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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모두를 놀라게 하다!

  • 최은하는 시선을 내리고 모든 감정을 억누른 채 치맛자락을 살포시 들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 사람들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건 J사 한정판 하이힐을 신은 여자의 하얀 발이었다.
  • 매끈한 발가락과 하얀 피부에 환한 조명이 더해져 은은한 광택이 났다.
  • 발만 봤는데도 엄청난 미인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 놀란 건 정하늘도 마찬가지였다. 구두 모델을 해도 될 만큼 예쁘고 앙증맞은 발이었다.
  •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님들의 반응을 살폈다. 남자 손님들은 당장이라도 침을 흘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 여시준을 돌아보니 그 역시 그녀의 발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 복잡하고 두려운 마음이 정하늘의 가슴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었다.
  •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하늘은 다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 ‘발만 예뻐서 뭐 해, 얼굴을 드러내면 다들 구역질이 올라올 텐데!’
  •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최은하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 ‘그래, 계속 걸어! 더 빨리 걸어!’
  • 정하늘은 사실 일부러 굽 높은 하이힐을 최은하에게 준비해 줬다. 그녀가 계단을 걷다가 발을 헛디디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 ‘아주 대자로 넘어져라!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면 더 좋고!’
  • 하지만 의외로 최은하는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빠르고 평온하게 걷고 있었다.
  • 길고 뾰족한 하이힐 굽은 마치 못이라도 된 것처럼 바닥에 또각또각 아주 안정적으로 부딪치고 있었고 전혀 넘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 정하늘은 실망한 마음보다 당황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 ‘그렇게 높은 구두를 신고 어쩌면 저렇게 안정적으로 걸을 수 있지?’
  • 정하늘이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최은하는 예전에 슈퍼모델인 친구의 부탁으로 가면을 쓰고 국제 패션쇼에도 참여한 적 있었다. 15cm나 되는 하이힐을 신고 패션쇼 무대에도 올랐는데 이 정도는 그녀에게 일도 아니었다.
  • 정하늘은 갑자기 TV에서나 봤던 이상한 광경이 떠올랐다. 문화 탐구 다큐멘터리에서 나온 적 있는데 시골에서 사람들이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쓰고 긴 나무막대기 위에서 걷는 모습을 촬영한 것이었다.
  • 설마 최은하도 그런 묘기를 연습했던 건 아닐까?
  • 이때 최은하의 쥐면 부서질 듯한 가냘프고 매끈한 허리 라인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 최은하가 금방 헬기에서 내렸을 땐 더럽고 큰 옷을 입고 있어서 그녀의 몸매를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 ‘이 정도로 말랐던 거야?’
  • 정하늘의 눈에서 질투의 불길이 치솟았다.
  • ‘쳇, 마르기만 하면 뭐 해? 얼굴이 못생겼는데!’
  • 정하늘은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최은하가 어서 빨리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최은하가 발걸음을 빨리했다.
  • 그리고 여자의 탄탄한 허리라인과 가늘고 긴 팔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 그리고 이어서 예쁜 쇄골 라인과 우아하게 뻗은 목…
  • 최은하의 모습이 점점 드러날수록 정하늘의 꽉 쥔 두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 정하늘은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긴장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 드디어, 최은하의 얼굴이 드러났다.
  • 손바닥 크기의 작은 얼굴, 정교한 이목구비, TV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완벽한 얼굴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두 눈이었다. 마치 별빛을 머금은 듯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는 인간의 눈이 아니라 찬란한 보석과도 같았다.
  • 경국지색, 한 폭의 그림, 백설 공주… 그 어떤 수식어를 가져다 붙여도 그녀의 미모를 형용하기에는 부족할 것 같았다.
  • ‘이게 진짜… 최은하? 이렇게 예뻤다고?!’
  • 정하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더니 다시 음침하게 어두워졌다가 나중에는 분노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 이렇게 예쁜 줄도 모르고 하필이면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를 가져다 바친 꼴이 되었으니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 놀라움, 분노, 후회, 질투… 복합적인 감정들이 휘몰아쳐서 정하늘은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 이미 그녀의 얼굴은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 심지어 최은하의 얼굴을 보고 있기도 싫어졌다. 자신이 더 초라해지는 것 같아서였다.
  • 정하늘은 고개를 돌려 손님들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모두가 최면에라도 걸린 듯, 멍한 표정으로 최은하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여시준의 얼굴에도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쳤다.
  • ‘저건… 감탄인가? 여시준 같은 사람도 저 얼굴에 넘어갔다는 말인가?’
  • 놀란 건 최시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일찍 죽은 최해연이 절세 미인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하지만 시골에서 자란 그녀의 딸이 못생겨지기는커녕 최해연을 초월하는 미모를 자랑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 이대로 가다가는 최은하가 얼굴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딸을 압도할 것 같았다!
  • 최시월은 곧장 고개를 돌려 정도식의 표정을 살폈다.
  • 정도식 역시 멍한 표정으로 최은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남자 손님들처럼 탐욕적인 시선이 아니라 아버지가 딸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도식의 눈빛에서 교활한 빛이 스쳤다.
  • 정도식을 잘 알고 있는 최시월은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였다. 그는 지금 보물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일 것이다.
  • 갑자기 절세의 미모를 가진 딸이 나타났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안돼! 이대로 그이의 사랑을 최은하에게 빼앗길 수는 없어! 어떻게든 쫓아내야 해!’
  • 최은하는 계단을 내리자마자 여동생의 표정을 살폈다.
  • 이미 정하늘의 표정은 구겨질 대로 구겨져 있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최은하의 외모가 그녀에게 가져다준 충격은 상당한 것 같았다.
  • 아마 이곳에 손님들이 없었더라면 정하늘은 곧장 달려와서 최은하의 얼굴을 할퀴었을 것이다.
  • 여자의 질투는 핵폭탄보다도 무서운 것이다.
  • 최은하는 짐짓 모르는 척 다가가서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 “내 동생 생일 축하해. 그런데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매력적인 목소리였지만 정하늘에게는 귀를 찢을 것처럼 날카롭게만 들렸다.
  • 정하늘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 “아니, 나 괜찮아….”
  • “괜찮으면 됐어. 참, 네가 준 이 드레스 너무 예뻐. 사이즈도 딱 맞는 것 같아.”
  • 최은하는 일부러 ‘사이즈가 맞다’는 얘기를 강조해서 말했다.
  • 부아가 치민 정하늘은 온몸의 혈액이 거꾸로 흐르는 느낌이었다.
  • ‘이건 고의야! 분명 일부러 이러는 거야!’
  • “너….”
  • 정하늘이 무슨 말을 하려 입을 열던 순간, 울화가 터진 것인지 두 눈이 뒤집어지며 몸 전체가 뒤로 넘어갔다.
  • “하늘아!”
  •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당황한 최은하가 부축하려 손을 내밀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 쾅!
  •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정하늘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