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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그녀의 목소리에 연연하다

  • 술병을 안은 기정수의 눈빛은 이미 흐리멍덩해졌다.
  • “저랑 그 여자 고1 때 처음 만났어요. 제가 6년을 기다렸는데, 장장 6년을 기다렸는데. 그 6년 동안 매일 그 여자 생각만 했어요. 저는 걔가 돌아오는 것만 기다리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이제 보니 다 제 착각인 것 같아요...”
  • 기정수가 씁쓸하게 웃더니 대답했다.
  • “하석 삼촌, 삼촌도 이런 제가 웃기죠.”
  • 박하석은 깊은 눈에 감정을 숨긴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기정수 옆으로 다가가 그의 옆자리를 잡고 안더니 위스키 한 잔을 주문했다.
  • “하석 삼촌도 마시려고요? 이런 곳에서 술 마시는 거 안 좋아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 기정수가 의아하게 흠잡을 데 없이 잘생긴 남자의 옆모습을 보며 물었다.
  •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박하석은 우아하게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도수가 꽤 높았지만 맛은 그나마 괜찮았기에 그는 한입에 털어 넣었다. 깔끔하고 품위 있는 그의 모습은 근처에 있던 많은 여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 “대박, 정말 잘생겼어!”
  • “어떻게 저렇게 잘생긴 남자가 있지, 전화번호를 알고 싶어!”
  • 두 여자가 박하석에게 반한 듯 소리를 질렀다. 어떤 사람은 주동적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지만 박하석의 날카로운 눈빛에 놀라 연신 물러서곤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 기정수는 웃으며 테이블 위에 엎드리더니 넋을 놓고 박하석을 바라봤다.
  • “하석 삼촌,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 “말해.”
  • 박하석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 기정수가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 “하석 삼촌도 마음에 품고 있는 여자가 있는 거죠?”
  • 술잔을 잡은 박하석의 손이 잠깐 굳었다. 하지만 그는 곧 섹시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 “왜 그렇게 말하는 건데?”
  • “재운 그룹의 대표님이잖아요. 인천에서는 거의 원하는 대로 다 이룰 수 있잖아요. 그런 삼촌이 무슨 여자인들 못 찾겠어요? 그런데 왜 아직도 솔로예요?”
  • 그리고 박하석은 얼굴까지 특출나게 잘생겼다. 집에서도 그렇게 급하게 재촉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질질 끌고 있는 건지.
  • 비록 몇 년 동안 박하석의 옆을 계속 지키고 있던 사람은 진수영이었지만 기정수는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박하석은 단지 진수영을 도와주고 있을 뿐이었다.
  • “정말 진수영을 좋아한다면 6년이나 질질 끌면서 결혼도 안 하지는 않았겠죠. 그래서 삼촌도 마음에 다른 여자를 품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 말이 맞죠?”
  • 박하석은 정곡을 찔렸다. 침묵을 지키는 그의 담담한 잘생긴 얼굴에서 그 어떤 이상함도 보아낼 수 없었다.
  • 하지만 기정수는 그가 묵인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 남자들 사이에서 마음이 통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분명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추측해낼 수 있었다.
  • 기정수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듯 갑자기 박하석 가까이로 다가가 궁금하게 물었다.
  • “하석 삼촌이 좋아하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어요?”
  •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 박하석이 엄숙하게 꾸짖었다.
  • 기정수는 실망스럽다는 듯 네 하고는 다시 술병을 들었다.
  • “제가 좋아하는 그 여자는 저랑 소꿉친구였어요. 안지 몇 년이나 됐는데 제가 본 여자들 중에서 웃는 게 제일 예쁜 여자예요. 예전에 학교에서 리그전을 할 때마다 찾아왔어요. 삼촌, 좋아하는 여자가 경기장 밖에서 내가 경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 그 느낌이 어떤지 알아요?”
  • 박하석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 “몰라.”
  • “저는 알아요, 그래서 그 여자를 아주 많이 사랑했어요. 그 긴 시간 동안의 감정이 어디 포기한다고 포기할 수 있는 거예요? 오늘 찾아가서 결혼하자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 말을 하기도 전에 그 여자가 저를 뿌리쳤어요. 저 정말 너무 괴로워요. 어떻게 해야 돼요...”
  • 그가 박하석의 소매를 잡고 간절하게 대답을 갈구했다.
  • 박하석은 행여나 소매에 흔적이라도 남을까 봐 손을 빼내어 소매를 툭툭 털더니 말했다.
  • “좋아하면 쫓아다녀. 정 안 되면 하나 바꾸면 되지. 어차피 이 세상에 여자는 많아.”
  • “하석 삼촌 말이 맞아요! 저 이렇게 포기할 수 없어요!”
  • 박하석의 말은 기정수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박하석과 술잔을 격하게 부딪치고 술을 들이켠 그가 물었다.
  • “맞다, 하석 삼촌이 좋아하는 사람 제가 아는 사람이에요?”
  • “몰라.”
  • 박하석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박하석의 대답을 들은 그가 의아하게 물었다.
  • “누구예요?”
  • “몰라.”
  • 박하석이 대답했다.
  • “하석 삼촌 또 농담하신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 기정수가 박장대소했다. 그렇게 웃던 그는 결국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바에 엎드려 잠들고 말았다.
  • 옆에 있던 직원이 기정수를 불렀지만 기정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계산서를 든 직원은 어쩔 바를 몰라 했다. 그런 직원을 한 눈 본 박하석은 우아하게 블랙카드를 꺼내고 말했다.
  • “제가 계산할게요.”
  • “네, 도련님.”
  • 직원이 웃으며 카드를 받아 들었다.
  • 술을 한 모금 마신 박하석의 눈 밑이 어두워졌다. 그는 확실히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가슴 앞에 자리 잡은 크지 않은 모반과 사람을 홀리는 목소리만 어렴풋하게 기억했다. 그것은 그동안 박하석의 꿈속을 맴돌며 사라지지도 잊히지도 않았다.
  • 진수영에 대해서 박하석은 늘 증오하는 느낌을 가졌다. 그녀는 너무 위선적이고 강한 목적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날 밤의 여자와는 완전히 달랐다.
  • 박하석도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 느낌을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 기정수를 기 씨 저택으로 데려다준 박하석은 호텔로 돌아갔다. 여전히 797번 방이었다. 그날 밤 이후, 박하석은 이 룸을 자신의 전용 룸으로 계약했다.
  • 이튿날 아침 일찍 박하석은 회사로 갔다. 차가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서려던 그때 그는 인도에서 걷고 있는 진서연을 보게 되었다.
  • 그녀는 금방 길가에서 아침으로 우유와 샌드위치를 샀다. 박하석은 그녀를 보곤 차 속도를 낮추었다. 그리고 진서연이 자신의 차 옆으로 지나갈 때 빵하고 경적을 울렸다.
  • 밖에 있던 진서연은 깜짝 놀라 안색이 바뀌었다. 빨대도 꽂지 못한 우유가 땅에 떨어진 모습을 본 그녀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잠시 후 진서연이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 “누구야, 양심 없는 놈!”
  • 차 안에 있던 남자가 섹시한 입꼬리를 올렸다. 차창을 올린 그는 차 속도를 올려 그곳을 떠났다.
  • “사과도 안 하고, 저 새끼가!”
  • 진서연은 화가 나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안타깝게 바닥의 우유병을 보던 그녀가 그것을 집어 들고 쓰레기통에 넣었다. 어젯밤 악덕 대표님에게 뜯긴 월급을 생각하던 진서연은 간절하게 쓰레기통 안의 우유를 바라봤다.
  • ‘참자!’
  • 그리고 고통스럽게 샌드위치를 먹으며 회사로 발을 들였다.
  • 동료들은 모두 자리에 도착했지만 진서연을 보자마자 멀리 피했다. 그리곤 먼 곳에서 그녀를 훔쳐보며 무언가를 수군거리고 있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진서연이 팀장님에게 다가가 물었다.
  • “오늘 왜 다들 저렇게 이상하게 구는 거예요?”
  • 팀장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웃으며 물었다.
  • “어젯밤에 박 대표님이랑 같이 나갔다면서요?”
  • 진서연은 팀장님의 웃음이 조금 무섭다는 생각을 하며 의아하게 물었다.
  • “그게 왜요?”
  • “나는 서연 씨랑 대표님이 그렇게 두터운 관계를 가지고 있는 줄 몰랐지. 그전에는 내가 잘못했어요. 서연 씨가 넓은 아량으로 나 좀 용서해 줘요.”
  • 팀장님은 인정하는 진서연을 보곤 환하게 웃었다. 상냥한 말투는 기본이었고 진서연에게 아부까지 떨었다.
  • 그 모습을 본 진서연이 얼떨떨하게 말했다.
  • “저 대표님 몰라요. 오해하셨어요.”
  • “그만 부인해요. 이 회사에 그렇게 오래 있는 동안 처음으로 여자를 자기 차에 태우는 걸 봤어요. 그 약혼녀 진수영도 이런 대우가 없었다고요.”
  • 팀장님은 그전까지만 해도 자기가 신인을 하나 잘랐다는 사실을 알고 대표님이 왜 그렇게까지 화를 낸 건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팀장님은 알게 되었다. 자신의 대표님이 아마도 진서연에게 마음을 품게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