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려던 진서연은 허미진에게 억지로 잡혔다. 허미진은 자신의 손에서 벗어나려는 진서연을 보자마자 화가 치밀어올라 테이블 위에 놓인 물컵을 진서연에게 집어던졌다. 다만 그 물컵이 진서연이 아닌 다른 쪽으로 갈 줄은 몰랐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물컵은 지나가던 아이를 명중했다. 일찍이 발견한 진서연이 달려가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진서연의 온몸은 젖었고 아이는 이마 위에 부어오른 큰 혹을 부여잡고 대성통곡했다.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호화로운 분위기를 가진 한 여자가 울음소리를 듣자마자 달려가 아이를 품속에 안고 가슴 아파하며 물었다.
“아가야, 누가 너를 이렇게 만든 거야!”
허미진은 한눈에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봤다. 그녀는 인천의 한 보석 상인의 아내였다! 그 여자의 미움을 살까 봐 두려웠던 허미진은 즉시 진서연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떻게 어린애를 이렇게 심하게 다치게 할 수 있어!”
여자는 진서연이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을 다치게 했다는 것을 듣고 화가 나서 진서연을 밀어냈다.
“꺼져, 내 딸 건드리지 마.”
진서연은 바닥에 주저앉아 창백해진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조성한 허미진은 옆에 서서 구경만 했다. 옆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진서연을 질책하기 시작했다.
진서연의 창백했던 얼굴이 드디어 정상적으로 돌아오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허미진을 바라봤다.
“당신이 아이한테 물컵을 던진 거잖아요.”
진서연의 말을 들은 허미진은 당황했다. 찔리는 구석이 있었던 허미진은 얼른 변명하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가 애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다치게 했을 리가 없잖아!”
말을 멈추었던 허미진이 다시 여자를 보며 말했다.
“이 사람이 당신 아이를 다치게 한 거예요. 그러고도 거짓말하고 있는 거 보세요, 이렇게 뻔뻔한 여자는 정말 처음 본다니까요!”
자신의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던 여자는 허미진의 말에 격노해서 진서연의 뺨을 때리며 말했다.
“사과해!”
레스토랑 안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허미진은 눈앞의 여자가 이렇게 거친 성격을 가졌을 줄 몰랐다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차갑게 웃은 허미진은 사람들 속에 모습을 감추고 레스토랑을 벗어나려 했다.
진서연은 허미진을 막으려고 했지만 여자가 진서연을 막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디 가려고! 사람을 때려놓고 도망가려는 거야? 경찰에 신고해서 너 감옥에 처넣을 거야!”
박하석이 어수선한 소리를 듣고 눈길을 돌렸을 때 아이는 이미 몇 명의 웨이터들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진서연을 욕하고 있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박하석의 섹시한 입술에 보일 듯 말 듯 한 귀찮음이 서려있었다. 오만하게 군주처럼 고고한 시선을 거둔 박하석은 VIP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따라간 전찬혁이 물었다.
“대표님, 가서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진서연 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저딴 불순한 마음을 가진 여자를 도와서 무얼 하려고.”
박하석의 목소리는 차갑고도 냉혹했다.
전찬혁이 생각해도 그랬다. 진서연은 왕 회장과 손을 잡고 대표님을 음해하려던 사람이니 좋은 사람이 아님이 분명했기에 지금 겪고 있는 것도 모두 자신이 초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표님 말이 맞아요. 그런데 저 아까 진수영 씨의 어머니를 본 것 같았어요.”
전찬혁의 말을 들은 박하석이 잘생긴 눈썹을 조금 치켜떴다.
“진수영?”
전찬혁이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지만 다른 사람이 그의 시선을 막았다. 그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진서연 씨랑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전찬혁의 중얼거림에 박하석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대표님, 왜 그러세요?”
전찬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들자마자 박하석의 잘생긴 얼굴에 드리운 암울함을 보게 되었다. 전찬혁은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얼른 해석했다.
“제가 잘못 본 것 같아요. 허미진 씨가 어떻게 진서연 씨를 알고 있겠어요. 제가 잘못 본 게 확실해요.”
전찬혁이 내뱉은 무심한 말이 박하석은 신경 쓰였다. VIP 룸에 앉은 그는 대충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진서연의 하얀 얼굴과 그날 밤 호텔에서 그녀가 내뱉은 신음 소리로 가득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소리였다!
6년 전 그 여자의 것과 매우 흡사했다!
“앞으로 그 여자 얘기 꺼내지 마.”
박하석의 기분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박하석의 말을 들은 전찬혁이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허미진 씨 말씀하시는 거예요?”
“진서연!”
박하석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생긴 얼굴에 드리운 차가움은 보기만 해도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놀란 전찬혁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진서연을 회사에 들여놓고 얘기를 꺼내지 말라고 하다니, 자신의 대표님께서는 무엇을 하려고 저러는 건지?
설마 진서연이 마음에 든 걸까?
전찬혁은 조금 난감해졌다.
“그럼 진서연 씨를 특별히 보살필 필요는 있을까요?”
박하석이 눈을 들었다. 날카로운 눈빛은 사람을 잡아먹을 듯했다. 전찬혁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진서연의 저 얼굴을 보는 것이 언짢은 것 같았다. 짜증도 나고 만나기로 했던 거래처가 지각을 하는 바람에 박하석은 인내심을 잃고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커피를 두고 몸을 일으켰다. 레스토랑 로비를 지나치며 진서연이 있던 곳에 눈길을 돌렸지만 그곳은 이미 텅 비어있었다.
“대표님, 물어봤는데 진서연 씨 남자친구가 대신 배상해 주고 사람을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웨이터에게서 정보를 얻어낸 전찬혁이 박하석에게 보고했다.
박하석의 사람을 얼려버릴 듯한 차가운 눈빛은 다시 한번 전찬혁으로 하여금 소름 돋게 만들었고 그는 얼른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쓸데없는 참견이야.”
박하석이 냉혹하게 말했다.
전찬혁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잘못했습니다.”
박하석이 콧방귀를 뀌더니 말했다.
“오후에 혼자 창고에서 일하라고 해.”
“네!”
전찬혁은 왠지 자신의 대표님이 질투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을 했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대표님이 그런 나쁜 여자를 위해서 질투를 할 리가 없지!’
......
레스토랑에서 나온 기정수는 진서연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을 하고 분노를 참고 있는 그 모습은 많은 행인들이 눈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진서연은 그 상황이 어색해 손을 비틀며 말했다.
“기정수, 이 손 놔.”
기정수는 성까지 붙여가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진서연의 목소리를 들으니 안색이 나빠졌다.
“예전에는 나 이렇게 안 불렀잖아.”
“그건 예전이고, 나한테 무슨 볼일 있어?”
진서연이 한걸음 물러서며 담담하게 기정수와 거리를 넓혔다.
기정수는 실망스러웠다. 씁쓸하게 웃은 그가 물었다.
“그렇게 나한테서 벗어나고 싶어?”
진서연은 입술을 깨물고 기정수의 뜨거운 눈빛을 외면했다.
“됐어, 강요 안 해.”
기정수는 한 걸음에 진서연 앞으로 다가가 따뜻한 손바닥으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많이 아팠지? 병원에 가보자.”
“필요 없어, 회사로 돌아가야 해. 방금 전 일은 고마웠어. 먼저 갈게.”
진서연은 기정수의 호의를 거절했다. 천우를 낳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과 기정수 사이에 다시 그 어떤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가능성이 없다면 계속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이러다간 서로에게 상처를 안겨줄 뿐이었다.
진서연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기정수의 눈빛에 자리한 고통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에 미친 듯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재운 그룹으로 미치다시피 달려간 진서연은 눈앞에 있는 이를 미처 확인하지도 않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순간 힘 있는 손바닥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엘리베이터 안의 온도는 순식간에 10 몇 도는 떨어졌다!
날카로운 눈빛이 머리 위에서 전해졌다. 진서연은 서둘러 사과를 하며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깊고도 어두운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진서연의 하얀 얼굴이 변했다. 감당하기 힘든 압박감에 진서연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는 자꾸만 어디선가 박하석을 만난 것 같았다. 놀란 그녀가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박하석은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당신...”
진서연의 심장은 긴장감에 속도를 가했다. 그때 박하석이 그녀의 턱을 잡더니 무례하게 얼굴을 들어 올렸다. 따뜻하고 거만한 숨이 살짝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