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랑 그 여자 고1 때 처음 만났어요. 제가 6년을 기다렸는데, 장장 6년을 기다렸는데. 그 6년 동안 매일 그 여자 생각만 했어요. 저는 걔가 돌아오는 것만 기다리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이제 보니 다 제 착각인 것 같아요...”
기정수가 씁쓸하게 웃더니 대답했다.
“하석 삼촌, 삼촌도 이런 제가 웃기죠.”
박하석은 깊은 눈에 감정을 숨긴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기정수 옆으로 다가가 그의 옆자리를 잡고 안더니 위스키 한 잔을 주문했다.
“하석 삼촌도 마시려고요? 이런 곳에서 술 마시는 거 안 좋아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기정수가 의아하게 흠잡을 데 없이 잘생긴 남자의 옆모습을 보며 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박하석은 우아하게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도수가 꽤 높았지만 맛은 그나마 괜찮았기에 그는 한입에 털어 넣었다. 깔끔하고 품위 있는 그의 모습은 근처에 있던 많은 여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대박, 정말 잘생겼어!”
“어떻게 저렇게 잘생긴 남자가 있지, 전화번호를 알고 싶어!”
두 여자가 박하석에게 반한 듯 소리를 질렀다. 어떤 사람은 주동적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지만 박하석의 날카로운 눈빛에 놀라 연신 물러서곤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기정수는 웃으며 테이블 위에 엎드리더니 넋을 놓고 박하석을 바라봤다.
“하석 삼촌,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말해.”
박하석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정수가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하석 삼촌도 마음에 품고 있는 여자가 있는 거죠?”
술잔을 잡은 박하석의 손이 잠깐 굳었다. 하지만 그는 곧 섹시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왜 그렇게 말하는 건데?”
“재운 그룹의 대표님이잖아요. 인천에서는 거의 원하는 대로 다 이룰 수 있잖아요. 그런 삼촌이 무슨 여자인들 못 찾겠어요? 그런데 왜 아직도 솔로예요?”
그리고 박하석은 얼굴까지 특출나게 잘생겼다. 집에서도 그렇게 급하게 재촉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질질 끌고 있는 건지.
비록 몇 년 동안 박하석의 옆을 계속 지키고 있던 사람은 진수영이었지만 기정수는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박하석은 단지 진수영을 도와주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 진수영을 좋아한다면 6년이나 질질 끌면서 결혼도 안 하지는 않았겠죠. 그래서 삼촌도 마음에 다른 여자를 품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 말이 맞죠?”
박하석은 정곡을 찔렸다. 침묵을 지키는 그의 담담한 잘생긴 얼굴에서 그 어떤 이상함도 보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기정수는 그가 묵인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들 사이에서 마음이 통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분명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추측해낼 수 있었다.
기정수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듯 갑자기 박하석 가까이로 다가가 궁금하게 물었다.
“하석 삼촌이 좋아하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어요?”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박하석이 엄숙하게 꾸짖었다.
기정수는 실망스럽다는 듯 네 하고는 다시 술병을 들었다.
“제가 좋아하는 그 여자는 저랑 소꿉친구였어요. 안지 몇 년이나 됐는데 제가 본 여자들 중에서 웃는 게 제일 예쁜 여자예요. 예전에 학교에서 리그전을 할 때마다 찾아왔어요. 삼촌, 좋아하는 여자가 경기장 밖에서 내가 경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 그 느낌이 어떤지 알아요?”
박하석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몰라.”
“저는 알아요, 그래서 그 여자를 아주 많이 사랑했어요. 그 긴 시간 동안의 감정이 어디 포기한다고 포기할 수 있는 거예요? 오늘 찾아가서 결혼하자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 말을 하기도 전에 그 여자가 저를 뿌리쳤어요. 저 정말 너무 괴로워요. 어떻게 해야 돼요...”
그가 박하석의 소매를 잡고 간절하게 대답을 갈구했다.
박하석은 행여나 소매에 흔적이라도 남을까 봐 손을 빼내어 소매를 툭툭 털더니 말했다.
“좋아하면 쫓아다녀. 정 안 되면 하나 바꾸면 되지. 어차피 이 세상에 여자는 많아.”
“하석 삼촌 말이 맞아요! 저 이렇게 포기할 수 없어요!”
박하석의 말은 기정수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박하석과 술잔을 격하게 부딪치고 술을 들이켠 그가 물었다.
“맞다, 하석 삼촌이 좋아하는 사람 제가 아는 사람이에요?”
“몰라.”
박하석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박하석의 대답을 들은 그가 의아하게 물었다.
“누구예요?”
“몰라.”
박하석이 대답했다.
“하석 삼촌 또 농담하신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기정수가 박장대소했다. 그렇게 웃던 그는 결국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바에 엎드려 잠들고 말았다.
옆에 있던 직원이 기정수를 불렀지만 기정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계산서를 든 직원은 어쩔 바를 몰라 했다. 그런 직원을 한 눈 본 박하석은 우아하게 블랙카드를 꺼내고 말했다.
“제가 계산할게요.”
“네, 도련님.”
직원이 웃으며 카드를 받아 들었다.
술을 한 모금 마신 박하석의 눈 밑이 어두워졌다. 그는 확실히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가슴 앞에 자리 잡은 크지 않은 모반과 사람을 홀리는 목소리만 어렴풋하게 기억했다. 그것은 그동안 박하석의 꿈속을 맴돌며 사라지지도 잊히지도 않았다.
진수영에 대해서 박하석은 늘 증오하는 느낌을 가졌다. 그녀는 너무 위선적이고 강한 목적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날 밤의 여자와는 완전히 달랐다.
박하석도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 느낌을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기정수를 기 씨 저택으로 데려다준 박하석은 호텔로 돌아갔다. 여전히 797번 방이었다. 그날 밤 이후, 박하석은 이 룸을 자신의 전용 룸으로 계약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박하석은 회사로 갔다. 차가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서려던 그때 그는 인도에서 걷고 있는 진서연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금방 길가에서 아침으로 우유와 샌드위치를 샀다. 박하석은 그녀를 보곤 차 속도를 낮추었다. 그리고 진서연이 자신의 차 옆으로 지나갈 때 빵하고 경적을 울렸다.
밖에 있던 진서연은 깜짝 놀라 안색이 바뀌었다. 빨대도 꽂지 못한 우유가 땅에 떨어진 모습을 본 그녀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잠시 후 진서연이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누구야, 양심 없는 놈!”
차 안에 있던 남자가 섹시한 입꼬리를 올렸다. 차창을 올린 그는 차 속도를 올려 그곳을 떠났다.
“사과도 안 하고, 저 새끼가!”
진서연은 화가 나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안타깝게 바닥의 우유병을 보던 그녀가 그것을 집어 들고 쓰레기통에 넣었다. 어젯밤 악덕 대표님에게 뜯긴 월급을 생각하던 진서연은 간절하게 쓰레기통 안의 우유를 바라봤다.
‘참자!’
그리고 고통스럽게 샌드위치를 먹으며 회사로 발을 들였다.
동료들은 모두 자리에 도착했지만 진서연을 보자마자 멀리 피했다. 그리곤 먼 곳에서 그녀를 훔쳐보며 무언가를 수군거리고 있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진서연이 팀장님에게 다가가 물었다.
“오늘 왜 다들 저렇게 이상하게 구는 거예요?”
팀장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웃으며 물었다.
“어젯밤에 박 대표님이랑 같이 나갔다면서요?”
진서연은 팀장님의 웃음이 조금 무섭다는 생각을 하며 의아하게 물었다.
“그게 왜요?”
“나는 서연 씨랑 대표님이 그렇게 두터운 관계를 가지고 있는 줄 몰랐지. 그전에는 내가 잘못했어요. 서연 씨가 넓은 아량으로 나 좀 용서해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