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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그런 여자 가질 필요 없어

  • 진서연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허락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날 입사 절차를 밟은 그녀는 오후에 출근했다. 그리고 업무가 그녀의 상상처럼 그렇게 힘들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곤 남기로 결정했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가 자신을 훔쳐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진서연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검은색의 벤틀리가 세워져있는 것이 보였다. 조금 내려간 차창 사이로 흐릿하게 누군가의 옆모습이 보였다.
  • ‘기정수 인가? 신경 쓰지 말자!’
  • 집으로 돌아온 진서연은 진천우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로 배경이 화려하고 매우 고급스러운 집을 발견하게 되었다. 진서연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 “누구 집에 간 거야?”
  • “할머니 집이에요. 할머니가 나 엄청 좋아해요. 오늘은 디저트도 엄청 많이 해줬어. 천우 너무 좋아요.”
  • 아이가 기뻐서 휴대폰을 안은 채 침대에서 뒹굴었다.
  • 진서연은 진천우를 낯선 사람의 집에 두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해 그를 데리고 오려고 했지만 진천우는 이렇게 말했다.
  • “할머니랑 여기에서 일주일 동안 있겠다고 약속했어요. 지금 가면 할머니가 슬퍼할 거예요. 할머니 혼자 집에 있어서 불쌍하단 말이야. 엄마, 나 며칠만 더 있다가 갈게요. 네?”
  • “할머니 가족은?”
  • 진서연이 의아하게 물었다.
  • “할머니한테 아들이 하나 있는데 아이를 못 낳아서 쫓겨났어요. 혼자 외롭게 살고 있는데 아들한테 병까지 있으니 얼마나 불쌍해요. 천우가 며칠만 더 같이 있어주고 싶어요.”
  • “그래, 그럼.”
  • 진서연은 더 이상 천우를 말리지 않았다. 그리고 반 시간 동안 영상통화를 하고서야 잠을 청했다.
  • 이튿날 아침, 진서연은 창고로 갔지만 얼마 일하지도 않았는데 승진했다.
  • 창고관리인으로 승진한 그녀가 조금 망연하게 팀장님에게 물었다.
  • “원래 이 회사 승진이 이렇게 빠른 건가요?”
  • “위에서 내린 지시이니 열심히 하세요.”
  • 팀장님이 웃으며 돌아서더니 창고를 나서자마자 낮은 목소리로 몇 명의 창고 직원에게 말했다.
  • “과장님께서 신인을 잘 ‘보살펴달라’고 했으니까 오늘부터 모든 일을 저 여자한테 시켜요, 알겠죠?”
  • 직원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망설이며 물었다.
  • “진서연 씨 혼자 다 할 수 있을까요?”
  • “그건 진서연 씨가 걱정해야 할 일입니다. 당신들은 저를 따라 다른 부서로 가서 등록하죠.”
  • 팀장님은 인부 몇 명을 데리고 떠났다.
  • 홀로 창고에 남겨진 진서연은 연속으로 들어오는 물건들을 등록하고 처리했다. 진서연은 그제서야 원래 이곳을 책임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이를 물고 혼자 할 수밖에 없었다.
  • ......
  • 박하석이 이메일 안의 마지막 메일을 처리하고 나니 이미 새벽 두시였다. 피곤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눌렀지만 여전히 머리가 아팠다. 눈을 뜬 박하석이 물었다.
  • “그 여자는?”
  • “대표님, 아직도 창고에서 물건을 옮기고 있다고 합니다.”
  • 전찬혁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 박하석은 서류 하나를 펼쳐보더니 무심하게 물었다.
  • “왕강인은 그 여자랑 연락했어?”
  • “아니요.”
  • 전찬혁이 머리를 저었다.
  • 박하석이 전찬혁의 말을 듣더니 빨간 입술의 입꼬리를 날카로운 각도로 끌어올리고 하찮다는 듯이 평가했다.
  • “허세 부리기는.”
  • 전찬혁도 고개를 끄덕이며 하찮다는 듯 말했다.
  • “왕강인도 어디서 이런 여자를 찾아왔는지, 정말 담도 큽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니!”
  • 박하석의 머릿속에 갑자기 진서연이 여린 목소리로 화를 내는 모습이 떠올라 그는 조금 어지러웠다.
  • “대표님, 제가 말을 잘못했나요?”
  • 전찬혁은 박하석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다급하게 물었다.
  • 일 할 마음이 사라진 박하석이 서류를 덮고 말했다.
  • “왕강인 처리해, 요즘 그 인간 얼굴 보고 싶지 않아.”
  • “이미 처리한 거 아니었나요?”
  • 전찬혁이 의아하게 박하석의 서늘한 눈을 보며 물었다가 설명했다.
  • “어제저녁에 정수 도련님께서 왕강인의 회사로 찾아가 왕강인을 끌어내서... 음... 한바탕 싸웠다고 하던데, 대표님 모르고 계셨어요?”
  • “정수가?”
  • 박하석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는 기정수에게서 이런 얘기를 듣지 못했다.
  • 전찬혁은 박하석이 이 일을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채 말했다.
  • “정수 도련님께서 화풀이를 하러 갔다고 들었는데 왕강인의 보디가드에게 맞았다고 들었습니다. 병원에 소독하러 가실 때 잠깐 들르시겠습니까? 두 사람의 사이를 가까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 “그때 가서 봐.”
  • 박하석은 지쳤다. 전찬혁을 먼저 돌려보낸 그는 사무실에서 휴식을 취했다.
  • 깨어났을 때, 날은 이미 밝았다. 박하석은 컴퓨터를 열고 감시 카메라 화면을 찾아내 창고를 힐끔 봤다. 진서연은 지쳐서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었다. 차갑게 웃은 그가 차 키를 들고 병원으로 갔다.
  • 기정수는 7층에 위치한 VIP 병실에 있었다. 그는 꽤 많이 다쳤다.
  • “뭘 웃어요, 누가 들어오라고 했어요!”
  • 기정수는 박하석을 보자마자 화를 내며 욕했다.
  • 진수영과 박하석이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 기정수는 박하석을 싫어하기 시작했다. 그는 매번 박하석을 볼 때마다 좋은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 차가운 얼굴로 아침으로 나온 병원밥을 테이블 위로 던진 박하석이 날카로운 기운을 내뿜으며 말했다.
  • “사고 치고 맞아서 병원에 입원하는 게 네 능력이야?”
  • 박하석의 말을 들은 기정수의 얼굴이 굳더니 난감한 기색이 드러났다.
  • “제 일에 참견하지 마세요!”
  • 무심하게 의자를 끌어낸 박하석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아 물었다.
  • “왕강인이 오늘 변호사를 찾아서 너를 고소하려고 해, 이것도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닌가?”
  • “그런 더러운 일을 하고도 저를 고소하겠다고요!”
  • 기정수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벌떡 일어나 앉았지만 어깨의 상처를 건드려 고통이 느껴져 신음을 내뱉었다.
  • 눈이 빨개진 기정수가 이를 악물고 한숨을 돌리고서야 박하석을 보며 말했다.
  • “도와줘요.”
  • “내가 왜?”
  • 박하석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여유롭게 테이블 위를 두드리며 날카로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 고개를 숙인 기정수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 “미안해요, 하석 삼촌. 삼촌한테 그런 태도를 보이면 안 되는 거였는데. 제가 잘못했어요. 이번에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이건 제 일생의 행복이랑 연관된 일이에요!”
  • 기정수의 말을 들은 박하석이 눈썹을 들썩였다.
  • “그게 무슨 말이야?”
  • “그 여자가 돌아왔어요. 왕강인이 나한테서 걔를 빼앗아 갔던 거였어요. 이번에는 절대 내 옆에서 떠나게 만들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하석 삼촌이 나를 도와줘야 돼요. 그 여자가 내 곁에 남을 수 있도록. 앞으로 삼촌이 하는 말이라면 무조건 따를게요!”
  • 기정수가 손가락 세 개를 들고 보증했다.
  • 하지만 기정수의 말을 들은 박하석은 점점 어리둥절해졌다.
  • “왕강인이 너의 여자를 빼앗았다고?”
  • “네, 제가 신분을 숨기고 다닌 탓이에요. 다 제 잘못이에요. 하석 삼촌, 저 그 여자 한 번 놓쳤으니까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아요. 한 번만 도와줘요, 네?”
  • 기정수는 처음으로 박하석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며 간절하게 빌고 있었다.
  • 평소의 기정수가 이렇게 굽신거렸다면 박하석은 무조건 허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 “그런 여자는 가질 필요 없어. 인천에 이름난 규수들이 얼마나 많은데 한 여자한테 목숨 걸 필요 없어.”
  • 박하석과 기정수의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기정수가 자신을 ‘하석 삼촌’이라고 불렀으니 박하석은 그를 제대로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 남자로서 한 여자에게 목숨을 걸다니, 그것도 왕강인을 따른 여자라니, 듣기만 해도 바른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 기 씨 집안은 인천에서도 이름 있는 가문이었다. 기정수는 기 씨 집안의 독자였기에 형편이 비슷한 사람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신분은 깨끗한 사람을 만나야 했다.
  • 왕강인은 이 바닥에서 더럽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가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밖에서 여자를 마음대로 만나고 다니는 사람인지라 여러 명의 첩을 두는 건 기본이었다. 그런 사람이랑 엮일 수 여자는 대부분이 깨끗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