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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한 여자에게 끌리다

  • 5년 만에 그들을 다시 마주했다. 아무렇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그들을 눈앞에서 본 서서는 뼛속 깊이 있었던 증오가 다시 올라왔고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 그리고 마치 어제 일처럼 그 일들이 떠올랐고 지독했던 강청청의 말이 떠올랐다.
  • “너희 엄마 산소마스크, 내가 벗겼어.”
  • “강서서, 너 부숴버릴 거야!”
  • “아버지도, 강씨가문 재산도 군호 오빠도 다 내 것이야, 그리고 너는 이 집안에서 버려진 사람이고…”
  •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도 또렷하게 떠올랐다.
  • 강서서는 머리가 아파져 왔고 그들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순간 바로 탕비실 안으로 몸을 숨겼다.
  • 그러나 눈치 빠른 강청청은 익숙한 그림자를 보고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 “방금 저기 혹시…?”
  • “응? 무슨 일 있어?”
  • 남군호는 이승문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그녀의 말을 듣고 바로 고개를 돌렸다.
  • 그러자 강청청은 고개를 저으며 웃으면서 말했다.
  • “아니야, 잘못 본 것 같아.”
  •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결코 잘못 보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 강서서…귀신이 되어도 알아볼 수 있지.
  •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 그제야 강서서는 탕비실 안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여전히 화난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 바로 그때 핸드폰이 알림이 울렸다.
  • 핸드폰을 보니 문자가 한 통 와있었다.
  • 그녀는 문자를 확인해보니 신이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음성메시지를 보냈다.
  • “서서 이모, 나 아빠랑 회사 왔어.”
  • 서서는 순간 가슴이 따뜻해졌다. 화가 났던 마음은 얼음이 따뜻한 햇볕에 녹는 것처럼 바로 사라졌다.
  • 그녀는 입꼬리가 올라갔고 웃으면서 답장을 해주었다.
  • “그래요, 착한 꼬마 도련님, 아빠 말씀 잘 듣고요.”
  •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신이의 애교 섞인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조차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불만스럽게 아빠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 “오늘 저녁 서서 이모네로 정말 안 가요?”
  • “응.”
  • 허지신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 “할어버지랑 할머니가 이따가 너 데리러 올 거야!”
  • 신이는 계속 물었다.
  • “그러면 서서 이모를 우리 집에 오라고 하면 되잖아요!”
  • 허지신은 서류를 넘기다 순간 멈칫하고는 말했다.
  • “아직은, 안돼.”
  • 신이는 토라지면서 핸드폰을 던졌고 흥 하면서 소파에서 내려와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 “아빠 미워! 작은 아빠한테 갈 거야!”
  • 허지신은 대꾸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단지 소파 위에 버려진 그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 핸드폰을 들어 다시 음성메시지를 눌렀다.
  • 그리고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면서 왠지 모를 따뜻한 느낌을 받았다.
  • 그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고 강서서의 SNS를 들어가 보았다.
  • 그녀의 공간에는 게시물이 몇 개 밖에 없었다.
  • 음식 사진, 입사 후 기뻤던 순간을 기록한 것 그리고 혼자 쇼핑을 즐기는 모습, 쇼윈도 밖에서 본 사고 싶었던 물건들 정도였다.
  • 사진 속의 그녀는 너무도 해맑게 웃고 있었지만 늘 혼자였다.
  • 허지신은 그녀의 사진들을 보고 가슴이 쓰려왔다.
  • 그는 남들의 인생에 털끝 만큼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너무도 궁금하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
  • 단 한 번도 이런 감정을 가져 본 적이 없다.
  • 바로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 그는 핸드폰을 끄고 다시 차갑게 말했다.
  • “들어와.”
  • 문이 열리고 금테 안경을 쓴 기품 있는 남자가 걸어들어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시작했다.
  • “무슨 일인데 이렇게 급하게 불러?”
  • “일이 있어서 불렀지.”
  • 허지신은 그를 소파에 앉히고 가연에게 커피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 심모백은 아무렇지도 않게 소파에 털썩 앉고는 불만을 털어냈다.
  • “어제 환자들 때문에 한숨도 못 자고 아침에 겨우 누었는데, 큰일 아니기만 해봐! 가만 안 둔다!”
  • 허지신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맞은편에 앉은 뒤 한참 머뭇거리다가 말을 시작했다.
  • “나…어떤 여자가 끌려.”
  • 심모백은 멍해졌고 한동안 굳어있었다.
  • 한참 지난 뒤에야 그는 정신을 차리면서 흥분했다.
  • “정말? 어떤 여잔데? 정말이야? 내가 아는 사람이야?”
  • 허지신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 “오늘 오라고 한 건 네 진단이 필요해서야! 너랑 수다 떨 생각 없어.”
  • 심모백도 자신이 너무 들떠 있는 것을 느끼고 목을 가다듬고는 바로 진지하게 말했다.
  • “그 말인 즉 너는 게이가 아니고 무성욕자도 아니라는 말이네. 그냥 관심이 없는 여자한테 성적인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거였어. 하지만 관심이 가는 여자한테는 느껴진다는 말이지…하하하, 그 여자 복도 많네! 이렇게 일편단심인 남자가 좋아하니 말이야!”
  • “그래서, 이거 괜찮은 거야?”
  • 허지신은 그를 흘겨봤다.
  • 심모백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 “당연하지, 전에는 너한테 다른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깐 멀쩡하네. 신체 기능도 정상이고 심리 측면에도 문제없고. 지금까지 나는 나를 의심했다니깐 내가 부족한 줄 알고!”
  • 허지신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 “괜찮은 거면 그럼 너 이제 가.”
  • 심모백은 날뛰면서 소리쳤다.
  • “야! 방금 왔어! 커피도 한잔 못 했고! 이렇게 쫓아낸다고? 그래도 커피 한잔하고 정신은 좀 차리게 하고 보내야지! 돌아가는 길에 졸다가 교통사고라도 나면 어떡하냐?”
  • 허지신은 웃으면서 화제를 돌렸다.
  • “요즘 우리 아들도 많이 좋아진 것 같아.”
  • “오? 어떻게?”
  • 심모백이 물었고 허지신이 대답했다.
  • “방금 말한 그 여자 덕분에.”
  • 심모백은 깜짝 놀라 하면서 말했다.
  • “정말이야? 혹시 그 여자가 네 아들 생모 아니야?”
  • 심모백도 그냥 한번 해본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허지신은 바로 부정했다.
  • “그럴 리가 없어.”
  • “어떻게 확신하는데?”
  • 심모백은 계속 따져 물었다.
  • “너 몇 년 전에 잤던 그 여자한테 흔들렸었잖아, 그리고 지금 또 그런 여자 나타났고, 마치 이미 정해졌던 것처럼 말이야.”
  • 허지신은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말했다.
  • “그때는…지범이가 나한테 약을 탄 거야.”
  • 그리고 머뭇거리던 그가 말했다.
  • “최X제.”
  • 심모백은 깜짝 놀라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 그리고 그를 불쌍하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 “지범 그놈 아직도 네 손에 죽지 않고 살아있네?”
  • 허지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더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 심모백도 더는 묻고 싶지 않았지만, 너무 궁금하여서 또 물었다.
  • “그럼 이제 어떡할 건데? 힘들게 관심 가는 여자가 생겼는데 놓치지 말아야지, 아니면 독거노인이 되는 거지.”
  • 허지신은 다시 진지하게 대답했다.
  • “내가 알아서 할게.”
  • 이야기하고 한참 뒤에야 심모백은 돌아갔다.
  • 허지신은 창가에 서서 사색에 잠겼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