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다음 화
본능적인 끌림

본능적인 끌림

해님꽃

Last update: 2024-02-04

제1화 빨리 벗어요!

  • 무인도.
  • 거센 빗줄기와 파도가 섬을 통째로 집어삼킬 듯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 최은하는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비수로 힘겹게 나무토막을 자르고 있었다. 굵은 빗방울이 얼굴을 마구 때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 가족과 헤어진 지 어언 10년,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과 자신이 납치당했던 진실을 찾고자 어렵게 정씨 가문을 찾았다. 하지만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암살자들을 만났다.
  • 놈들을 성공적으로 해치웠지만, 배가 침몰하면서 인적도 없는 무인도까지 떠내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 오늘은 그녀가 무인도에 갇힌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다. 그리고 그동안 이곳을 지나가는 선박은 하나도 없었다.
  • 다행히 섬에 나무가 많아서 그녀는 간단한 나무배 한 척을 만들기로 했다.
  • 일주일의 노력 끝에 이제 노만 만들면 되는데 하필이면 이때 큰비가 쏟아지다니…
  • 최은하가 허리 좀 펴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던 순간, 갑자기 암초 쪽에서 검은색 형체가 보였다.
  •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확인해 보니 놀랍게도 그 형체의 주인공은 한 남자였다!
  • 준수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는 허리에 부상을 입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닷가에 쓰러져 있었다. 남자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와 바닷물이 섞여 마치 노을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 최은하는 조심스럽게 남자의 인중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남자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 그녀는 힘겹게 남자를 업고 자신의 임시 거처인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 동굴 속에 불을 지핀 뒤, 그녀는 또 비를 무릅쓰고 뛰쳐나가 약초를 캐서 돌아왔다.
  • “날 만난 거 운 좋은 줄 알아요.”
  • 최은하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남자의 옷을 벗겼다.
  • 남자는 허리에 깊은 자상을 입은 상태였다. 장기까지 다쳤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 그녀가 맥박을 확인하려 손을 뻗는데 커다란 손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 “… 너 누구야?”
  • 힘없는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손목을 잡은 손에는 엄청난 힘이 실려 있었다.
  • 최은하는 그런 남자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원망 섞인 말투로 대꾸했다.
  • “누구긴 누구겠어요? 당신 생명의 은인이죠! 이 손 놓지 않으면 비석을 준비할 거예요. 이름 없는 이 여기에 잠들다. 어때요?”
  • 남자는 미간을 찌푸린 채 말없이 그녀의 손에 든 약초를 바라보았다.
  • “뭘 그렇게 꾸물거리고 있어요? 빨리 벗어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 말을 마친 최은하는 곧장 남자의 옷깃으로 손을 가져갔다.
  • “나 스스로 할 수 있어.”
  • 남자는 귀찮다는 듯 그녀의 손을 쳐내고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스스로 옷을 벗었다.
  • 남자가 옷을 벗자 잘 다져진 복근과 매끈한 허리라인이 최은하의 눈앞에 펼쳐졌다.
  • ‘이 남자, 몸매가 정말 좋구나….’
  • 최은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새빨개진 얼굴로 약초를 조심스럽게 남자의 상처에 붙였다.
  • “이게 뭐지?”
  • 남자가 물었다. 온기 하나 없는 낮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 “지혈이랑 항염 작용이 있는 약초예요.”
  • “여긴 어디지?”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쑥스러운 표정을 짓던 최은하는 남자의 연이은 질문에 짜증스럽게 남자를 쏘아보았다.
  • ‘잘생기기는 했는데 말이 너무 많아. 내가 여기가 어딘지 알면 이곳에 일주일이나 갇혀 있었겠어?’
  • “궁금한 건 학교 선생님께 가서 물어보시고요. 말할 기운이 있으면 그냥 잠이나 자요.”
  • 남자가 언짢은 말투로 대꾸했다.
  • “의사가 이런 말투로 환자를 대하면 안 되지.”
  • “하!”
  • 최은하가 우습다는 듯이 코웃음 치며 반문했다.
  • “그럼 그쪽은 생명의 은인을 이런 식으로 대하나요?”
  • 남자의 미간이 순간 확 찌푸려졌다.
  • “여자가 왜 이렇게 까칠해?”
  • “남자가 왜 이렇게 예의가 없어요?”
  • 두 사람은 서로를 쏘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공기 속에 짙은 화약 냄새가 풍겼다.
  • 결국 먼저 타협한 쪽은 최은하였다. 다친 사람과 신경전을 벌여봤자 이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 “비도 내리고 저녁이면 기온이 뚝 떨어지니까 난 불을 지피러 가봐야겠어요. 그쪽은 얌전히 누워있어요.”
  • 그녀가 등을 돌리던 순간 남자가 입을 열었다.
  • “저기.”
  • “또 왜요?”
  • 최은하가 뒤돌아서며 물었다.
  • ‘빨리 불을 지피지 못하면 우리 둘 다 얼어 죽을 거라고!’
  •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 “아무것도 아니야.”
  • 최은하는 더 대꾸할 가치도 못 느껴서 구석으로 갔다.
  • 이곳에서 불을 지필 방법은 딱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나무토막을 마찰시켜서 불씨를 얻는 방법. 최은하는 거의 한 시간을 애써서 겨우 불씨를 얻었다.
  • 하지만 바깥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 들어오면서 어렵게 구한 불씨는 순식간에 꺼졌다.
  • “저기.”
  • 남자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 “또 뭔데요?”
  • 최은하가 고개를 돌리는데 ‘툭’하는 소리와 함께 값비싼 라이터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 “!!!!”
  • 최은하는 충격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욕설을 퍼부었다.
  • “무슨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정말 개 같네!”
  • 그녀가 미쳐 날뛰건 말건, 남자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스르륵 눈을 감았다.
  • 무인도의 밤은 빠르게 찾아왔다.
  • 두 사람은 동굴 양측에 누워 잠을 청했다. 달게 잠을 자던 최은하는 낮은 신음 소리에 잠에서 깼다.
  • 눈을 떠보니 남자의 하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온몸을 웅크린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 “저기, 괜찮아요?”
  • 최은하가 다가가서 남자의 팔을 꼬집었지만 상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 그녀는 서둘러 남자의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이마가 펄펄 끓고 있었다.
  • 상처 감염으로 열이 오른 것이다.
  • 평소라면 항생제 두 알로 해결될 일이었지만, 무인도에서 항생제를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 최은하는 어쩔 수 없이 물리적인 방법을 쓰기로 했다.
  • 잠시 후, 열은 겨우 내렸지만 이번에 남자는 온몸을 떨며 춥다고 호소했다.
  • 최은하가 남자를 모닥불 가까이 끌고 갔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 “제기랄….”
  • 그녀는 낮은 소리로 욕설을 내뱉으며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그리고 남자의 옆에 누워 그를 꼭 끌어안고 자신의 체온을 나누어주었다.
  • ‘사람이 죽어가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아무리 개 같은 남자라도.’
  • 그녀는 착하게 살 테니 하늘이 은혜를 베풀어 하루빨리 정씨 집안을 찾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칠 수 있게 해달라고 속으로 기도했다.
  • 자칭 그녀를 마중 나왔다던 사람들이 그녀를 제거하려고 했다. 이는 정씨 집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한다!
  • 만약 정말 이것이 친부의 작품이라면 그녀도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 최은하는 남자를 안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그렇게 서서히 꿈나라로 들어갔다.
  • 최은하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동굴 밖에서 시끄러운 발걸음 소리와 말소리가 들렸다.
  • ‘사람?’
  • 그녀는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남자의 외투는 그녀의 몸에 걸쳐져 있었는데 정작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 최은하는 서둘러 옷을 입고 살금살금 동굴 밖으로 나갔다.
  • 만약 그녀를 죽이러 온 사람들이라면… 정말 끈질긴 놈들이다.
  • 이런 생각을 하며 동굴 입구에 도착해 보니 밖에 검은색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는 헬기 한 대가 세워져 있었고 우두머리로 보이는 경호원이 공손한 태도로 남자와 얘기하고 있었다.
  • 소리를 들은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 최은하는 밝은 햇살 아래 처음으로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준수한 이목구비, 짙은 눈동자, 여전히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강한 카리스마를 풍기고 있었다. 열도 거의 내린 듯 보였다.
  • “당신….”
  • 최은하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데 남자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
  • “필요한 걸 얘기해.”
  • “네?”
  •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 “내 목숨을 살려줬으니 특별히 소원 하나를 들어주지.”
  • 최은하는 기가 막혔다.
  • “정말 예의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네요. 목숨을 구해줬는데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요?”
  • 최은하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경호원들이 이상한 사람 보듯이 그녀를 쳐다봤다.
  • 남자는 여전히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을 이었다.
  • “이번 기회를 놓치면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
  • 최은하는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녀가 만든 배로는 육지로 돌아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 그녀가 이를 악물며 대꾸했다.
  • “내 소원은 집에 돌아가는 거예요.”
  • 이번에는 남자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 “고작 이거 하나야?”
  • “그러면 또 뭐가 필요한데요?”
  • 지금 그녀의 소원은 하루빨리 이 무인도를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 남자는 멍청한 사람을 보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뒤돌아서서 헬기로 다가갔다.
  • 세 시간 뒤, 헬기는 수도권 하늘을 날고 있었다.
  • “저기야?”
  • 남자가 큰 정원으로 둘러싸인 한 별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 “아마도요….”
  • 어릴 적 기억을 전부 잃은 최은하였지만, 귀국하기 전 정씨 가문에 관해 기본적인 조사는 끝마친 뒤였다.
  • 원래 최씨 가문의 것이었으나 지금은 10년이 넘도록 그녀를 찾지 않은 그녀의 부친이 경영하고 있는 회사.
  • “내려가자.”
  • 남자의 지시가 떨어지자 조종사가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