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도 힘들었어. 우린 그냥 약혼했을 뿐, 진짜 결혼하진 않았으니까. 그래서 집안에서 너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이 년간, 난 이 가문에서 너무 많은 일을 겪었어. 네 존재로 인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항상 나를 따라왔어.”
그녀의 말에 임성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오랫동안 잠들었던 마음에 한줄기 온기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의부 이중구가 전에 그런 말을 했었다. 네가 가장 빛날 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전부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네가 보잘것없는 신세가 되었을 때, 네 옆에 남아 함께 해주는 사람은 반드시 진실한 인연이라고.
지금의 임성준은 꼬리가 끊어진 용과 다름없이 두 다리 불구인 바보가 되어버렸다.
진유월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것 역시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임성준은 워낙 이제 깨어났으니 진씨 가문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유월의 말을 듣자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원수는 반드시 갚고 은혜는 배로 돌려준다. 그것이 임성준의 일생 준칙이었으니까.
떠나더라도 진유월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사실 난 많은 걸 원하지 않아. 그냥 내 곁에서 함께 가족을 이루고 가정을 받쳐줄 수 있는 사람이 있길 바랐어. 나도... 남편이랑 함께 쇼핑도 가고 힘들 때 남편 어깨에 기대고 싶고 어려움이 있으면 나를 위해 나서주길 바랐어.”
진유월이 코를 훌쩍이며 천천히 임성준의 다리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는 오랫동안 참아왔던 감정을 오늘만큼은 참기 어려웠다.
“슥.”
이때, 진유월은 누군가 자기 손을 잡는 느낌이 들어 화들짝 머리를 들었다. 그때 마침 임성준의 강인한 눈빛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 순간, 이유를 알 순 없었으나 진유월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남은 인생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도... 너 진유월은 내게 유일한 여자야.”
갑작스러운 한 마디에 진유월은 머리가 어질거렸다.
잠시 후, 진유월이 임성준의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확 일어났다.
그녀는 놀란 한편 화가 났다.
임성준이 이미 의식을 회복했다는 것이 놀라웠고 자신이 그 앞에서 심경을 쏟아냈다는 사실에 부끄러우면서 화가 났다.
“이미 정신 차렸으면서 오해 날 속인 거야? 너...”
진유월은 울음을 터트릴듯한 두 눈으로 임성준을 노려봤다.
“난 널 속인 적 없어. 조금 전 갓 의식이 되돌아왔을 뿐이야.”
임성준은 몹시 진지한 어조로 진유월을 향해서 말했다.
“너... 너 날 속이고 있는 거야!”
마음속이 혼란스러웠던 진유월은 조금 전 자신이 늘어놓은 말 때문에 창피하기까지 하여 씩씩거리며 뒤돌아서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임성준은 휠체어에 앉아 따스한 햇빛을 받으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2년간 바보로, 폐인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그 2년간... 그녀는 곁에 한결같이 남아서 그를 보살펴줬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전장의 수령관으로서 그에게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기세등등한 칠척의 사내대장부일지라도 사랑 앞에선 약해질 수 있었다.
진유월의 정을 절대 저버릴 수 없다.
“자, 이건 네게 주는 거야.”
얼마 후, 진유월이 왔다 갔다 하더니 임성준에서 상자 하나를 던져줬다.
“나를 위해 헌신한 모든 것이 헛되게 하지 않을 거야. 우리가 결혼을 약속하기만 했다 말했었지? 만약 할 수 있다면, 너에게 성대한 결혼식을 돌려주고 싶어.”
임성준이 상자를 받아들고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진유월을 바라봤다.
“우선 생각해 봐. 네가 지금 뭘 할 수 있는지.”
진유월은 전처럼 싸늘하고 도도하던 모습으로 돌아와 담담한 눈빛으로 임성준을 바라보며 말하다 그의 두 다리를 흘긋 봤다.
임성준이 의식을 되찾았다고 해도 그는 현재 여전히 다리를 쓸 수 없었다!
“나에게... 시간을 좀 줘.”
임성준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더니 낮게 한탄하며 말했다.
“난 이미 너에게 2년이라는 시간을 줬어.”
진유월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녀는 단지 출근했다가 임성준의 산책을 위해 일부러 휴가를 내고 돌아왔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 다시 출근하러 떠나야 했다.
“나를 2년간 보살펴주었으니 내가 네 남은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줄 거야!”
임성준은 떠나는 진유월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자그마한 나무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 속엔 평범한 은행 카드 한 장, 은침과 잡다한 물건들이 있었다.
“윤상현이 내게 이것들을 가져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니. 뜻밖이네.”
혼잣말하며 그가 은침을 뽑아 들었다.
그는 바지를 사이에 두고 아홉 개의 은침을 두 다리의 혈자리에 신속하게 꽂아 넣었다.
“딱!”
임성준이 손가락을 튕기자 아홉 개의 은침이 진동하며 마치 물길이 흐르는 듯한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와 동시에 따듯한 기운이 그의 두 다리에 끊임없이 일렁였다.
혈액이 빠르게 순환하고 있었고 오래전 사라진 힘이 점차 회복하고 있었다.
임성준은 전장에서 적수를 만난 적 없는 가장 어린 구성 총사령관으로서 그는 어려서부터 기막힌 기억력을 자랑했으며 은침 의술은 신의 경지에 다다랐다.
얼마 후, 그가 두 손바닥으로 다리를 슥 훑었다.
그러자 아홉 개의 은침이 천천히 그의 손에 다시 돌아갔으며 그가 다시 상자 안에 넣어두었다.
지금 그의 상태로 길어서 일주일이 지나면 완벽히 회복할 수 있었다.
그때가 되어야 그는 진정한 임 수령관이 될 수 있다.
이 세상에 더는 그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자가 없을 것이다.
임성준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 막연함이 묻어났다.
“진씨 가문의 은혜는 반드시 갚을 거야. 하지만 진씨 가문이 준 모욕 역시 되돌려 줄 거야. 나 임성준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을 거야.”
정원 가운데서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의지가 엿보였다.
...
호텔 안.
조권용과 오희연이 뭔가 의논하고 있었다.
“이모, 그 임성준이 대체 뭐하던 놈일까요? 왜 전 그놈이 보통이 아닌 것 같죠?”
조권용이 미간을 찌푸리며 임성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약간 두려운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보통이 아니긴 무슨? 보잘것없는 퇴역 군인일 뿐이야. 애초 난 진씨 어르신이 무슨 정신으로 유월을 그에게 시집보내려 한건지 지 모르겠어! 그나마 다행인 건 약혼만 결정하고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진작 진씨 가문의 얼굴에 먹칠하고 웃음거리가 됐겠지!”
오희연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임성준을 생각하면 속에서 화가 끓었다.
“저희 가문에서 모은 소식에 따르면 약 삼 년 전 서북 부대에 임씨 성을 가진 총사령관이 있었는데 당시 부대에서 가장 젊은 총사령관이었다고 해요. 그 시대를 풍미하고 싸우는 족족 승리한 천하의 영웅이었죠. 혼자서 천하를 평정하니 용맹한 나라의 영웅이라 불렸다고 해요. 설마 임성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