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연은 호텔 룸에서 나오면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진서연은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려던 그때, 등 뒤에서 자신을 두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저 여자 누구예요? 왜 박 대표님 방에서 나오는 거죠?”
“안에서 뭐 했을까요? 제가 알기론 박 대표님 오늘 하얀색 옷을 입고 왔던 것 같은데 방에서 나올 때에는 검은색 옷을 입고 있더라고요.”
“뻔뻔해라...”
뒤이어 화가 나서 이를 부득부득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베이터의 문은 닫혔지만 진서연은 똑똑히 들었다. 그녀의 정교한 얼굴이 조금 바뀌었다. 도대체 왜 자신을 뻔뻔하다고 욕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쓸데없는 참견을 하는 데에는 일등이었다.
연회장을 떠나며 진서연은 진천우게게 전화를 걸었다.
진천우는 화가 나서 억울하게 말했다.
“엄마, 벌써 열 시인데 왜 아직도 천우를 데리러 안 오는 거예요?”
“미안해, 엄마 이제 퇴근했어. 지금 데리러 갈게.”
시간을 확인한 진서연은 진천우에게 미안해졌다.
그러자 엄마의 든든한 지원군인 진천우가 이렇게 말했다.
“엄마 이제 퇴근했어요? 힘들겠다. 엄마가 있는 곳 여기랑 먼 것 같은데 내일 와도 괜찮아요. 이렇게 늦었는데 엄마 혼자 오는 거 천우는 걱정돼요.”
“그래.”
주소를 확인한 진서연은 두 사람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지금 차를 잡아서 가도 한 시간 정도가 걸렸기에 도착하면 열한시가 넘을 것이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천우를 돌봐 준 그 집에 가는 것도 실례라고 생각해 진서연은 내일 일찍 퇴근해서 선물을 사서 천우를 데리러 가기로 했다.
전화를 끊은 진천우가 큰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박 씨 가문 사모님은 긴장한 채 진천우의 이불을 꼭 잡고 기대를 담아 물었다.
“뭐래? 엄마가 허락했어?”
“네, 허락했어요.”
진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 씨 가문 사모님은 기뻐하며 얼른 집사에게 분부했다.
“야식 다 준비했어? 얼른 들고 들어와, 우리 귀염둥이 천우 배고플라!”
“할머니, 천우 배 안 고파요. 그렇게 많이 먹을 필요 없어요.”
진천우가 얼굴을 들고 말했다.
“이렇게 늦었는데 주방장 아저씨도 쉬게 해주세요.”
“그래, 천우 말이 맞다. 앞으로 할머니가 그 사람들을 꼭 일찍 퇴근시켜주마. 그런데 천우 오늘 저녁에 아무것도 먹지 않았잖니. 많이 먹어야지, 만약 엄마가 천우 야윈 모습을 보면 마음 아파할 거다. 그때 할머니가 뭐라고 변명할 수도 없고.”
박 씨 가문 사모님은 하인을 재촉해 야식을 들고 오게 했다.
8가지 음식을 준비했지만 3번째 음식이 들어온 후로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나머지 음식들은?”
박 씨 가문 사모님이 물었다.
“사모님, 도련님께서 돌아오셨는데 저녁을 먹지 않았다고 해서 주방에서 나머지 음식들을 도련님한테 가져다주었다고 합니다.”
집사가 얼른 대답했다.
박 씨 가문 사모님은 박하석이 자신이 진천우에게 준비해 준 음식들을 가로챘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나서 말했다.
“다 큰 어른이 배고프면 혼자 해먹을 것이지, 왜 애랑 뺏고 그러는 거야? 나이만 잔뜩 먹어놓고 돈 좀 벌었다고 맘대로 날뛰는 구만. 애도 못 낳는 주제에 감히 집으로 와? 썩 꺼지라 그래!”
집사는 이마 위의 식은땀을 닦으며 난감하게 말했다.
“도련님께서 이미 돌아오셨는데 쫓아내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맞아요, 할머니. 천우 많이 못 먹어요. 여기서 매일 공짜로 먹어서 눈치 보여요. 할머니가 자꾸 아저씨한테 화내면 천우는 자기를 탓할 수밖에 없어요.”
천우가 그릇을 들고 예쁘고 큰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그래도 천우가 착하다, 사람 걱정도 할 줄 알고.”
박 씨 가문 사모님은 유난히 진천우의 말에 신경 썼다. 아마도 천우가 귀엽게 생긴 덕분인 듯했다. 포동 포동 하고 정교한 얼굴은 박 씨 어르신의 미적 기준에 적합했다.
매번 진천우의 얼굴을 볼 때마다 박 씨 가문 사모님은 자기 집의 그 쓸모없는 아들을 때려주고 싶었다. 남들은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잘도 낳는데 왜 박하석 같은 재운 그룹의 대표님이, 인천의 부잣집 규수들이 떼를 지어 쫓아다니는 인물이 이렇게 쓸모가 없는 건지!
박 씨 가문 사모님은 결국 박하석을 잡고 잔소리를 해야만 분이 풀릴 것 같아 아래층으로 내려가 아들을 찾았다.
멍해진 진천우는 억울하게 집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할머니 원래 이렇게 사람을 욕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집사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전에도 그랬고 요즘은 더 심해지셨지.”
......
박하석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렵게 진서연을 한바탕 교육해 기분이 조금 좋아졌는데 박 씨 가문 사모님에게 이렇게 잔소리를 들으니 잘생긴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박하석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저녁을 먹었다.
박 씨 가문 사모님은 욕을 해도 소용이 없자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
“앞으로 돌아와서 밥 먹고 싶으면 미리 주방에 얘기해, 이건 내가 저 아이를 위해 준비한 음식이라고, 앞으로 너는 먹지 마.”
“어머니, 제가 어머니 친아들이에요.”
박하석이 진지하게 일깨워주었다.
“아서라, 나는 그게 더 부끄럽다.”
“......”
박 씨 가문 사모님의 말에 박하석은 할 말이 없어졌다.
박하석은 자신의 어머니의 성질이 요즘 많이 거칠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입맛을 잃은 그가 젓가락을 놓더니 말했다.
“올라갈게요.”
몸을 일으켜 위층으로 올라간 박하석은 손님방을 지나칠 때 발걸음을 멈추고 굳게 닫힌 방문을 한 눈 봤다. 안에는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은 박하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마침 손님방에서 나오던 집사는 문 앞에 서있는 박하석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안녕하세요, 도련님.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들어가 보실래요?”
집사가 열정적으로 박하석을 안으로 요청했다.
하지만 박하석은 무심하게 눈 밑에 있던 호기심을 거두고 물었다.
“어머니께서 왜 아이를 예진 씨 방에 안배한 거죠?”
“예진 씨께서 아이를 데리고 자주 오지 않잖아요. 사모님께서 아이를 너무 한곳에 두면 답답해한다고 하루 건너 방을 바꿔서 살게 하고 있습니다. 아이에게 새로움을 증가시켜줄 수 있다고요. 도련님께서 내일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일은 도련님의 방으로 가서 잘 겁니다. 도련님 방의 구도와 방향이 좋아서 아이가 좋아할 거라고 사모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도련님께서 시간이 지나도 결혼을 하지 못하면 도련님 방을 비워서 아이를 위해 쓰겠다고 하셨습니다...”
집사의 말을 듣다 보니 박하석은 한순간 자신이 주워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짜증이 나 방으로 돌아온 그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닫았다.
거칠게 셔츠를 벗어던지고 화장실로 가 손을 씻는 순간 박하석의 머릿속에 갑자기 진서연의 화가 나서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얼굴이 떠올랐다. 젠장, 왜 집사의 말을 듣고 난 뒤 그 위선적이고 더러운 여자가 생각난 건지.
귀찮은 기색으로 손을 닦은 박하석은 몸을 돌려 서재로 갔다. 짜증이 난 상태로 일을 하던 그때, 기정수에게 전화가 걸려와 술을 마시러 가자고 했다.
하지만 박하석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시간 없어.”
“하석 삼촌, 나와서 저랑 같이 좀 있어주세요. 저 정말 너무 괴로워요...”
기정수가 울먹이며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들은 박하석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어디 있는데?”
“코블러 바에 있어요.”
기정수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박하석은 반 시간이나 헤매고 나서야 바를 찾았다. 들어섰을 때 기정수는 이미 취해있었다. 곁에는 아무도 없었고 테이블 위에는 서너 병의 빈 술병들이 나뒹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