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연의 하얗고 예쁜 이마 위에 얇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연약하고 힘없는 몸은 화로라도 되는 듯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앵두같이 붉은 입술을 꾹 다문 그녀가 반복했다.
“나한테 손 대지 마!”
하지만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두 눈을 감더니 쓰러지고 말았다.
다시 깨었을 때, 그녀는 이미 병원에 도착해있었다. 침대 옆에 앉은 이는 그녀의 옛 남자친구 기정수였다.
그는 원망 가득한 얼굴을 한 채 의자에 앉아있었다. 눈 밑에는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섞여있었다.
“깼어?”
진서연이 눈을 뜨자 그가 담담하게 물었다.
진서연은 이마를 짚고 조금 일어나 앉았다. 불그스름한 얼굴은 정상적인 혈색을 되찾았다.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댄 그녀는 자신의 몸에 완정하게 입혀진 옷을 바라봤다.
기정수는 그녀의 사소한 행동들을 눈에 담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너희 집에 갔었어.”
“우리 헤어졌잖아.”
기정수가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다 하기도 전에 진서연은 고개를 들어 충격으로 가득 찬 그의 두 눈을 바라봤다.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말자.”
기정수는 자조적으로 웃더니 말했다.
“그러니까 그동안 나를 바보로 생각한 거야?”
“그런 적 없어.”
진서연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기정수는 화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왜 6년 동안이나 숨어 다니면서 돌아오지 않은 건데? 내가 도대체 뭘 잘못해서 나랑 헤어진 거야? 나를 사랑한 적은 있어?”
진서연은 이불을 꼭 붙잡은 채 침묵을 지키다 한참이 지나서야 서서히 입을 뗐다.
“예전에는 사랑했었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 상황들이 변했으니까. 모든 것이 그대로라고 하더라도 사람은 변한 사람이잖아. 너도 느끼고 있을 거 아니야, 나 이제 너 안 필요해. 그러니까 우리 헤어지자.”
“그 사람 때문이야?”
기정수가 마음속의 질투를 억누르며 물었다.
기정수의 말을 들은 진서연이 멈칫해있다 물었다.
“그 사람?”
기정수는 진서연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큰 박스를 들고 왔다. 안에는 돈이 가득 들어있었다.
진서연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야?”
“그 사람한테서 떠나, 아이는 돌려주고. 나랑 같이 떠나자.”
기정수가 진지하게 말했다.
진서연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멍해졌다. 방금 자신은 이미 똑똑히 말하지 않았던가? 기정수는 알아듣지 못하는 걸까?
“서연아, 왕 회장님은 가족이 있고 아내도 있는 사람이야. 남은 인생을 그 사람한테 바쳐가면서 살 필요 없다고. 정 그 아이를 그 사람한테 주는 게 내키지 않으면 내가...”
기정수는 여기까지 말을 하곤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는 이 낯선 사람의 아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움과 고통이 기정수의 마음속에서 치열하게 얽매어 그를 괴롭혔다. 이천일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을 그리움 속에서 헤매게 한 얼굴을 바라보던 기정수가 한참이 지나서야 결심한 듯 말했다.
“아이를 그 사람한테 주는 게 내키지 않으면 내가 키워줄게. 하지만 너, 다시는 내 곁을 떠날 수 없어.”
“지금 천우가 왕 회장님 아들이라는 거야?”
진서연이 의아하게 물었다.
“설마 아니야? 너 그때 왕 회장이랑...”
기정수가 말을 하다 멈추었다.
진서연은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박스 안의 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박스를 닫았다.
“내 아이는 내가 키워, 우리는 이미 끝났어. 앞으로 나 찾아오지 마. 어제는 구해줘서 고마워.”
말을 마친 진서연이 몸을 돌려 떠났다.
‘이 마음은 여기까지 인걸로.’
그녀는 누구의 연민도 필요 없었다. 그 누구도 천우를 진서연의 곁에서 떼어낼 자격이 없었다.
진서연은 바삐 떠나는 바람에 뒤에 있던 기정수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녀는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진 씨 저택으로 가 진천우를 찾았다.
하지만 진수영은 집에 없었다. 허미진도 어디로 간 건지 알 수 없었다. 진 씨 저택의 집사들은 진천우가 불을 낸 창고를 처리하느라 바삐 돌아쳤다. 진서연이 사람을 찾으러 왔을 때에도 그녀를 맞이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진서연을 부근의 주민이라고 생각해 구경을 하러 왔다고 생각했다.
진천우가 도망갔다는 소식을 들은 진서연은 한시름 놓았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긴장했다. 천우 그 어린 것이 처음 오는 이곳에서 어디로 도망갈 수 있을까?
길을 지나가던 사람에게 휴대폰을 빌린 진서연이 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가지않아 바로 연결되었다. 하지만 휴대폰 넘어 들려온 목소리는 천우가 아니라 상냥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진서연은 전화번호를 한 번 확인하더니 진천우의 전화번호가 맞다는 것을 확신했다.
“여보세요, 엄마?”
그때, 휴대폰에서 갑자기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서연은 기뻐하며 물었다.
“천우야, 어디 있어?”
“천우 지금 엄청 착한 할머니 집에 있어요.”
천우의 목소리는 활기로운 것이 굉장히 기뻐 보였다.
“무슨 할머니? 정확한 주소 좀 알려줘, 엄마가 데리러 갈게.”
진서연이 물었다.
“나 지금 특급 구역에 있어요, 엄마 걱정하지 말아요. 할머니 좋은 분이셔. 나한테 엄청 잘해줬어요. 지금 할머니가 집에 없는데 엄마가 나 데리고 가면 할머니가 속상해하실 거예요.”
천우가 작은 목소리로 애교스럽게 해명했다.
진서연은 상대방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한시름 놓았다.
“그래, 그럼 거기서 좀 지내고 있어. 엄마가 일 찾으면 천우 데리러 갈게.”
“네!”
천우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서연은 휴대폰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감사 인사를 전한 뒤 떠났다. 그녀의 캐리어와 휴대폰은 모두 호텔에 있었다. 다행히 그녀가 도망 나온 뒤, 진수영 쪽 사람들도 호텔을 떠났기에 진서연은 순조롭게 캐리어를 들고 체크아웃을 했다.
“그거 들었어? 어젯밤에 하석 도련님께서 습격을 당하셨대.”
“대박, 누가 그런 거야? 담도 크네!”
“하석 도련님께서 감시 카메라 영상을 받아 갔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화가 나서 돌아가셨어. 그 사람은 이제 죽었다고!”
체크아웃을 하고 보증금을 돌려받은 진서연은 그 말을 들으니 손이 떨려왔다.
그때 프런트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돈 떨어졌어요.”
“네.”
진서연은 직원에 말에 대답을 하고는 캐리어를 끌고 빠른 속도로 호텔을 떠났다.
그녀가 이번에 인천으로 온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6년 전의 그 남자를 알아내기 위해서고 두 번째는 반달 전, 재운 그룹의 기획팀에 지원을 해 이번에 면접을 보러 왔다.
재운 그룹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곳에 월세방을 얻은 진서연은 그날 오후, 옷을 바꿔 입고 재운 그룹으로 가 면접을 봤다.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진서연은 자신이 이미 누군가에게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대표님 사무실에 있던 전찬혁은 아침 내내 웃음을 참고 있었다. 진서연의 이력서를 구겨질 듯 잡고 있는 자신의 대표님을 바라보며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
진서연이라는 여자도 참으로 대단했다.
하석 도련님을 때리고 도망간 것도 모자라 재운 그룹으로 면접을 보러 오다니.
체면을 고려해 어젯밤의 일을 알리기 부끄러워하는 하석 도련님을 얕보고 있는 건가!
“대표님, 제가 가서 처리할까요?”
전찬혁이 물었다.
박하석의 눈 밑에 알 수 없는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진서연의 이력서를 쓰레기통으로 던진 그가 차갑게 말했다.
“필요 없어!”
“그럼...”
전찬혁이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직접 오겠다는데 놓아줄 수 없지. 하지만 기획팀의 자리는 그 여자한테 어울리지 않으니까 인사팀한테 창고로 가서 밑바닥부터 시작하게 하라고 해. 그리고...”
말을 하던 박하석이 가볍게 웃었다.
소식을 기다리던 진서연은 자신이 창고 하역인부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울해졌다.
과장님은 진서연이 도망갈까 봐 특별히 찾아와 그녀에게 위안을 건넸다.
“우리 회사의 고위층 지도자들도 모두 밑바닥으로부터 시작했어요. 진서연 씨 이렇게 훌륭한데 우리 회사에 들어왔으니 1월에 정식 직원으로 되고 3월에는 월급 인상되고 5월에는 과장님으로 승진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우리 회사 월급도 많이 줘요, 다른 회사의 두 배나 된다고요. 그러니까 여기 남아요, 우리는 서연 씨 같은 인재가 필요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