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 커피 대회 우승이라는 타이틀에 기분이 좋아진 정하늘은 서둘러 다시 단장한 뒤, 기쁜 표정으로 최시월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정하늘은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여시준을 찾았다. 하지만 어디로 간 건지 한 바퀴 샅샅이 둘러보아도 여시준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를 잡고 물어보았다.
“여 대표님은?”
“이미 가셨어.”
“가실 때 뭐라고 하시진 않았어?”
정하늘이 물었다.
그 친구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네 언니라는 사람과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어. 주위에 경호원들이 있어서 나도 정확한 내용은 듣지 못했는데 그다지 즐거운 분위기는 아니었어.”
“즐거운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정하늘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다시 물었다.
“어떤 분위기였는데?”
“나도 몰라. 어쨌든 마지막에 여 대표님께서 뭐라고 하시더니 곧장 발걸음을 돌리셨어. 너희 언니가 쫓아가서 뭐라고 하는데 경호원들이 앞을 가로막더라고.”
“그렇다는 건, 둘 사이가 생각처럼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는 거네?”
그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아무리 예뻐도 시골에서 올라왔잖아. 여씨 가문처럼 대단한 가문에서 시골뜨기랑 무슨 깊은 인연이 있었겠어? 하늘아, 너 절대 기죽지 마. 나는 여 대표님이랑 어울리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생각해!”
그러자 기분이 좋아진 정하늘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래서 네가 좋다니까. 아빠한테 얘기해서 너희 그룹에 오더를 많이 주라고 할게.”
“정말 잘 됐어! 하늘아, 고마워….”
두 사람이 즐거운 대화를 나는데 가까이에 있던 몇몇 여자들이 비아냥거렸다.
“정하늘, 언니 얼굴을 보더니 화병 나서 쓰러진 주제에 무슨 낯으로 다시 내려와?”
“나였으면 방구석에서 3년은 있다가 사람들이 아까 사건을 잊었을 때쯤 되어서야 다시 내려왔을 거야!”
화가 난 정하늘이 곧장 그들에게 다가가려던 순간,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안 돼! 저런 애들이랑 싸워봤자 나한테 득 될 것이 없어.’
어차피 저들은 갈대와도 같아서 바람이 부는 쪽으로 기우는 부류들이었고 저런 사람들 때문에 화를 낸다는 건 이성적이지 못한 선택이다.
저들과 싸워봤자 그녀의 이미지만 더 추락할 뿐이었다.
얼마 후면 재벌 가문들 사이에서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는 평가가 있을 예정이다. 이런 사소한 다툼들 역시 평점에 영향을 주는 것들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최은하를 다시 시골로 쫓아버리는 일이다!
‘최은하만 사라지면 내가 가장 주목받는 존재가 될 거야!’
그렇게만 된다면 저들도 감히 이런 소리를 지껄이지 못할 것이다.
아득한 상상이 정하늘의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올랐다….
‘최은하를 빨리 치워버려야겠어. 시간을 끌 문제가 아니야. 시간만 끌었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라!’
깊은 밤.
손님들이 다 돌아가고 고용인들은 뒷정리를 마친 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최은하의 방도 정리가 끝났다. 정도식은 그녀에게 베란다가 있는 큰 방을 선물했다. 이것만 봐도 정도식이 그녀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정도식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10년 만에 다시 만난 딸이 아니라, 가문에 큰 이익을 가져다줄 도구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것을 최은하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발견은 후반부터 줄곧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고용인 한 명이었다.
그래서 최은하는 씻고 자리에 누운 뒤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 집안사람들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정하늘은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어떻게 하면 최은하를 골탕 먹일까 생각했다.
그리고 갑자기 떠오른 절묘한 생각이 있었다.
“유모, 내 방으로 좀 와줘.”
잠시 후, 유모가 방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지시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억대의 가치를 가진 팔찌를 받은 뒤, 유모는 이 모녀에게 더욱 충성을 보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제 정하늘에게 둘째 아가씨라고 부르지만 유모에게는 정하늘이 유일한 아가씨였다.
정하늘이 물었다.
“그년은 이상한 낌새 없었어?”
유모가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파티가 끝나고 대표님 서재로 들어가서 대화를 나눈 것 외에는 특별한 이상은 없었습니다. 나올 때 카드 한 장을 들고 나오더군요. 아마 대표님께서 용돈을 주신 거겠죠. 그러고는 방으로 가서 나오지를 않고 있습니다. 중간에 물 한잔 시킨 것 외에는 아직까지 별다른 행동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정하늘의 두 눈에 질투가 일었다.
그녀의 용돈은 전부 엄마인 최시월이 챙겨줬다. 소문난 구두쇠인 정도식이 최은하에게 오자마자 카드를 건네다니!
정하늘은 하루빨리 최은하를 치워버려야겠다는 다짐이 더욱 굳건해졌다!
“유모, 나 필요한 게 있어. 그걸 구해다가 그년 방에 넣어줘.”
“그게 뭔데요?”
“독사!”
정하늘에게는 다 작정이 있었다. 그들의 저택은 산에 둘러싸인 곳에 위치해 있었다. 야밤에 독사 한 마리가 방에 들어가서 사람을 물어 죽였다고 해도 그녀가 의심을 살 일은 전혀 없었다!
“도, 독사요? 최은하를 독살하려는 건가요?”
유모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비록 이 두 모녀를 위해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살인은 해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왜? 싫어?”
“싫은 게 아니라… 제가 두 분께 충성인 건 아가씨도 아시잖아요. 하지만 사모님께서는 절대 섣불리 행동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는데….”
“됐어! 그런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엄마가 겁이 많아서 시간을 끌수록 위태로워진다는 생각을 못 하시고 계신 거야. 이런 일은 빨리 해치워 버리는 게 정답이야! 하기 싫으면 다른 사람을 시키면 돼. 하지만 유모, 막내아들이 도박에 빠져서 집에 빚이 많다며? 그래서 유모가 우리 집에서 가져간 물건이 얼마지?”
유모가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정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린 나이에 벌써 다른 사람의 약점을 쥐고 협박하는 법을 터득하다니!
유모가 이 별장에서 도둑질해간 물건은 죄다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것들이었다. 만약 절도죄로 재판에 선다면 몇 년은 감옥에서 썩어야 할지도 모른다….
정하늘이 말을 이었다.
“물론, 유모는 내가 어릴 때부터 나를 보살펴준 사람이잖아. 이 일만 도와준다면 아까 내가 말한 일들은 영원히 비밀로 묻힐 거야. 그리고 앞으로 돈이 필요하면 나한테 직접 얘기해. 그러니 이제 선택해. 할 거야? 말 거야?”
유모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
밤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최은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경계심은 늦추지 않고 이상한 소리라도 들리면 바로 일어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얼마나 잠들었을까, 창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잠에서 깬 최은하는 조용히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베란다 쪽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에 멀리 사라졌다.
누군가 베란다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갔다!
하지만 무슨 짓을 했는지 방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최은하는 잠시 누워있다가 그 사람이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선 뒤에야 아까 정도식이 준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휴대폰불빛으로 창밖을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