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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십억 달러

  • 최은하는 최시월의 손에 이끌려 위층으로 올라가는 정하늘의 뒷모습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전혀 동정심이 들지 않았다.
  • ‘최시월한테 한 대 맞아 준 게 헛되지는 않았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일 거야!’
  • 정하늘이 올라간 뒤, 정도식이 최은하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 “별아, 애칭이 별이 맞지?”
  • 최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그녀는 별이라는 자신의 애칭을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그 이름이 정도식의 입에서 나오자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이렇게 하자, 별아.”
  • 정도식이 난감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하늘이가 너무 예쁨만 받고 커서 철이 없어. 이번 사태에 내 책임도 있다고 생각해. 경찰에 신고해야 맞지만, 어쨌든 네 동생이고 우린 가족이잖니. 너도 아무 일도 없었고 하늘이도 벌을 받았으니 이 일은 없었던 일로 하자. 내가 하늘이 단단히 혼낼게. 어때?”
  • 옷소매에 가려졌던 최은하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 ‘내가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이대로 넘어가자고?’
  • 아마 뱀에 물린 사람이 그녀였다면 정하늘은 모든 증거를 없애고 조용히 덮었을 것이다. 아마 날이 밝아서 그녀의 시체가 싸늘해졌을 때쯤 사람들에게 발견됐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 달 외출 금지로 그냥 넘어간다고?
  • 이 순간 최은하는 정도식이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확신이 섰다.
  • 정도식은 자신의 이익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절대 정하늘을 내치지 않을 것이다.
  • 딸 하나가 더 있으면 신분 상승을 위한 도구를 하나 더 가진 셈이니까.
  • 정도식은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 최은하는 모친이 왜 이런 사람을 선택했는지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 티끌만큼 남았던 혈육의 정마저 깨끗이 사라진 순간이었다.
  • 하지만 그녀는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저도 잘 모르겠네요. 아빠가 시키는 대로 할게요. 하늘이도 아직 어리니까 원망하지 않을 거예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좋은 자매로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이 일로 하늘이가 제가 어색해지는 건 저도 바라지 않아요.”
  • “걱정하지 마. 하늘이는 내가 잘 타이를게. 앞으로 오늘 일은 다시 입에 올리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
  • “그럴게요.”
  • 최은하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자 양 볼에 보조개가 귀엽게 파였다.
  • 누가 봐도 착하고 순진한 완벽한 딸의 모습이었다.
  • 정도식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갑자기 나타난 딸은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착하고 말도 잘 들었다.
  • 이런 아이는 나중에 통제하기도 쉽다.
  • “시간도 늦었고 너도 놀랐을 텐데 올라가서 푹 자.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고.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건 다 들어줄게.”
  • 기분이 좋아진 정도식은 통 크게 카드 한 장을 또 건넸다.
  • “안에 2천만 원이 있다. 아까 줬던 것까지 합치면 총 4천만 원이야. 네가 사고 싶은 거 다 사. 돈이 부족하면 나한테 또 달라고 하고. 이제 시골에 살 때처럼 소박하게 살지 않아도 돼. 정씨 가문의 딸이라면 그에 걸맞은 품위를 지켜야지. 내일은 집사를 보내서 네 옷 좀 준비하라고 할 거야.”
  • “고마워요, 아빠! 저는 아빠가 너무 좋아요!”
  • 최은하의 얌전한 대처에 기분이 좋아진 정도식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 방으로 돌아온 최은하의 얼굴에서 선하고 얌전한 미소가 싹 사라졌다.
  • 정하늘이 아무리 바보라지만 그녀의 곁에는 최시월이 있다. 하지만 그녀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 최은하는 주먹을 꽉 틀어쥔 채 힘없이 침대에 누워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이런 집안이라면 차라리 혼자인 게 나을 것 같았다….
  • 그리고 그녀가 정말 혼자인 건 아니었다. 그녀를 지극히 예뻐하는 해외에 계신 양부모님과 그녀를 잘 따르는 남동생도 있었다.
  • “내가 이곳에 있는 동안 나를 많이 찾을 텐데….”
  • 하지만 소중한 사람들이 이 진흙탕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당분간 그들과 연락을 자제하기로 마음먹었다.
  • 남동생의 얼굴이 떠오르자 최은하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 이때 휴대폰벨 소리가 울렸다.
  • 미국에 있는 그녀의 친구였다.
  • “샐리야, 잘 지내?”
  • 친구가 물었다.
  • “나야 잘 지내지. 국내에 있는 우리 집으로 돌아왔거든. 조금 사건이 있었지만 잘 해결됐어.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했어?”
  • 최은하가 유창한 영어로 대답했다. 발음이 거의 원어민 급이었다.
  • 그 친구가 약간 난감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 “너도 알잖아. 이번 무인도 개발 프로젝트에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거. 그래서 자금유통에 문제가 좀 생겼어. 혹시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아니면 우리 프로젝트에 같이 투자할 생각은 없어?”
  • 최은하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 “너희 프로젝트 나도 주시하고 있었어. 이렇게 하자. 얼마가 필요해? 내가 투자할게.”
  • “정말 잘됐어. 네가 있어서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야! 지금 10억 달러가 필요한데 괜찮아?”
  • “물론이지.”
  • 최은하가 흔쾌히 대답했다.
  • 전화를 끊은 최은하는 해외에 있는 자신의 자산관리사에게 연락했다.
  • 그리고 컴퓨터를 켜고 10억 달러를 조셉의 계좌에 입금한 뒤 전담 변호사에게 연락해서 계약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 모든 일을 마무리한 뒤, 그녀는 정도식이 자신에게 건넸던 카드 두 장을 보고 비웃음 가득한 미소를 짓고는 컴퓨터 로그 기록을 전부 삭제했다.
  • 한편, 정하늘을 방으로 데려간 최시월은 더는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 “이런 멍청한! 내가 몇 번을 얘기했니? 최은하에 대해서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섣불리 행동하지 말라고. 왜 그렇게 말을 안 들어?”
  • 정하늘은 서러움에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나,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하지만 엄마는 날 믿어줘야 해! 그 뱀은 분명 최은하가 내 방에 집어넣은 거야! 나는 유모한테 뱀을 그년 방 안에 넣고 오라고 시켰거든.”
  • “그걸 내가 몰라서 이러는 것 같아?”
  • 최시월이 분노해서 소리 질렀다.
  • 정하늘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 “그럼 엄마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최은하 그년 절대 단순한 년이 아니야!”
  • 최시월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먼저 눈치를 잘 살피라고 그렇게 가르쳤는데 넌 왜 아직도 그걸 깨우치지 못했니? 네 아빠는 지금 누가 봐도 그 애를 믿고 계셔. 그리고 뱀도 네가 먼저 그 애 방에 넣었고. 지금 해명한들 네 아빠가 믿어줄 것 같아? 더 화만 내겠지!”
  • “그럼 나는 어떡해? 난 이대로 억울해서 살 수가 없어! 고용인들 눈빛 봤어? 다들 내가 자초한 일이라고 통쾌해하고 있잖아.”
  • 잠시 침묵하던 최시월이 말했다.
  • “최은하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려운 상대야. 속을 알 수도 없고. 최대한 빨리 그년의 정보를 알아내야겠어. 그전에 넌 그 애랑 사이좋게 잘 지내야 해. 억지로라도 잘못을 뉘우치는 척하란 말이야. 그래야 네 아빠도 널 좋게 보지. 너도 네 아빠 성격 알잖아? 집안에 불화가 생기는 거랑 자기 말을 안 듣는 사람을 가장 싫어해!”
  • “하지만… 난 이미 방 안에 갇혔는데 어떻게 해?”
  • 최시월이 말했다.
  • “바보, 너 잊었어? 너 일주일 뒤면 시상식에 참석하잖아. 일주일만 참다가 시상식에서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면 이대로 지나갈 거야.”
  • “응! 그러면 나 공부 열심히 해서 시상식에서 모두를 놀라게 할 거야!”
  • “이제야 엄마 딸 같네….”
  • 그렇게 5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