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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시양 씨, 오랜만이에요

  • "도둑질"은 금성의 제일 가던 부잣집 아가씨였던 고아연에게는 아주 수치스러운 단어였다.
  • 고아연은 핸드백을 꼭 쥔 채 창백한 안색으로 그곳에 못 박힌 듯 서있었다.
  • 부시양은 아무런 말도 없이 술잔을 들고 등 뒤의 계단에 몸을 기댄 채로 그녀를 조용히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없는 그의 검은 눈동자는 마치 바다처럼 깊고 그윽했다.
  • 이운서는 그녀가 좋은 그림 하나를 망쳐 놓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빠져 차가운 말투로 그녀를 조롱했다.
  • "멍하니 서서 뭐하고 있어? 전화 걸어야지?"
  • "왜? 못 하겠어? 곽 회장님께 거절당하고 다른 사람에게 도둑으로 몰릴까 봐 겁이 나는 거야?"
  • "학문에 조예가 깊은 고 선생께서 어쩌다 딸을 도둑으로 키웠을까?"
  • "고 씨 집안의 소질도 그저 그런 모양이네!"
  • 이운서가 닦달을 해대자 고아연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곁에 서있던 부시양에게 눈길을 던졌다. DFO는 오늘 자선 파티 주최 측 중 하나였기에 DFO 그룹의 회장인 부시양이 말 한마디만 해준다면 아무도 그녀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 하지만...
  • 그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로 편하게 서서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과는 달리 한 걸음도 그녀에게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 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좋은 구경거리라도 난 듯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미치도록 우아한 모습이었다.
  • 고아연은 그가 고의적으로 이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고 그녀를 도와주지 않고 있었다.
  • "고아연 씨, 저희를 난처하게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 경비원이 또다시 재촉하고 있었다.
  • "곽 회장님께 전화를 걸어 주십시오."
  • "전 곽 회장님의 친구예요. 이런 태도로 절 욕보이다가 곽 회장님께서 알게 되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 고아연이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 "..."
  • 경비원은 난처한 기색이었다. 곽 씨 집안은 금성에서 권세가 대단한 집안이었기에 고작 경비원에 불과한 그가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집안이 아니었다.
  • "하!"
  • 이운서가 콧방귀를 뀌었다.
  • "무서울 게 뭐 있어? 정말 저 여자를 오해했다면 나 이운서가 직접 곽 회장님께 사과를 드릴 거야! 고아연에게도 직접 사과를 할 거고!"
  • "전화 걸라고 해!"
  • "오늘 밤 자선 파티에 저런 어중이떠중이를 받아들일 수는 없지!"
  •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이운서가 그녀를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 고아연이 쥐고 있던 가방이 구겨졌고 그녀의 마음도 가방과 함께 구겨져버렸다.
  • "고아연 씨, 죄송하지만..."
  • 경비원이 그녀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 고아연이 별안간 깊은 숨을 들이 마시더니 고개를 번쩍 들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점점 짙게 번져갔다.
  •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오늘 밤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신 곽 회장님을 뭐하러 귀찮게 하겠어요? 전 DFO의 부시양 회장님과는 친분이 있는 사이이고 부시양 회장님의 초대를 받고 왔으니 부 회장님께 여쭤보면 되는 일 아닌가요?"
  • "부 회장님? 하..."
  • 이운서가 냉소를 지었다.
  • "고 씨 집안에서 거짓말쟁이가 났군 그래. 아까는 곽 회장님과 친하다고 하더니 이제는 부 회장님과 친분이 있다고 하고..."
  • 이운서의 조롱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아연이 몸을 일으켜 한 손으로 와인 잔을 든 채 빠른 걸음으로 부시양에게 다가갔다.
  • "시양 씨, 오랜만이에요."
  • 부시양의 시선이 더욱 그윽해졌고 미소 띤 그의 얼굴에 희미하게 보조개가 드러났다.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는 조금의 나른함이 섞여 있었다.
  • "아연아, 방금 전까진 아는 체도 하지 않더니."
  • 고아연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녀는 심지어 그와 눈을 마주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와 인사를 건네고 싶지 않았다. 그가 죽도록 미웠지만 고 씨 집안의 명성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에게 굴복해야 했다.
  • 고아연은 갑자기 이런 자신이 사무치게 싫어졌다.
  • 살짝 치를 떨던 그녀의 얼굴에 번진 미소는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 "시양 씨, 사내대장부로써 구태여 나 같은 아녀자에게 화풀이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