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7화 유 회장님의 취향은 전혀 바뀌지 않았네요

  • 유수영은 전신거울 앞에 서서 옷깃을 정리하고 소매는 반쯤 접은 채 차가우면서도 나른하게 말했다.
  • 예전 같으면 고아연도 그를 상대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급히 자선 파티에 가야 했기에 그와 더 이상의 말다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서랍장을 열어 한 줄로 늘어진 명품 넥타이 중에서 가장 깔끔한 것을 골랐다.
  • 유수영은 반짝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담담한 미소를 지은 채 두 팔을 벌리고 그녀가 그의 목을 만질 수 있게 했다.
  • 키가 큰 그는 일부러 턱까지 낮추고 있었다. 발끝을 쳐들고 겨우 그의 넥타이를 맬 수 있었던 고아연은 고개를 들다 하마터면 코끝이 그의 턱에 부딪힐 뻔했다.
  • 유수영의 얼굴에는 시종일관 담담한 미소가 흘러 넘쳤다. 모르는 사람들은 두 사람이 못하는 얘기가 없는 금슬 좋은 부부인 줄 알 것이다.
  • “음, 예쁘네.”
  • 유수영은 거울을 비추며 가볍게 웃었다.
  • “아연아, 너는 타고난 디자이너야. 애초에 전공을 바꾸지 않았으면 지금쯤 패션계에 이름 날렸을 거야.”
  • 고아연은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보기에는 태연자약해 보였지만 차갑고 청초한 얼굴에 멍한 표정이 드러났다. 유수영은 실로 대단했는데 한마디 말로 그녀의 정곡을 찌를 수 있었다.
  • “오랜 시간이 지나도 유 회장님의 취향은 전혀 바뀌지 않았네요.”
  • 박연이 바로 디자이너였는데 밀라노 패션계에서 손에 꼽히는 한국 디자이너이자 유수영이 잊지 못하는 첫사랑이었다.
  • 우습게도 대학교를 다닐 때 두 사람은 동창이었는데 박연의 작품은 항상 2등이었고 1등 자리는 영원히 고아연의 차지였다.
  • 한 폭의 자수 작품인 “꽃이 지다” 는 업계를 놀라게 했고 여러 학교들이 공동으로 개최한 국제적인 디자이너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 금성대학의 많은 사람들은 고아연이 외국으로 가서 유명한 한국인 디자이너가 될 거라 생각했지만 대학교 2학년 때 그녀가 갑자기 금융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그때부터 “디자이너” 와는 선을 그을 줄은 몰랐다.
  • 아무도 이유를 몰랐다.
  • 고아연은 눈에 모래라도 들어간 것처럼 눈이 아파와 돌아서서 문 밖으로 걸어갔다.
  • “오늘 밤 국회의원들도 가는데 성남 땅이 아직 얘기가 안 돼서 늦을 거야. 밖에서 혼자 조심하고 일이 있으면 이 집사에게 전화해, 난 널 데리러 가지 않을게.”
  • 말하며 옷장 문을 연 유수영은 뒤적여진 작은 상자를 힐끗 보더니 옅은 웃음이 사라졌다.
  • 한 무더기 명품 시계 속에서 아무 시계나 골라 찬 유수영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로 들고 있던 파일을 작은 상자 옆에 휙 던지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옷장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
  • 아래층 로비.
  • 한창 과일을 먹고 있던 유가희는 유수영이 내려오는 것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 “오빠, 새언니가 또 오빠에게 화냈죠? 썩은 표정으로 나가더니 내가 인사를 했는데 대꾸도 안했어요…”
  • 유수영은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문을 나섰다.
  • “어라? 오빠, 새언니가 나를 무시하면 그만이지, 왜 오빠도 날 거들떠보지 않는 거예요! 오빠, 오빠…”
  •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유가희는 거실에서 반나절이나 기다리며 오빠와 새언니 손에서 “용돈”이나 좀 얻어내려 했는데 허사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 손에 든 과일 껍질을 버린 유가희의 핸드폰이 울렸다.
  • “이봐요, 아가씨, 당신 물건 대체 가질 거예요 말 거예요? 차 형 생일선물로 주기로 했잖아요? 싫으면 나 팔 거예요?”
  • “아뇨아뇨아뇨!”
  • 유가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텅 빈 계단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들어 아무도 없는 2층 안방을 바라봤다.
  • “살 거예요! 아무리 비싸도 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