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하는 최시월의 손에 이끌려 위층으로 올라가는 정하늘의 뒷모습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전혀 동정심이 들지 않았다.
‘최시월한테 한 대 맞아 준 게 헛되지는 않았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일 거야!’
정하늘이 올라간 뒤, 정도식이 최은하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별아, 애칭이 별이 맞지?”
최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그녀는 별이라는 자신의 애칭을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그 이름이 정도식의 입에서 나오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하자, 별아.”
정도식이 난감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늘이가 너무 예쁨만 받고 커서 철이 없어. 이번 사태에 내 책임도 있다고 생각해. 경찰에 신고해야 맞지만, 어쨌든 네 동생이고 우린 가족이잖니. 너도 아무 일도 없었고 하늘이도 벌을 받았으니 이 일은 없었던 일로 하자. 내가 하늘이 단단히 혼낼게. 어때?”
옷소매에 가려졌던 최은하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이대로 넘어가자고?’
아마 뱀에 물린 사람이 그녀였다면 정하늘은 모든 증거를 없애고 조용히 덮었을 것이다. 아마 날이 밝아서 그녀의 시체가 싸늘해졌을 때쯤 사람들에게 발견됐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 달 외출 금지로 그냥 넘어간다고?
이 순간 최은하는 정도식이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확신이 섰다.
정도식은 자신의 이익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절대 정하늘을 내치지 않을 것이다.
딸 하나가 더 있으면 신분 상승을 위한 도구를 하나 더 가진 셈이니까.
정도식은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최은하는 모친이 왜 이런 사람을 선택했는지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티끌만큼 남았던 혈육의 정마저 깨끗이 사라진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아빠가 시키는 대로 할게요. 하늘이도 아직 어리니까 원망하지 않을 거예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좋은 자매로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이 일로 하늘이가 제가 어색해지는 건 저도 바라지 않아요.”
“걱정하지 마. 하늘이는 내가 잘 타이를게. 앞으로 오늘 일은 다시 입에 올리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
“그럴게요.”
최은하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자 양 볼에 보조개가 귀엽게 파였다.
누가 봐도 착하고 순진한 완벽한 딸의 모습이었다.
정도식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나타난 딸은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착하고 말도 잘 들었다.
이런 아이는 나중에 통제하기도 쉽다.
“시간도 늦었고 너도 놀랐을 텐데 올라가서 푹 자.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고.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건 다 들어줄게.”
기분이 좋아진 정도식은 통 크게 카드 한 장을 또 건넸다.
“안에 2천만 원이 있다. 아까 줬던 것까지 합치면 총 4천만 원이야. 네가 사고 싶은 거 다 사. 돈이 부족하면 나한테 또 달라고 하고. 이제 시골에 살 때처럼 소박하게 살지 않아도 돼. 정씨 가문의 딸이라면 그에 걸맞은 품위를 지켜야지. 내일은 집사를 보내서 네 옷 좀 준비하라고 할 거야.”
“고마워요, 아빠! 저는 아빠가 너무 좋아요!”
최은하의 얌전한 대처에 기분이 좋아진 정도식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방으로 돌아온 최은하의 얼굴에서 선하고 얌전한 미소가 싹 사라졌다.
정하늘이 아무리 바보라지만 그녀의 곁에는 최시월이 있다. 하지만 그녀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최은하는 주먹을 꽉 틀어쥔 채 힘없이 침대에 누워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집안이라면 차라리 혼자인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가 정말 혼자인 건 아니었다. 그녀를 지극히 예뻐하는 해외에 계신 양부모님과 그녀를 잘 따르는 남동생도 있었다.
“내가 이곳에 있는 동안 나를 많이 찾을 텐데….”
하지만 소중한 사람들이 이 진흙탕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당분간 그들과 연락을 자제하기로 마음먹었다.
남동생의 얼굴이 떠오르자 최은하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이때 휴대폰벨 소리가 울렸다.
미국에 있는 그녀의 친구였다.
“샐리야, 잘 지내?”
친구가 물었다.
“나야 잘 지내지. 국내에 있는 우리 집으로 돌아왔거든. 조금 사건이 있었지만 잘 해결됐어.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했어?”
최은하가 유창한 영어로 대답했다. 발음이 거의 원어민 급이었다.
그 친구가 약간 난감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너도 알잖아. 이번 무인도 개발 프로젝트에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거. 그래서 자금유통에 문제가 좀 생겼어. 혹시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아니면 우리 프로젝트에 같이 투자할 생각은 없어?”
최은하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너희 프로젝트 나도 주시하고 있었어. 이렇게 하자. 얼마가 필요해? 내가 투자할게.”
“정말 잘됐어. 네가 있어서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야! 지금 10억 달러가 필요한데 괜찮아?”
“물론이지.”
최은하가 흔쾌히 대답했다.
전화를 끊은 최은하는 해외에 있는 자신의 자산관리사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컴퓨터를 켜고 10억 달러를 조셉의 계좌에 입금한 뒤 전담 변호사에게 연락해서 계약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모든 일을 마무리한 뒤, 그녀는 정도식이 자신에게 건넸던 카드 두 장을 보고 비웃음 가득한 미소를 짓고는 컴퓨터 로그 기록을 전부 삭제했다.
한편, 정하늘을 방으로 데려간 최시월은 더는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이런 멍청한! 내가 몇 번을 얘기했니? 최은하에 대해서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섣불리 행동하지 말라고. 왜 그렇게 말을 안 들어?”
정하늘은 서러움에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하지만 엄마는 날 믿어줘야 해! 그 뱀은 분명 최은하가 내 방에 집어넣은 거야! 나는 유모한테 뱀을 그년 방 안에 넣고 오라고 시켰거든.”
“그걸 내가 몰라서 이러는 것 같아?”
최시월이 분노해서 소리 질렀다.
정하늘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엄마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최은하 그년 절대 단순한 년이 아니야!”
최시월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먼저 눈치를 잘 살피라고 그렇게 가르쳤는데 넌 왜 아직도 그걸 깨우치지 못했니? 네 아빠는 지금 누가 봐도 그 애를 믿고 계셔. 그리고 뱀도 네가 먼저 그 애 방에 넣었고. 지금 해명한들 네 아빠가 믿어줄 것 같아? 더 화만 내겠지!”
“그럼 나는 어떡해? 난 이대로 억울해서 살 수가 없어! 고용인들 눈빛 봤어? 다들 내가 자초한 일이라고 통쾌해하고 있잖아.”
잠시 침묵하던 최시월이 말했다.
“최은하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려운 상대야. 속을 알 수도 없고. 최대한 빨리 그년의 정보를 알아내야겠어. 그전에 넌 그 애랑 사이좋게 잘 지내야 해. 억지로라도 잘못을 뉘우치는 척하란 말이야. 그래야 네 아빠도 널 좋게 보지. 너도 네 아빠 성격 알잖아? 집안에 불화가 생기는 거랑 자기 말을 안 듣는 사람을 가장 싫어해!”
“하지만… 난 이미 방 안에 갇혔는데 어떻게 해?”
최시월이 말했다.
“바보, 너 잊었어? 너 일주일 뒤면 시상식에 참석하잖아. 일주일만 참다가 시상식에서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면 이대로 지나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