고 오른 손에 서화를 든 고아연은 한바퀴 돌다가 결국 1층 서남쪽 모퉁이에서 목표를 확인했다.
그녀를 등지고 있는 그는 빈티지 양복을 입고 술잔을 높이 든 채 곁에 있는 부자들과 웃고 떠들었다.
국회의원이라는 그는 최근 총애를 받으며 곧 비서실장 승진을 앞두고 있고 고향인 금성에 돌아와 둘러보는 김에 서화를 한 폭 써서 주최측에 기부하여 오늘밤 첫번째 경매물품으로 내놓게 했다.
이런 자선 파티에는 높은 자리 사람들이 거의 참석하지 않았기에 고아연도 많은 관계를 통해 겨우 그 사람이 성이 이 씨이고 서화에 대해 미칠 지경으로 매료돼 있다는 것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줄곧 그 사람을 지켜보던 고아연은 음악소리가 울리며 주변 부호들이 모두 파티장으로 들어간 뒤에야 틈을 타서 그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
“듣자 하니 이 청장님이 서화에 대해 깊이 연구하신다더군요. 제가 전에 받은 청나라 말기 산수도 한 폭의 진위를 가릴 수 없어 그러는데…”
고아연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 사람이 돌아서자 주름진 얼굴에 노련하고 주도면밀한 눈동자가 순간 빛이 났다.
“아연이 아니냐?”
“이… 이 아저씨?”
고아연은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옛 지인을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이운서는 원래 그녀 아버지 밑에 있었는데 젊은 시절에는 정치 업적이 좋지 못한데다 급하게 성과를 내려 하다 해서는 안될 일을 하고 겉으로는 승진이지만 실제로는 좌천을 당해서 국회로 갔다.
겨우 5,6년 밖에 안되 사이 운이 트였는지 아니면 무슨 귀인을 등에 업었는지 지금은 청장이 되었다. 만약 아버지의 안건이 정말 그의 손에 들어간다면… 해결하기 어려울까 두려웠다.
“아연이가 어릴 때는 이 아저씨를 쳐다도 안 보더니 커서 나를 알아볼 줄 몰랐네, 기억력이 참 좋아.”
이운서는 손에 든 술잔을 내려놓고 담배를 한가치 붙이더니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버지가 사고를 쳐서 고 씨 집안이 이런 꼴이 됐어? 이렇게 입고 술 접대 하러 여기 온 거야?”
고아연은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한참이 지나서야 가볍게 웃었다.
“아저씨도 농담을 그렇게 하세요. 아저씨도 손에 술잔을 들고 있으니 술 접대 하러 오셨나봐요?”
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일부러 이운서를 훑어보고 비아냥대며 말했다.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오십이 넘은데다 원래 말라비틀어진 배춧잎처럼 생긴 이운서는 순간 고아연의 말에 자극을 받았다.
“아연아, 고 씨 집안에도 이젠 믿을 구석이 없으니 너도 몸을 낮추고 그렇게 톡톡 쏘면서 말하지 마.”
이운서는 변덕스러운 얼굴로 고아연이 손에 있는 서화를 보며 비웃었다.
“이 서화는 일부러 나에게 잘 보이려고 가져온 거지? 아쉽게도 청나라 말기에는 명가가 별로 없어서 이 물건은 돈이 얼마 되지도 않아.”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아저씨가 탐관오리도 아니고 제 서화가 값이 얼마나 나가는지는 왜 신경 쓰세요?”
고아연은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이내 이운서 앞에서 산수도를 펼쳤다.
이운서는 순간 눈이 빛 나더니 검은 눈동자가 곧 쏟아져나올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청나라 말기 서화야, 이건 동진 고개지의 진필 아닌가!
이운서가 침을 삼키며 만져보려던 순간 고아연이 어느새 산수도를 등 뒤로 숨겼다.
“어머, 유 사모님 아니에요? 자선 파티까지 와서 연줄을 맺으려는 거예요? 제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사모님은 초대장이 없을 텐데요?”
남선미는 로열 블루의 샤넬 신상 A라인 드레스를 입고 하늘거리며 걸어왔다.
“어떻게 들어왔어요? 누구 초대장 훔쳤어요?”
“남선미 씨도 초대장 없을 텐데 어떻게 들어왔어요? 개구멍으로 들어온 거예요?”
고아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운서도 아직 해결하지 못했는데 남선미까지 끼어들다니, 정말 짜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