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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우연한 만남

  • 최시월이 자리를 뜨자 정도식은 참다못해 최은하를 잡고 물었다.
  • “별아, 아빠가 궁금한 게 있는데, 너랑 여 대표님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많이 친해?”
  • 사실 이 물음은 정도식이 진작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최은하가 자신을 이용한다고 생각할까 봐 줄곧 참았던 것이다.
  • 하지만 며칠 함께 지내면서 그는 최은하가 멍청해 보일 정도로 순진한 아이라고 느꼈고 그래서 이런 말을 물어도 나쁜 쪽으로 생각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섰다.
  • 그래서 그는 대놓고 물어보기로 했다.
  • 그가 예상했던 것처럼 최은하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대답했다.
  • “사실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에요. 집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사고가 있었는데 마침 여 대표님도 사고를 당하셨거든요. 대표님이 허리 부상을 입으셨는데 그때 제가 약초를 구해다가 상처를 치료해 드렸어요. 나중에 그분 경호원이 와서 저를 집까지 데려다줬고요.”
  • 물론 최은하는 자신과 여시준이 알몸으로 같이 껴안고 잔 사이라는 사실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여시준의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도 일부러 얘기하지 않았다.
  • 그 말을 들은 정도식은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실망도 컸다.
  • 최은하가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여시준과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는 것에 실망했고 하지만 여시준이 최은하에게 신세를 졌다는 사실에 위안이 되었다!
  • 여씨 가문이 최은하한테 신세를 졌다! 이는 그 어떤 보석보다도 값진 것이었다.
  • “그래! 잘했어, 별아. 역시 내 딸이야!”
  • 정도식은 마치 세상 진귀한 보물을 보는 눈빛으로 최은하를 바라보았다.
  • 최은하는 여전히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정도식을 향해 웃어 보이고는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었다.
  • 그렇게 다음 날, 네 사람은 N시티를 향해 출발했다.
  • 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 최은하와 정하늘은 나란히 뒷좌석에 탔다.
  • 로열 커피 학원의 제복을 입고 완벽한 메이크업을 한 정하늘은 귀족 아가씨의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 최시월은 일부러 최은하에게 지극히 평범한 옷을 골라 주었다. 전문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불러 주지도 않았다. 그래서 정하늘과 비교하면 최은하는 지금 화장도 안 한 얼굴에 똥머리를 묶은 고등학생 같은 차림이었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완벽한 이목구비는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전체 분위기도 깔끔하고 순수해서 마치 활짝 피어난 백합 같았다.
  • 진짜 미인은 남자들의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라 남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이 여자에게 어울리는 사람인지 생각하게 한다.
  • 몇천만 원 대의 메이크업을 받고 자신의 오늘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정하늘은 최은하를 보자 자신은 그저 그녀의 들러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분노한 정하늘은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 “흠, 흠!”
  • 조수석에 앉아 있던 최시월이 헛기침을 했다.
  • 그제야 정하늘은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 ‘예쁘기만 하면 뭐 해? 그냥 관상용 꽃이지. 나는 다재다능한 커리어 우먼이고! 최은하 너는 그냥 한낱 노리개일 뿐이야!’
  • 정하늘은 애써 화를 삭이며 최은하를 향해 말했다.
  • “언니, 계속 사과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 드디어 말 할 수 있게 됐어…. 정말 미안해. 내가 그렇게 철없는 행동을 하면 안 됐는데. 용서해 줘, 언니.”
  • ‘이것도 분명 최시월이 시킨 거겠지. 철없는 행동? 철없는 행동에 사람이 죽을 뻔했어!’
  • 하지만 최은하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정하늘의 손을 잡았다.
  • “하늘아, 이제 그만 얘기해도 돼. 이미 지나간 일이고 우린 가족이잖아.”
  • 최은하에게 손을 잡힌 정하늘은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감히 쳐낼 용기가 없었다.
  • 그녀는 속이 뒤집히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애써 웃음 지었다.
  • 두 딸의 화해에 정도식은 무척 흐뭇했다.
  • 서울에서 N시티까지 가려면 비행기를 타야 했는데 구두쇠인 정도식은 전부 일반석으로 구매했다.
  • 항공사 규정에 따라 비즈니스석 탑승객들이 먼저 탑승하게 된다.
  • 최은하는 맨 뒤쪽에서 정도식을 따라 걸었다.
  • 탑승 절차를 밟는데 갑자기 멈춰선 정도식이 어딘가를 바라보며 기쁜 소리로 입을 열었다.
  • “여 대표님?”
  • 공항에서 여시준과 마주칠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정하늘도 쑥스러운 얼굴로 헛기침을 연신 했다. 여시준의 주의를 끌려는 수작이었다.
  • 비서에게서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보고 받던 여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정도식에게 눈길을 돌렸다.
  • 눈앞에 다가온 정도식과 정하늘을 보자 여시준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도대체 누군데 아는 척하냐는 태도였다.
  • 정도식은 어색하게 코끝을 만졌다.
  • ‘여 대표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다니.’
  • 정하늘은 더욱 애간장이 탔다.
  • ‘이게 몇 번째야? 아직도 나를 기억하지 못해? 기억력이 너무 나쁜 거 아니야??’
  • 사실 여시준은 초인간적인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그가 기억하고 싶은 일과 사람에 한해서였다.
  • 여시준은 필요 없는 사람이나 일들은 시간과 정력을 낭비해서 기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 최은하 역시 여시준을 봤지만 딱히 다가가서 아는 척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 어차피 우연이 겹쳤을 뿐이고 서로 모른 척하는 게 그녀의 바람이었다.
  • 그 속을 모르는 정도식은 최은하가 움직임이 없자 스스로 자기소개를 했다.
  • “저 정도식입니다. 여 대표님, 며칠 전 우리 딸 생일 파티에도 오셨잖아요.”
  • 여시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번 주 생일 파티에만 네 번을 다녀왔고 그래서 지금 정도식이 누구인지 더욱 헷갈렸다.
  • 정도식은 아직도 어리둥절한 여시준을 보자 다급한 마음에 옆에 있던 정하늘을 밀치고 맨 뒤쪽에 서 있던 최은하를 앞으로 내세웠다.
  • “그럼 여 대표님, 우리 딸은 기억하시죠?”
  • 조금 전 최시월이 일부러 최은하를 가리고 있었기에 그제야 여시준은 그녀를 발견했다.
  • 수수한 옷차림의 그녀는 이 가족과는 전혀 다른 계층의 사람으로 보였다.
  • 여시준은 갑자기 그녀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 “내가 기억력이 좀 안 좋은 편이라, 누구였지?”
  • 이번에는 최은하도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 최은하가 담담히 말했다.
  • “워낙 바쁘신 분이니 기억하시지 못하는 것도 이해합니다. 실례했네요. 아빠, 이제 가요.”
  • 최은하가 이렇게 얘기하자 더는 이곳에 있을 수 없어진 정도식은 우울한 기분으로 탑승구 쪽으로 향했다.
  • ‘남자 하나 제대로 꼬시지도 못하고, 쓸모없는 것!’
  • 정도식은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 최시월과 정하늘은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 ‘이제 최은하를 보배처럼 애지중지하지 않겠지?’
  • 최시월은 정도식의 팔짱을 끼고 앞에서 걷고 있었고 기분이 좋아진 정하늘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 한참 걷던 그녀가 더는 참지 못하고 최은하에게 말했다.
  • “언니, 나는 언니랑 여 대표님이 꽤 친한 줄 알았는데 기억을 못 하시네? 그래도 속상해하지는 마. 여 대표님처럼 귀하신 분이 시골에서 올라온 언니를 기억하시지 못하는 건 당연하잖아.”
  • 정하늘은 최은하를 약 올리려는 의도로 일부러 시골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 최은하의 기분이 나쁠수록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