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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사기당한 기분

  • “응? 뭐가 곧인데?”
  • 허지범은 순간 황당해하고 있었다.
  • 가연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두 사람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허지신을 바라보았다.
  • 허지신은 입을 꾹 다물고, 마치 방금 말을 꺼낸 사람이 자신이 아닌 것처럼 냉정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 그는 다른 사람이 착각이 들 정도로 무심했다.
  • 그러나 허지범은 이내 흥분으로 가득 찼다.
  • “형, 형!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지? 방금 결혼한다고 말한 거야?”
  • 허지신은 차가운 눈빛으로 대답했다.
  • “잘못 들었어.”
  • “아니야, 아니야! 똑똑히 들었어! 절대 잘못 들을 리가 없어! 가연, 너도 들었지? 형이 방금 곧이라고 했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내가 떠난 지 며칠이라고, 곧이라니….”
  • 허지범은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 이 소식은 그에게 가히 충격적이었다.
  • 그의 형은 바로 그 허지신이었다.
  • 허지신은 승려보다 금욕을 더 철저히 지켰고, 최X제를 먹는다고 해도 과연 반응할까 말까 하는 사람이었다!
  • 그런 사람이 곧 결혼한다고 했다!
  • “누구야? 형이 쫓아다니는 사람이 누군데? 어느 집 따님이야? 어떻게 생겼어? 예뻐? 몸매 좋아?”
  • 이 시각, 허 씨네 둘째 도련님은 마치 자식의 결혼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아버지처럼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 허지신은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우아한 몸짓으로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 허 씨네 둘째 도련님은 구미가 당기는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 한 채 형에게 굴복을 선언했다.
  • “형, 착한 형아. 오후 업무랑 저녁 식사 자리에 형 대신 참석할 테니, 그 여자가 누구인지만 알려줘, 어때?”
  • 허지신은 시끄러운지 얼굴이 굳은 채 말했다.
  • “나가!”
  • “안 가! 아직 누구인지 안 알려줬잖아! 얘기하다 마는 사람이 어디 있어, 괜히 입맛만 다시게. 형, 그렇게 양심 없는 거 아니야.”
  • 허지범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면 당장이라도 생떼를 부리려는 기세를 취하고 있었다.
  • 허지신은 위협적인 어조로 말했다.
  • “3개월 동안 아프리카에 다시 가고 싶어?”
  • 허지범은 목이 메어 울상이 되었다.
  • 그는 이건 반칙이라고 생각했다.
  • 허지신은 그의 호기심을 한껏 불러일으키고는 더 폭로하지 않았다. 허지범은 궁금증에 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넘길 것이다!
  • ……
  • 연꽃 아파트.
  • 특별사면으로 인해 출근할 필요가 없게 된 강서서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서 신이를 돌보고 있었다.
  • 꼬마는 착하기만 했고, 꼬리처럼 강서서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 저녁 무렵, 강서서는 그가 지루하다고 느낄까 봐, 산책 겸 장 보러 나가 식자재를 한가득 사 들고 돌아왔다. 그녀는 저녁 만찬을 준비해서 이 꼬마를 배불리 먹일 계획이었다.
  • 그녀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 허지신은 그녀의 소파에서 계속 자진 않을 것이며, 신이도 이곳에 쭉 머물러 있진 않을 것이다.
  • 그녀는 비록 속으로 신이가 떠나는 게 서운하긴 했지만, 강서서도 이 모든 것은 결국 기묘한 만남에 불과했고,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결국 아무 상관 없는 남남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늦은 저녁, 허지신은 예정대로 도착했다.
  • 강서서 또한 크게 놀라지 않고, 허지신을 집안으로 안내했다.
  • “저녁 식사가 다 준비되었어요. 허지신 씨만 괜찮으시다면 식사 끝내고, 신이를 데리고 가도 돼요.”
  • 허지신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당연히 괜찮죠. 신이 옷을 좀 챙겨왔어요.”
  • 강서서는 순간 넋이 나간 채, 그가 뱉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 허지신이 물었다.
  • “신이가 이곳을 떠나기 싫어하는 거 같은데, 마침 제가 오늘 여기에 온 목적도 강서서 씨랑 상의하려는 것이었어요. 혹시 신이가 계속 이곳에서 지낼 수 있게 허락해줄 수 있나요?”강서서는 충격을 받았다.
  •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 비록 그녀는 신이를 예뻐했지만, 온종일 그를 돌봐 줄 순 없는 노릇이다.
  •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허지신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 “비록 이런 부탁이 당신에게 큰 실례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강서서 씨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사실 신이가 약간 자폐적인 경향이 있어요. 평소에는 전혀 티가 안 나지만, 화가 나면 방에 틀어박혀 물건을 집어 던지는 습관이 있죠. 심지어 자신을 다치게까지 해요. 예전에 심리치료사에게 상담도 받아 보고, 꼼꼼하게 보살펴 주기도 했지만, 아직 완치는 불가능하더라고요. 과거에 신이는 누구를 특별히 따른 적이 없었지만, 현재 당신한테만 유독 호감을 느끼고 있어서 부득이하게 이런 부탁을 하게 되었어요.”
  • 강서서는 이 말을 듣고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 그녀는 신이가 이런 증상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 신이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는 허지신이 자신을 속이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 하지만 돌이켜 보면, 설령 그녀를 속인다고 쳐도 그한테 좋은 점은 없었다. 오히려, 오늘 아침에는 신이 때문에 2천만 원의 보너스까지 탔다.
  • 여기까지 생각한 강서서는 딱히 거부하지 않았다.
  • “저랑 신이는 알게 된 지 이틀도 안 돼요. 저는 신이에게 큰 영향력을 주는 존재는 안 될 거예요. 하지만…. 신이를 이곳에 머무르게 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에요. 다만 낮에는 출근해야 하니까 진짜 안 돼요.”
  • “당연하죠.”
  • 목표 달성이 눈앞까지 다가오자 허지신은 만족스러웠고, 바로 화제를 돌렸다.“저녁 식사가 다 됐나요? 배가 좀 고프네요.”
  • “네? 네. 다 됐어요. 밥 차리러 갈게요.”
  • 강서서는 말을 마치고 나서야, 어딘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그녀는 마치 집으로 돌아온 남편을 맞이하는 기분이 들었다.
  • 강서서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이런 생각이 든 자신한테 깜짝 놀랐다. 그녀는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생각이 들 수 없다며 겁이 나기 시작했다.
  •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그녀는 허지신이 빨리 떠날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 그러나 하나님은 그녀의 기도를 비웃기라도 하듯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그칠 기마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 강서서는 울적하게 창밖을 내다보았고, 눈빛은 우울함으로 가득 찼다.
  • 허지신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말했다.
  • “강서서 씨, 별일 없으면 저는 먼저 가볼게요. 신이를 부탁해요.”
  • “네? 지금 간다고요? 비가 아직 안 그쳤는데요.”
  • 강서서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깜짝 놀랐다.
  • 허지신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 “일기 예보에 따르면, 오늘 밤 폭우가 계속될 것이며 당분간은 그칠 것 같지 않아요. 시간도 늦었으니 더는 폐를 끼칠 수가 없어요.”
  • 강서서는 이 말을 듣고 망설이기 시작했다.
  • 이런 날씨에 운전하는 것은 위험한 짓이다.
  • 만약 무슨 사고라도 당하면, 그녀는 차마 감당할 수가 없었다.
  • “혹시…. 당신만 괜찮다면, 소파에서 하룻밤만 더 묵으세요.”
  • 그녀는 다소 어색한 듯 말했다.
  • 허지신의 눈가에는 웃음기가 스쳐 갔다.
  • “그럼 실례할게요.”
  • 그는 거절조차 하지 않았다.
  • 강서서는 왠지 모르게 사기당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