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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넌 내게 유일해

  • “사실 나도 힘들었어. 우린 그냥 약혼했을 뿐, 진짜 결혼하진 않았으니까. 그래서 집안에서 너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이 년간, 난 이 가문에서 너무 많은 일을 겪었어. 네 존재로 인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항상 나를 따라왔어.”
  • 그녀의 말에 임성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오랫동안 잠들었던 마음에 한줄기 온기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 의부 이중구가 전에 그런 말을 했었다. 네가 가장 빛날 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전부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네가 보잘것없는 신세가 되었을 때, 네 옆에 남아 함께 해주는 사람은 반드시 진실한 인연이라고.
  • 지금의 임성준은 꼬리가 끊어진 용과 다름없이 두 다리 불구인 바보가 되어버렸다.
  • 진유월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것 역시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 임성준은 워낙 이제 깨어났으니 진씨 가문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진유월의 말을 듣자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 원수는 반드시 갚고 은혜는 배로 돌려준다. 그것이 임성준의 일생 준칙이었으니까.
  • 떠나더라도 진유월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 “사실 난 많은 걸 원하지 않아. 그냥 내 곁에서 함께 가족을 이루고 가정을 받쳐줄 수 있는 사람이 있길 바랐어. 나도... 남편이랑 함께 쇼핑도 가고 힘들 때 남편 어깨에 기대고 싶고 어려움이 있으면 나를 위해 나서주길 바랐어.”
  • 진유월이 코를 훌쩍이며 천천히 임성준의 다리에 머리를 기댔다.
  • 그녀는 오랫동안 참아왔던 감정을 오늘만큼은 참기 어려웠다.
  • “슥.”
  • 이때, 진유월은 누군가 자기 손을 잡는 느낌이 들어 화들짝 머리를 들었다. 그때 마침 임성준의 강인한 눈빛을 마주하게 되었다.
  • 그 순간, 이유를 알 순 없었으나 진유월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 “남은 인생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도... 너 진유월은 내게 유일한 여자야.”
  • 갑작스러운 한 마디에 진유월은 머리가 어질거렸다.
  • 잠시 후, 진유월이 임성준의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확 일어났다.
  • 그녀는 놀란 한편 화가 났다.
  • 임성준이 이미 의식을 회복했다는 것이 놀라웠고 자신이 그 앞에서 심경을 쏟아냈다는 사실에 부끄러우면서 화가 났다.
  • “이미 정신 차렸으면서 오해 날 속인 거야? 너...”
  • 진유월은 울음을 터트릴듯한 두 눈으로 임성준을 노려봤다.
  • “난 널 속인 적 없어. 조금 전 갓 의식이 되돌아왔을 뿐이야.”
  • 임성준은 몹시 진지한 어조로 진유월을 향해서 말했다.
  • “너... 너 날 속이고 있는 거야!” 
  • 마음속이 혼란스러웠던 진유월은 조금 전 자신이 늘어놓은 말 때문에 창피하기까지 하여 씩씩거리며 뒤돌아서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 임성준은 휠체어에 앉아 따스한 햇빛을 받으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 2년간 바보로, 폐인으로 살아왔다. 
  • 하지만 그 2년간... 그녀는 곁에 한결같이 남아서 그를 보살펴줬다.
  • 피도 눈물도 없는 전장의 수령관으로서 그에게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 기세등등한 칠척의 사내대장부일지라도 사랑 앞에선 약해질 수 있었다.
  • 진유월의 정을 절대 저버릴 수 없다.
  • “자, 이건 네게 주는 거야.”
  • 얼마 후, 진유월이 왔다 갔다 하더니 임성준에서 상자 하나를 던져줬다.
  • “나를 위해 헌신한 모든 것이 헛되게 하지 않을 거야. 우리가 결혼을 약속하기만 했다 말했었지? 만약 할 수 있다면, 너에게 성대한 결혼식을 돌려주고 싶어.”
  • 임성준이 상자를 받아들고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진유월을 바라봤다.
  • “우선 생각해 봐. 네가 지금 뭘 할 수 있는지.”
  • 진유월은 전처럼 싸늘하고 도도하던 모습으로 돌아와 담담한 눈빛으로 임성준을 바라보며 말하다 그의 두 다리를 흘긋 봤다.
  • 임성준이 의식을 되찾았다고 해도 그는 현재 여전히 다리를 쓸 수 없었다!
  • “나에게... 시간을 좀 줘.”
  • 임성준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더니 낮게 한탄하며 말했다.
  • “난 이미 너에게 2년이라는 시간을 줬어.”
  • 진유월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 그녀는 단지 출근했다가 임성준의 산책을 위해 일부러 휴가를 내고 돌아왔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 다시 출근하러 떠나야 했다.
  • “나를 2년간 보살펴주었으니 내가 네 남은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줄 거야!”
  • 임성준은 떠나는 진유월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자그마한 나무 상자를 열어보았다.
  • 그 속엔 평범한 은행 카드 한 장, 은침과 잡다한 물건들이 있었다.
  • “윤상현이 내게 이것들을 가져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니. 뜻밖이네.”
  • 혼잣말하며 그가 은침을 뽑아 들었다. 
  • 그는 바지를 사이에 두고 아홉 개의 은침을 두 다리의 혈자리에 신속하게 꽂아 넣었다.
  • “딱!”
  • 임성준이 손가락을 튕기자 아홉 개의 은침이 진동하며 마치 물길이 흐르는 듯한 형상을 만들어냈다.
  • 그와 동시에 따듯한 기운이 그의 두 다리에 끊임없이 일렁였다.
  • 혈액이 빠르게 순환하고 있었고 오래전 사라진 힘이 점차 회복하고 있었다.
  • 임성준은 전장에서 적수를 만난 적 없는 가장 어린 구성 총사령관으로서 그는 어려서부터 기막힌 기억력을 자랑했으며 은침 의술은 신의 경지에 다다랐다.
  • 얼마 후, 그가 두 손바닥으로 다리를 슥 훑었다.
  • 그러자 아홉 개의 은침이 천천히 그의 손에 다시 돌아갔으며 그가 다시 상자 안에 넣어두었다.
  • 지금 그의 상태로 길어서 일주일이 지나면 완벽히 회복할 수 있었다.
  • 그때가 되어야 그는 진정한 임 수령관이 될 수 있다.
  • 이 세상에 더는 그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자가 없을 것이다.
  • 임성준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 막연함이 묻어났다.
  • “진씨 가문의 은혜는 반드시 갚을 거야. 하지만 진씨 가문이 준 모욕 역시 되돌려 줄 거야. 나 임성준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을 거야.”
  • 정원 가운데서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의지가 엿보였다.
  • ...
  • 호텔 안.
  • 조권용과 오희연이 뭔가 의논하고 있었다.
  • “이모, 그 임성준이 대체 뭐하던 놈일까요? 왜 전 그놈이 보통이 아닌 것 같죠?”
  • 조권용이 미간을 찌푸리며 임성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약간 두려운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보통이 아니긴 무슨? 보잘것없는 퇴역 군인일 뿐이야. 애초 난 진씨 어르신이 무슨 정신으로 유월을 그에게 시집보내려 한건지 지 모르겠어! 그나마 다행인 건 약혼만 결정하고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진작 진씨 가문의 얼굴에 먹칠하고 웃음거리가 됐겠지!” 
  • 오희연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임성준을 생각하면 속에서 화가 끓었다.
  • “저희 가문에서 모은 소식에 따르면 약 삼 년 전 서북 부대에 임씨 성을 가진 총사령관이 있었는데 당시 부대에서 가장 젊은 총사령관이었다고 해요. 그 시대를 풍미하고 싸우는 족족 승리한 천하의 영웅이었죠. 혼자서 천하를 평정하니 용맹한 나라의 영웅이라 불렸다고 해요. 설마 임성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