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연에게 개 취급을 당한 남선미는 평소 같으면 진작 펄쩍 뛰고도 남았을 텐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평소와 달리 고아연을 향해 웃기만 할 뿐이다.
그녀의 눈빛이 이상하다고 느낀 고아연이 고개를 돌리자 눈 앞의 불빛이 커다란 실루엣에 의해 가려졌다.
한 손에는 와인 잔을 들고 다른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유수영이 편하게 서있는 것 같지만 고아연은 그의 밤색 눈동자에서 무섭게 일렁이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자선 파티에 참석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녀는 결국 이 곳에 와서 그를 망신시켰다.
그렇다, 그는 무조건 그녀가 부끄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유수영이 말을 하기도 전에 남선미가 이미 빠르게 그의 곁으로 다가가 팔을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
“수영 씨, 그녀가 나를 개라고 욕했어요. 나보고 초대장도 없는데 개구멍으로 들어왔냐고 했어요. 수영 씨… 당신이 그녀에게 내가 당신 파트너로 당당하게 이 곳에 들어온 거라고 얘기해줘요!”
고아연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 사람을 쳐다보고 있다.
정실과 내연녀 사이, 그가 내연녀를 선택한다면 고아연은 평생 내연녀 앞에서 머리를 쳐들 수 없을 것이다!
외모가 딸리지 않고 집안이 범상치 않은 유수영은 어디를 가든 이슈 메이커였다. 얼마 되지 않는 사이 그들은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주변의 재벌들이 속삭이며 고아연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유수영이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본 남선미는 조급해졌다.
“수영 씨, 잊지 마요…”
“선미에게 사과해.”
남선미가 한마디도 하기 전에 유수영이 차가운 목소리가 고아연의 머리 꼭대기에서 들려왔다.
고아연은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이를 꽉 깨문 채 억지로 눈물을 참고 차갑게 웃으며 되물었다.
“뭐라고 하셨어요, 유 회장님? 제대로 못 들었어요.”
“선미에게 사과하라고!”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고 유수영의 두 눈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블랙 슈트에 흰 셔츠, 그리고 고아연이 그에게 매준 회색 넥타이는 그의 주변 공기를 더욱 쓸쓸하고 차갑게 만들었다.
“안 그러면 후과는 너도 잘 알 거야.”
고아연은 당연히 후과를 알고 있었다. 금성에서 유수영 그가 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약간의 인맥을 통해 고 씨 집안을 영원히 재기할 수 없게 할 수도 있었다!
“고아연, 벙어리가 된 거야? 수영 씨 말 못 들었어?”
남선미는 오만하게 설치며 유수영의 팔을 더 꽉 껴안았다.
유수영이 손에 든 와인 잔을 가볍게 흔들고 이내 눈빛이 어두워지자 모든 것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미안해요, 남선미 씨, 내가 잘못했어요.”
고아연은 입 꼬리를 끌어 올린 채 돌아서서 언론의 카메라들을 마주보며 말했다.
“당신은 대스타이니 그 어느 누구에게 빌붙어도 되고, 그 누구의 파트너가 되어도 되죠. 당신이 매일 내 남편의 교외 별장에서 지내며 내 남편의 아이를 가졌다고 해도 나는 당신이 틀렸다는 말 한마디 할 권리조차 없네요.”
“뭐? 남선미가 스폰 받는다고?”
“남선미가 임신 했어?”
“…”
고아연이 말을 마치자 주최측이 초대한 언론사는 순간 발칵 뒤집혔다.
남선미는 상대가 자신을 같이 끌어내릴 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연예인이 재벌과 스캔들이 나면 사교계의 꽃이 될 수 있지만 일단 “스폰”, “임신” 이라는 부정적인 타이틀이 붙으면 그녀가 안방 마님을 밀어내지 않는 이상 연예인 미래도 불투명해지고 심지어 미래의 결혼, 인생이 전부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것이다!
유수영이 눈빛이 어두워지며 앞으로 한걸음 다가가자 그의 몸에서 나는 옅은 담배 냄새가 순간 그녀를 덮쳤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아연, 네가 무슨 짓 했는지 알아?”
“알죠, 유 회장님이 나에게 사과하라고 해서 이미 사과했잖아요.”
고아연은 그의 속박에서 벗어나 갑자기 그의 면전에서 손에 들고 있던 고개지의 진필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유 회장님께도 사과드릴게요. 방금 손이 미끌어져서 회장님이 아끼는 걸 찢어버렸네요. 부부 사이에 나에게 배상하라고 하지는 않겠죠? 아시다시피 이혼을 하지 않는 이상 난 배상도 못해요.”
유수영은 단번에 그녀를 목 졸라 죽이기라도 할 듯 손에 힘을 주어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가 이토록 화를 내는 것을 본 적 없는 고아연은 순간 심장이 목젖까지 차올라 그의 카리스마에 눌려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매스컴이 점점 많아지자 너무 두려웠던 남선미는 유수영 품으로 파고들기만 했다.
유수영은 갑자기 손을 풀고 돌아서서 한 손으로 남선미의 어깨를 감싸고 한 손으로 카메라를 가린 뒤 곧장 호텔 밖으로 걸어갔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던 고아연은 어쩐 일인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고 눈 앞이 캄캄해져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한참이 지났는데도 통증은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뜨거운 손바닥이 그녀를 감쌌다. 엄지 손가락의 거친 흉터가 뚫린 의상 틈으로 피부에 닿는 순간 익숙한 느낌은 그녀를 하얗게 질리게 만들었다.
고아연이 고개를 돌리자 부시양은 이미 손을 거둔 뒤 빙그레 웃었다.
“아연아, 오랜만이야.”
어쩐 일인지 조명이 갑자기 어두워졌고 부시양은 분명 웃고 있는데도 어두운 그림자 밑에서 차가워 보였으며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검은색 눈동자의 시선은 고아연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고 언제라도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이 만들었다.
8년이다. 8년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다. 그녀로 하여금 이번 생에는 더이상 그를 만나지 못할 것 같았고 젊고 풋풋한 사랑은 이미 지나간 옛일이 되어 다시는 기억나지 않을 거라고 느껴질 정도로 오랜 시간이었다.
말문을 떼려던 고아연은 긴 손톱이 손바닥에 깊게 박힌 채 입 꼬리를 끌어올리고 되물었다.
“사람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 우리가 만난 적 있었던지 기억이 나지 않네요.”
찰나의 순간 멈칫하던 부시양의 검은 눈동자에 다시 웃음으로 물들었다.
“두달 동안 고아연 씨는 DFO에 와서 나를 스무 번도 더 넘게 찾았으면서 지금은 나와 선을 그으려는 건 무슨 뜻이에요?”
그 말을 들은 고아연은 표정이 더욱 일그러져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가 바로 DFO의 부 회장이었다.
그가 DFO의 부 회장님이라니?!
그러니까, 두달 동안 그녀가 투자를 따내기 위해 DFO에서 스무 번도 넘게 거절당한 것이 전부 그가 주도한 거라고? 지금 그녀를 갖고 노는 걸까? 8년 전과 똑같이!
“저 여자야, 저 여자가 다른 사람 초대장을 들고 숨어 들어왔어… 당신들 자선 파티 너무 허술한 거 아냐, 어떻게 아무 사람이나 다 들어와!”
고아연이 부시양과 대치하고 있는 와중에 이운서가 어느새 경비원을 불러와서 고아연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여자 쫓아내!”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전부 귀한 손님들이었기에 경비원들은 이운서의 신분을 알지만 함부로 미움을 살 수 없어 앞으로 한걸음 다가가 고아연에게 말했다.
“고아연 씨, 저희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고아연 씨 초대장은 곽 도련님 것이기에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을 피할 수 없으니 이렇게 하시죠…”
“사람들 앞에서 곽 도련님에게 전화 해서 이 초대장이 아가씨가 훔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