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FO 투자은행 건물에서 나오던 고아연은 약간 머리가 어지러웠고 손에 안긴 한 뭉치의 기획안이 마치 천근이나 되는 돌덩이처럼 그녀를 숨 쉴 수 없게 누르는 것 같았다.
눈 깜짝할 새에 마세라티 GranCabrio 한 대가 그녀의 무릎을 스칠 정도로 빠르게 마주 달려왔다.
눈살을 찌푸린 고아연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차 안에 있는 사람은 그녀도 아는 사람이었는데 신예 유명모델이자 최근 유수영과 스캔들로 떠들썩한 남선미였다.
남선미는 차 문을 열고 내리더니 고아연을 경박하게 쳐다보며 냉소를 지었다.
“유 사모님, 나 임신했어요. 수영 씨 아이예요.”
고아연은 상대를 힐끗 쳐다보았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빨간 입술을 한 짙은 화장의 여자는 D 브랜드의 신상 A라인 치마를 입고 있어 글래머러스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냈고 위에는 밝은 자주색의 밍크코트를 걸쳤는데 유난히 매혹적이었다.
유수영의 요즘 취향은 정말 종잡을 수 없네!
고아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돌아가려 했다. 마음이 급해진 남선미는 팔을 벌려 그녀를 가로 막았다.
“유 사모님, 남자아이일 것 같아요 아니면 여자아이일 것 같아요?”
“이름을 뭐로 지으면 될 것 같아요? 유 뭐가 좋을까요?”
“수영 씨가 매일 밤 나와 같이 있느라 홀로 독수공방 하는 기분이 말이 아니죠?”
“유 사모님 차 안 갖고 오셨죠? 지금 어디 가세요, 제가 데려다 드릴까요? 제 새 차 좀 타보세요. 수영 씨가 사준 건데 5억5천짜리에요.”
남선미는 말하며 긴 머리를 휘날려 눈부신 진주 귀걸이를 드러냈다.
고아연은 그것이 Akoya 진주이며 명품 제작 디자인에 14억 짜리 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며칠 전 유수영의 코트 주머니에서 본 적 있는 영수증이였다. 유수영은 밖에 둔 여자들에게는 참 대범하면서 그녀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온갖 방법을 다 해서 철저하게 짓밟으려는 것뿐이었다!
“우리 수영 씨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는지 내가 원하는 건 뭐든 사주거든요. 유 사모님, 엊그제 생일이라고 들었는데 수영 씨가 무슨 선물 사줬어요?”
남선미는 의기양양하게 고아연의 목에 걸려있는 진주 목걸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진주 목걸이 맞죠? 그건 내가 한달 전에 골라서 지겹게 걸고 다니다가 질려서 당신에게 준 거예요.”
고아연은 몸을 곧게 펴고 말했다.
“말 다 했어요?”
“고아연 씨, 지금 이렇게 유 사모님 자리를 억지로 지키고 있는 거 재미있어요? 내가 알기로 수영 씨는 당신을 사랑하지도 않고 애초에 당신과 결혼한 것도 고 씨 집안 세력 때문인데 지금은 고 고위공직자가 그런 일을 벌였으니 고 씨 집안은 수영 씨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어요!”
남선미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 고아연을 보며 체면 불고하고 소리질렀다.
“눈치껏 지금 수영 씨와 이혼해서 나에게 자리를 내어주면 서로 못볼 꼴 보면서 얼굴 붉히는 일은 없을 거예요!”
고아연은 눈을 찡그리며 입 꼬리를 살짝 올려 얼굴에 냉소를 지었다.
“남선미 씨, 우리 남편이 당신을 그렇게 사랑한다면서요, 그가 이혼하기를 바라면 직접 그를 찾아가지 저를 찾아와서는 뭐해요?”
“나, 난…!”
남선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수영에게 반년 넘게 매달리며 생떼를 부렸지만 그는 무서울 정도로 잠잠했다. 겉으로는 그녀를 예뻐해도 속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데 그녀라고 무슨 방법이 있을까?
그녀를 상대하기 귀찮은 고아연은 계속 앞으로 두어걸음 걸어가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맞다, 아마 그쪽은 모를 거예요. 나와 남편이 결혼할 때 혼전 합의서를 작성했는데 나를 늙을 때까지 사랑할 거라고 한 그는 만약 중간에 이혼을 한다면 그는 고 씨와 유 씨 두 집안 재산 한 푼도 받지 않고 알몸으로 나간다고 했어요!”
남선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고아연은 또 그녀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모든 재산은 내 것이 된다는 얘기예요. 그가 얼마전에 당신에게 선물한 마세라티와 진주 귀걸이까지 포함해서요!”
말을 마친 그녀는 돌아서서 가버렸다.
등 뒤에서는 여전히 남선미의 분노 섞인 욕설이 들려왔다.
“고아연! 네가 뭔데?! 수영 씨가 당신과 결혼한 건 그저 박연 씨에게 화난 것 때문이잖아?!”
고아연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자 품에 안은 종이가 약간 구겨졌고 코너를 돌기 무섭게 핸드폰이 울렸다.
“너 어디야?”
전화기 너머에서 유수영의 차갑고 무거운 목소리가 마치 어둠 속의 희미한 빛처럼 순식간에 고아연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
“돌아와. 볼 일 있어.”
고아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상대는 이미 “탁” 하고 전화를 끊었다.
8년, 그들이 함께 한지 어느새 8년이 되었고 결혼 한지도 6년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그에게 시집을 가서 원하던 대로 그와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언제부터 그들의 관계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고아연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6년 동안의 결혼생활 중 유수영의 곁에는 온갖 여자들이 있었고 다들 관계가 친밀했지만 유독 정식 아내인 그녀만 남남처럼 대했다.
그도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6년 전 그는 그녀를 많이 사랑했고 큰 불길 속에서 그녀를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였다. 그때 남은 흉터가 지금까지도 그의 팔뚝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