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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교제한 지 8년이 된 두 사람

  • 곧은 자세로 계단 위에 서 있는 여자는 깔끔하고 단정한 샤넬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얼굴에는 여전한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고결하고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는데 역시나 처음 그녀를 마주쳤을 때처럼 고고한 모습이었다.
  • -- 박연이었다.
  • 고아연은 언젠가 그녀와 다시 마주칠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토록 갑작스럽게 마주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순식간에 그녀를 곤경에 몰아넣고 만 박연이었다.
  • 8년 전, 부시양은 박연의 화풀이를 위해 그녀에게 접근해서 마음을 얻은 다음 매몰차게 버려서 그녀의 자존심을 바닥에 깔아뭉갰던 것이다!
  • 고아연은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성적이 박연보다 몇 점 높았기 때문인가, 그래서 디자인 대회에서 행운스럽게도 박연을 이기고 아무런 쓸모도 없는 1등을 거머쥐었기 때문이었나?
  • 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차라리 그 1등을 박연에게 양보하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부시양이 그녀의 인생에 끼어들지 않게 할 수만 있었다면.
  • 그때의 부시양은 좋아하지 않을래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눈부시게 빛나는 사람이었다.
  •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에게서 멀리멀리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시양 씨, 여자친구 눈앞에서 다른 여자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건, 조금 보기 그런데요?"
  • 박연이 계단을 내려와 고아연과 부시양의 앞에 섰다. 그녀는 웃는 듯 마는 듯 고아연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부시양의 큰 손을 쳐다보았다.
  • "아연이를 동생처럼 생각한다는 것도 그녀에게 다른 감정을 품지 않았다는 점도 잘 알고 있죠. 하지만 이미 남편이 있는 아연이 명성도 생각해 줘야 하잖아요?"
  • DFO의 부 회장님과 박 씨 집안의 큰 아가씨가 교제 중이다!
  • 게다가 박 씨 집안의 큰 아가씨가 유 사모님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어!
  • 박연이 말을 내뱉자 주위에 있던 기자들이 순식간에 들끓으며 마치 둘도 없는 특종을 잡은 것처럼 박연을 향해 끊임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 "아연아, 오랜만이야."
  • 박연이 대범하게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 "오랜... 오랜만이야."
  • 곁에 서있는 고아연의 입술은 마치 무언가에게 핏기를 다 빼앗긴 것처럼 차갑고 창백했다.
  • 그녀는 손을 뻗어 그 사람의 손가락을 힘껏 떼어내고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 그녀는 부시양과 박연 사이를 갈라 놓는 내연녀로 내일 아침 신문에 얼굴이 실리고 싶지는 않았다!
  • 내연녀가 되는 것은 한 번으로 충분했다. 이미 뼈저린 경험을 해 보았으니 더 이상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 그녀의 몸부림을 눈치챈 부시양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고 그녀를 품 안에 더욱 세게 가두어 버렸다. 차가운 눈빛이 그녀에게 끈질기게 따라붙었고 마치 그녀를 자신의 심장에 단단히 못 박아 버리기라도 할 듯한 눈빛이었다.
  • "부 회장님, 놔 주세요!"
  • 고아연이 차갑지만 우아함을 잃지 않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 "박연 씨께서 말씀을 꺼내신 지금 제 처지는 생각하지 않으셔도 본인의 처지를 생각하셔야죠. 여자의 질투는 그리 쉽게 가라앉는 것이 아니거든요!"
  • 부시양은 "부 회장님"이란 호칭이 몹시나 거슬렸다. 잠시 정신이 팔린 사이 고아연은 이미 그의 품을 벗어나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 반 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 몸을 옆으로 돌린 박연이 자연스럽게 그의 팔짱을 끼고 손에 있던 와인 잔을 든 채 기자들에게 말했다.
  • "묻고 싶은 질문이 있다면 얼른 물어보세요. 잠시 뒤면 저와 시양 씨 모두 3층에서 진행될 경매에 참여해야 하니까요."
  • "박연 씨, 부 회장님과 교제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박 씨 집안과 부 씨 집안은 서로 혼약을 맺을 생각이십니까?"
  • 박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 "교제한 지는 8년이 되었어요."
  • 8년...
  • 고아연은 자신이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이 "8년"이란 못에 단단히 박혀 움직일 수 없었는지 순식간에 그녀의 마음에 생채기가 잔뜩 생기고 말았다.
  • 함께 한 지 8년이란 뜻은, 부시양이 그녀와 사귀고 있을 때 이미 박연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는 건가? 아니! 마음 뿐만이 아니야! 그는 그 자체로 완전한 박연의 것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