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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팽팽한 신경전

  • 정하늘과 최시월은 조용히 지내고 있었고 최시월도 정도식에게 정하늘의 외출 금지를 풀어달라는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심지어 더 각별히 최은하를 챙겼다. 그래서 정도식도 어느 정도 화가 누그러졌다.
  • 독사 사건은 이 집안에서 입에 올리면 안 되는 금기 사항이 되어버렸고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 정도식은 서재에서 5일을 보내고 다시 안방으로 돌아갔다.
  • 엿새째 되던 날, 출근하는 정도식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최시월을 바라보는 눈빛도 한결 부드러워진 것이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 그리고 그날 밤, 최시월이 닭 다리를 최은하에게 권하며 말했다.
  • 최은하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 “고마워요, 이모.”
  • “이제 엄마라고 불러야지.”
  • 최시월이 말했다.
  • “이제 내가 엄마처럼 널 보살펴 줄 거야. 너랑 하늘이 둘 다 내가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친자식처럼 사랑해 줄게. 그러니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얘기해.”
  • 최은하는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 ‘정하늘이 당신이 낳은 딸이 아니라고? 그걸 누가 믿어?’
  • 사실 정하늘은 그녀와 겨우 몇 달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이는 정도식이 최은하의 모친이 임신했을 때 이미 최시월과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 하지만 정도식처럼 철두철미한 인간이 이런 일을 세상에 알릴 리 없었다.
  • 하지만 갑자기 최시월이 최은하에게 이런 말을 한데는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 ‘나한테서 엄마라는 소리가 듣고 싶어? 내 엄마는 둘 뿐이야. 친엄마랑 양어머니. 어디 너 따위가 주제넘게!’
  • 최은하는 머뭇거리며 정도식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 “아빠, 저 아직은… 조금 어색해요.”
  • 그녀는 촉촉한 눈동자로 정도식을 바라보며 애처롭게 말했다.
  • 만약 여우짓에도 등급이 있다면 최은하의 지금 표정은 거의 전설 급이었다.
  • 그녀의 표정을 본 정도식은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 딸이긴 하지만 어떤 남자가 저런 눈빛을 보고 거절의 말을 뱉을 수 있을까.
  • 그는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 “괜찮아.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하자. 호칭을 꼭 지금 바꿔야 하는 것도 아니고.”
  • “고마워요, 아빠. 죄송해요, 이모. 저한테 시간이 조금 필요해요.”
  • 최은하가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최시월을 향해 말했다.
  • 최시월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 ‘망할 년이 엄마라고 부르기 싫다는 거네!’
  • 하지만 최시월은 정하늘보다 침착했다. 그녀는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너한테는 어려운 일이지. 내가 너무 성급했어. 사과할 필요 없어. 사과는 내가 해야지. 네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면 그때 불러도 괜찮아. 어차피 우린 이제 평생 함께할 가족이니까.”
  • “고마워요, 이모.”
  • “녀석, 고맙기는.”
  • 두 사람은 겉으로는 살가운 대화를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 그 모습을 본 정도식은 직장에서 받은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 집안이 화목해야 사업도 흥한다는 옛말이 그른 말이 아니었다. 그는 이대로 사건 사고 없이 조용히 지낸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다.
  • 이때 최시월이 입을 열었다.
  • “여보, 할 얘기가 있어요. 하늘이 얘기예요.”
  • 정하늘의 이름을 들은 정도식은 좋았던 기분이 다시 가라앉아서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 “아직도 그 애 편을 드는 거야? 잘못을 했으면 제대로 반성을 해야지! 한 달이 지나기 전에는 절대 방 밖을 못 나와! 당신도 그 일은 더 입 밖에 내지 마!”
  • 최은하는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최시월을 바라보았다. 이런 시기에 이런 말을 꺼낼 최시월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눈치 빠른 최시월이라면 분명 정도식의 화가 완전히 사그라들기 전에 정하늘 얘기를 꺼내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거지?’
  • 최시월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 “여보, 내가 하늘이 편을 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꼭 해야 할 얘기가 있는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요.”
  • 그제야 정도식은 기분이 풀어져서 차갑게 물었다.
  • “무슨 일인데?”
  • 최시월이 한숨을 쉬며 서류 한 장을 꺼냈다.
  • “실은 오늘 초대장을 받았는데 글쎄 하늘이가 로열 커피 학원에서 주최한 바리스타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지 뭐예요.”
  • “뭐라고?!”
  • 이 대회의 우승자는 심야 커피 하우스의 홍보대사가 된 것과 같았다. 이 사실을 정도식도 물론 알고 있었다. 심야 커피 하우스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이었다!
  • 그는 들뜬 표정으로 최시월의 손에서 서류를 건네받아 꼼꼼히 읽었다. 그리고 참석 명단에 여시준의 이름도 있는 것을 확인하자 두 눈이 반짝 빛났다.
  • 그것은 탐욕의 빛이었다.
  • 초대장을 손에 든 정도식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 “이런 희소식을 왜 이제야 얘기해? 내일이 시상식이잖아!”
  • 최시월이 죄책감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 “하늘이가 순간의 잘못된 생각으로 사고를 저질렀잖아요. 오늘 초대장을 보여줬더니 글쎄 안 간다는 거 있죠. 집에서 더 반성하고 싶다고요.”
  • “그럴 수는 없지!”
  • 정도식이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 ‘여시준에게 눈도장을 찍을 기회인데 당연히 가야지! 저 녀석은 바보인가?’
  • 하지만 최은하의 순진무구한 눈빛을 마주하자, 정도식은 어쩐지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기침을 하며 말했다.
  • “하늘이가 그런 말까지 했다는 건 깊이 반성하고 있다는 뜻일 거야. 잘못을 알았으니 오래 가둬두는 것도 의미 없지 않겠니? 별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 최은하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 ‘이런 사람이 내 아빠라니! 참 웃기지도 않네!’
  • 하지만 그녀는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는 대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 “아빠, 사실 저도 진작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계속 하늘이를 가둬두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이제 풀어줘요. 하늘이도 어린애가 아니고 다음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되죠. 다음에 또 같은 잘못을 반복하면 그때 혼내도 늦지 않아요.”
  • 맞은편에 앉은 최시월은 그 말을 듣고 이를 갈았다.
  • 최은하가 이 말을 함으로써 다음에 정하늘이 또 같은 잘못을 저지르면 정도식은 절대 쉽게 용서해 주지 않을 것이다!
  • 아니나 다를까, 정도식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 “그래, 다음에 다시 그러면 안 되지! 여보, 애한테 단단히 일러. 다음에 또 그러면 그냥 집에서 나가라고!”
  • 최시월은 분노가 치밀었지만 겉으로는 부드럽게 말했다.
  • “내가 단단히 타이를게요. 애도 이제 잘못을 알았으니 다신 안 그러겠죠. 별아, 정말 고마워.”
  • 최은하도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 “이제 한 가족이니까 서로 이해하고 감싸줘야죠. 하늘이가 저를 죽이려고 했더라도요.”
  • 최시월은 더는 참기 힘들었는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 “그럼 나는 내일 시상식에 참석할 준비를 해야 해서 먼저 일어날게요.”
  • 말을 마친 그녀는 곧장 계단을 오르다가 또 뭔가 떠오른 듯 뒤돌아서서 말했다.
  • “여보, 마침 내일 주말이고 당신도 쉬니까 다 같이 갈래요? 별이도 데리고 가는 게 어때요?”
  • 정도식은 최은하와 여시준의 관계를 떠올리고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물론 좋지! 별이가 입고 갈 옷들도 당신이 준비해줘. 옷이 부족하면 나가서 좀 쇼핑도 하고.”
  • “그럼요, 여보.”
  • 최시월이 드디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 ‘최은하, 우리 하늘이가 주목받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