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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유 사모님, 난 수영 씨 파트너예요

  • 분명 황혼이 가까워 오는데도 통 유리창 밖의 햇살은 여전히 눈이 부셨다. 난간 앞에 서있는 부시양이 손을 살짝 들자 준수한 얼굴이 이내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기분을 종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 전화기 너머의 사람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줄곧 온화한 웃음을 띠고 있던 그의 얼굴이 몸을 돌린 순간 굳어져 있었다.
  • “상대가 얼마를 요구하는데?”
  • 얇은 입술을 움직인 그의 목소리에는 화가 은은하게 섞여있었다. 그러나 교양이 넘쳤던 그는 표정에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 “17억이요.”
  • “17억?”
  • 부시양은 마치 태어나서 가장 큰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냉소를 금치 못했다. 파텍 필립의 그 디자인이 20억 상당이 되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 시계는 아주 특별하게 디자인 된 것으로 공예가 더욱 복잡하고 더욱 완벽하게 제작된 것을 떠나 시계끈에 부시양의 이름이 새겨져 있기에 잃어버렸다 해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 “부 회장님, 경찰에 신고할까요?”
  • “됐어.”
  • 부시양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빛을 등지고 차갑게 웃었다.
  • “50억 주는 김에 그녀 정체도 한번 알아봐.”
  • “네.”
  • “시계는 내가 바로 받아야겠어.”
  • 입 꼬리를 올린 부시양의 빛나던 눈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 “리츠칼튼 1208, 네가 직접 가져와.”
  • “네.”
  • 스위트룸 안, 박연은 혼자 와인을 마시며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 전화를 끊고 발코니에서 들어온 부시양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뭘 그렇게 찾고 있나, 박연 씨?”
  • “여자 찾죠!”
  • 박연은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금치 못했다.
  • “이 바닥에서 시양 씨가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고 소문이 나서 평이 너무 좋잖아요. 근데 나는 안 믿거든요. 시양 씨도 서른이 넘었죠? 정상적인 남자라면 당연히 성생활이 있을 거고 여자친구는 없다 해도 그런 파트너는 있을 거잖아요?”
  • 부시양은 쑥스러워 하지도 화도 내지 않은 채 여전히 담담한 미소를 짓고 있다.
  • “그래서 한바퀴 둘러보고 난 뒤 결론 얻었어?”
  • “정말 여자의 흔적이 없네요.”
  • 박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 “시양 씨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거나 아니면…”
  • “아니면?”
  • 부시양이 눈을 가늘게 떴다.
  • 박연이 손에 든 와인 잔을 흔들자 튀어나온 와인 한 방울이 마침 그녀의 어깨에 튀어 붉은 그녀 입술을 더욱 요염하고 돋보이게 만들었다.
  • “나를 좋아하는 거예요.”
  • 부시양은 맑은 눈으로 인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 “가자, 자선 파티 곧 시작해.”
  • 박연은 그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항상 홀로 자유롭게 지내며 여자들과 거의 만남을 가지지 않는 그가 먼저 그녀에게 꽃을 선물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 그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도 호감 정도는 갖고 있겠지?
  • 필경 금성에서 명성을 떨친 아가씨들은 많지 않았고 마침 그중 손꼽히는 사람이 박연이었다.
  • 자선 파티에 참석한 게스트들은 다들 귀한 몸이었기에 주최측도 아주 엄격하게 체크했다. 고아연처럼 초대장과 이름이 부합되지 않는 게스트들은 신분도 확인해야 하고 또 일련의 등기도 해야 했다.
  • 고아연이 호텔 파티장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만찬이 시작된 뒤였다.
  • 각계 권력가들이 빛나는 조명과 오가는 술잔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너도나도 눈부신 불빛 아래서 움직이며 자신의 미래를 위해 길을 닦아줄 목표를 찾아 헤맸다.
  • 고아연도 일찍 아버지를 따라 여러 번 참석했기에 금성의 대다수 권력가들은 다 알아볼 수 있었다.
  • 왼 손에 와인 잔을 들고 오른 손에 서화를 든 고아연은 한바퀴 돌다가 결국 1층 서남쪽 모퉁이에서 목표를 확인했다.
  • 그녀를 등지고 있는 그는 빈티지 양복을 입고 술잔을 높이 든 채 곁에 있는 부자들과 웃고 떠들었다.
  • 국회의원이라는 그는 최근 총애를 받으며 곧 비서실장 승진을 앞두고 있고 고향인 금성에 돌아와 둘러보는 김에 서화를 한 폭 써서 주최측에 기부하여 오늘밤 첫번째 경매물품으로 내놓게 했다.
  • 이런 자선 파티에는 높은 자리 사람들이 거의 참석하지 않았기에 고아연도 많은 관계를 통해 겨우 그 사람이 성이 이 씨이고 서화에 대해 미칠 지경으로 매료돼 있다는 것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 줄곧 그 사람을 지켜보던 고아연은 음악소리가 울리며 주변 부호들이 모두 파티장으로 들어간 뒤에야 틈을 타서 그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
  • “듣자 하니 이 청장님이 서화에 대해 깊이 연구하신다더군요. 제가 전에 받은 청나라 말기 산수도 한 폭의 진위를 가릴 수 없어 그러는데…”
  • 고아연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 사람이 돌아서자 주름진 얼굴에 노련하고 주도면밀한 눈동자가 순간 빛이 났다.
  • “아연이 아니냐?”
  • “이… 이 아저씨?”
  • 고아연은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옛 지인을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다.
  • 이운서는 원래 그녀 아버지 밑에 있었는데 젊은 시절에는 정치 업적이 좋지 못한데다 급하게 성과를 내려 하다 해서는 안될 일을 하고 겉으로는 승진이지만 실제로는 좌천을 당해서 국회로 갔다.
  • 겨우 5,6년 밖에 안되 사이 운이 트였는지 아니면 무슨 귀인을 등에 업었는지 지금은 청장이 되었다. 만약 아버지의 안건이 정말 그의 손에 들어간다면… 해결하기 어려울까 두려웠다.
  • “아연이가 어릴 때는 이 아저씨를 쳐다도 안 보더니 커서 나를 알아볼 줄 몰랐네, 기억력이 참 좋아.”
  • 이운서는 손에 든 술잔을 내려놓고 담배를 한가치 붙이더니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 “아버지가 사고를 쳐서 고 씨 집안이 이런 꼴이 됐어? 이렇게 입고 술 접대 하러 여기 온 거야?”
  • 고아연은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한참이 지나서야 가볍게 웃었다.
  • “아저씨도 농담을 그렇게 하세요. 아저씨도 손에 술잔을 들고 있으니 술 접대 하러 오셨나봐요?”
  • 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일부러 이운서를 훑어보고 비아냥대며 말했다.
  •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 오십이 넘은데다 원래 말라비틀어진 배춧잎처럼 생긴 이운서는 순간 고아연의 말에 자극을 받았다.
  • “아연아, 고 씨 집안에도 이젠 믿을 구석이 없으니 너도 몸을 낮추고 그렇게 톡톡 쏘면서 말하지 마.”
  • 이운서는 변덕스러운 얼굴로 고아연이 손에 있는 서화를 보며 비웃었다.
  • “이 서화는 일부러 나에게 잘 보이려고 가져온 거지? 아쉽게도 청나라 말기에는 명가가 별로 없어서 이 물건은 돈이 얼마 되지도 않아.”
  •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아저씨가 탐관오리도 아니고 제 서화가 값이 얼마나 나가는지는 왜 신경 쓰세요?”
  • 고아연은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이내 이운서 앞에서 산수도를 펼쳤다.
  • 이운서는 순간 눈이 빛 나더니 검은 눈동자가 곧 쏟아져나올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청나라 말기 서화야, 이건 동진 고개지의 진필 아닌가!
  • 이운서가 침을 삼키며 만져보려던 순간 고아연이 어느새 산수도를 등 뒤로 숨겼다.
  • “어머, 유 사모님 아니에요? 자선 파티까지 와서 연줄을 맺으려는 거예요? 제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사모님은 초대장이 없을 텐데요?”
  • 남선미는 로열 블루의 샤넬 신상 A라인 드레스를 입고 하늘거리며 걸어왔다.
  • “어떻게 들어왔어요? 누구 초대장 훔쳤어요?”
  • “남선미 씨도 초대장 없을 텐데 어떻게 들어왔어요? 개구멍으로 들어온 거예요?”
  • 고아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운서도 아직 해결하지 못했는데 남선미까지 끼어들다니, 정말 짜증났다.
  • “당연히 우리 수영 씨가 데리고 온 거죠. 유 사모님, 난 수영 씨 파트너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