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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무릎을 꿇으면 전화를 끊을 게요

  • 이운서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로 꼼짝하지 않았다.
  • 심열이 빠르게 다가와 부시양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 "부 회장님, 진 청장님과 통화 연결됐습니다."
  • 부시양이 긴 손가락을 움직여 핸드폰을 받아 들더니 귓가에 가져다 대고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아저씨 안녕하세요, 급한 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오늘 금성에서 우연히 이 청장님을 만나 뵙고 아저씨 얘기가 나와서요. 요즘 건강은 괜찮으세요?"
  • "별말씀을요. 시간이 된다면 제가 아저씨를 찾아뵈어야죠."
  • “…”
  • 부시양의 눈빛은 마치 물과도 같이 옅고도 차가웠다. 그는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지들과 얘기를 나누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핸드폰 너머의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그는 고아연의 허리를 안고 서서 시시때때로 이운서를 흘깃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의 그런 시선은 이운서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 "부 회장님, 넓으신 아량으로 용서해 주세요. 제가 잘못했으니, 이번 한 번만 봐주세요!"
  • 얼마나 긴장했는지 이운서의 이마에 땀이 방울방울 맺혔다.
  • 부시양은 통화를 끊지 않은 채로 그에게 눈짓을 했다. 고아연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움직여 긴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마치 무릎을 꿇으면 통화를 끝내겠다 얘기하는 것 같았다.
  • "알겠어요! 무릎을 꿇을 게요! 지금 당장 무릎을 꿇겠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 이운서는 자신의 모든 정치적 생애와 미래를 자신의 무릎 밑에 깔았다. 그는 뻣뻣하게 굳은 몸을 살짝 옆으로 돌리더니 마치 산산조각이 난 조각상처럼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고아연의 앞에 무릎을 세게 꿇었다.
  • 검찰청 부청장의 체면이 완전히 박살 나는 순간이었다.
  •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 "아연아! 아저씨가 잘못했다. 이 아저씨가 늙어 눈에 뵈는 게 없었어. 내가 불의스럽고 내가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나쁜 사람이야. 네 넓은 아량으로 날 용서해 주렴!"
  • 이운서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 "부 회장님과 각별한 사이인 네게 부탁할게. 제발 이 아저씨를 대신해 부 회장님께 통화를 끝내고 오늘 밤의 일은 잊어 달라고 부탁드려 주렴!"
  • "그럼 제 아버지의 사건은요?!"
  • 고아연은 이운서의 정치 생애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온통 아버지의 목숨과 고 씨 집안의 흥망성쇠뿐이었다.
  • "네 아버지의 사건은 어렵고 복잡한 사건이라 나 같은 사람이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야. 내 손을 거치게 된다면 당연히 공정하게 사건을 처리할 거야!"
  • 이운서의 안색은 무척이나 창백했고 곧 고아연의 발 앞에 머리라도 조아리며 잘못을 빌 것 같았다.
  • "말씀하신 대로 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 입술을 깨문 고아연이 고개를 돌려 부시양을 쳐다보았다.
  • "시양 씨..."
  • 얇은 입술을 살짝 벌린 그녀는 순간 어떻게 말을 건네야 그가 통화를 끝내게 할 수 있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다행히도 부시양은 그를 더이상 난처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는지 낮은 목소리로 핸드폰 너머의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통화를 끝냈다.
  •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
  • 이운서는 여전히 끊임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고아연의 몸을 이끄는 커다란 힘에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부시양이 그녀를 이끌고 2층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 "부 회장님, 유 사모님과는 어떤 사이이십니까? 유 회장님과 유 사모님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혹시 남몰래 이미 이혼 절차를 밟은 겁니까?"
  • "유 사모님, 유 회장님과의 이혼을 공개하지 않은 것은 유 씨 그룹의 주가가 떨어질까 염려되어 그런 것입니까?"
  • "부 회장님, 현재 고아연 씨와 교제하고 계십니까?"
  • "부 회장님, 고아연 씨는 오늘 회장님 파트너 신분으로 자선 파티에 참석한 것입니까?"
  • “…”
  • 이렇게 대단한 스캔들을 놓칠 리가 없는 기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부시양과 고아연 두 사람을 계단 중앙에서 에워쌌다.
  • 고아연은 얼른 해명을 하고 싶었지만 해명을 한다면 초청장을 도둑질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 미간을 찌푸린 고아연이 곁에 서있는 남자를 쳐다보자 마침 그녀를 돌아보고 있던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뜨뜨미지근하고 가벼운 시선은 마치 한눈에 그녀의 모든 생각을 꿰뚫어 본 것만 같았고 그녀의 심장을 세게 움켜쥐고 있는 듯했다.
  • "모두들 무슨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시양 씨의 파트너는 접니다. 시양 씨와 교제를 하는 사람은 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