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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저랑 결혼이라도 하시게요?

  • 신경 써서 세팅했던 정하늘의 머리는 흐트러져서 산발이 되고 뭇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던 얼굴은 하얗게 질려서 볼품없이 되어버렸다.
  • “하늘아!!”
  • 최시월이 무대 위로 달려왔다.
  • 걱정하는 얼굴로 무대 위로 뛰어오른 그녀는 최은하를 힐끗 보고는 일부러 어깨를 툭 하고 밀쳤다.
  • 10cm나 되는 하이힐을 신고 마침 무대 변두리에 서 있던 최은하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중심을 잃고 무대 아래로 쓰러졌다…
  • 추락 도중, 최은하는 보호조치로 재빨리 머리를 끌어안았다.
  • ‘이대로 추락해도 최소한 머리는 다치지 않겠지.’
  • 하지만 뜻밖에도 최은하는 예상대로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 크고 힘 있는 손이 그녀의 가냘픈 등을 단단히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안아 그녀를 무대 위에서 안고 내려왔다.
  • 바닥에 중심을 잡고 선 최은하는 고개를 돌려 그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 차갑게 인상을 찌푸린 남자가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 “구두는 왜 이렇게 높은 걸 신고 나왔어? 계단에서 구르고 싶어?”
  • ‘내가 선택한 구두가 아니라고!’
  • 최은하는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좋은 마음으로 한 말임을 알기에 꾹 참았다.
  •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그녀는 큰 타박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 최은하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반박의 말을 억지로 삼키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던 찰나, 정도식이 먼저 다가와서 선수를 쳤다.
  • “아이고, 우리 딸! 괜찮아? 아빠가 와서 부축해 주려 했는데 여 대표님이 빨랐네…. 너한테 참 잘해 주시나 보다!”
  • 정도식은 관심 어린 표정으로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 무대에서 쓰러져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위층으로 올라간 정하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말이다.
  • 최은하는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아버지라는 사람… 하마터면 딸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자애로운 아버지로 오해할 뻔했다.
  • 최은하는 그렇게 완벽한 그녀의 모친이 왜 정도식 같은 사람을 선택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 그녀가 이번에 돌아온 것도 이들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서였다.
  • 분명 그녀가 모르는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 “저 괜찮아요, 아빠. 하늘이 상태나 살펴주세요. 갑자기 쓰러졌는데 혹시 무슨 큰 병은 아닐지 걱정되네요.”
  • 최은하는 정도식을 향한 경멸감을 감쪽같이 감추고 부드럽고 다소곳하게 말했다. 착하고 이해심 많은 완벽한 딸의 이미지였다.
  • 정도식은 속으로 무척 흡족했다.
  • 그는 하늘이 그를 도와 이런 완벽한 딸을 선물해 줬다고 생각했다!
  • 정도식이 다급히 말했다.
  •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럼 난 하늘이 보고 올 테니 너랑 여 대표님은 얘기 좀 나눠. 여 대표님, 자기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즐기시다가 가세요!”
  • 여시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 ‘내 집처럼? 정씨 가문에서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 그는 고개를 돌려 최은하를 한번 훑어보고 반박의 말을 다시 집어삼켰다.
  • 정도식이 떠나자 여시준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 “난 이따위 파티에 참석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니야. 그냥 그쪽한테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어서 남은 거야. 정말 다른 소원은 없어?”
  • 최은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 사실 귀국하기 전 정씨 가문의 대략적인 정보는 파악하고 온 그녀였다. 그래서 국내 경제 상황에 관해서도 대충 알고 있었다.
  • 전국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대단한 여씨 가문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 손님들과 정도식의 반응만 봐도 여시준이 어떤 인물인지 유추할 수 있었다.
  • 하지만 그녀는 무인도에서 그냥 자신이 할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마침 여시준이 부상을 입은 채 떠밀려 왔기에 보살펴 준 것뿐이고, 또 마침 그녀가 의술을 조금 알고 있었기에 상처를 치료해준 것뿐이었다.
  • 물론… 껴안고 같이 잠든 것만 제외하고.
  • 하지만 그녀는 그 일을 아무것도 없었던 일로 하고 싶을 뿐이었다.
  • 최은하는 진지한 표정으로 정중하게 대답했다.
  • “여시준 씨, 마음은 고맙게 받을게요. 하지만 정말 이걸로 됐어요.”
  • 원하는 게 있으면 스스로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신조였다. 그리고 최은하는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다.
  • 다른 사람에게 의지한다는 이야기는 그녀의 사전에서 절대 있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 여시준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 “당신, 지금 뭘 거절했는지 알기나 해?”
  • 그에게서 무제한의 소원권을 얻는다는 것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꿈에서도 그리던 특혜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바보 같은 여자는 몇 번이고 이런 절호의 기회를 거절했다.
  • 그는 이 여자의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정말 해부라도 해보고 싶었다!
  • 최은하는 이토록 진지하게 그녀의 소원을 바라는 여시준의 모습에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 “제가 뭘 거절했다는 거죠? 운명의 남자라도 거절했나요? 그리고 제 이름은 당신이 아니에요.”
  • “그럼 뭔데?”
  • “저는… 별이에요.”
  • 별이라는 이름은 해외에 있는 그녀의 양부모가 지어준 애칭이었다.
  • “알았어. 그런데 소원 진짜 필요 없어?”
  • 최은하가 농담 식으로 말했다.
  • “그렇게 보답을 하고 싶다면… 저랑 결혼이라도 하실래요?”
  • “…”
  • 이번에 할 말을 잃은 사람은 여시준이었다. 그는 아주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 최은하는 목청을 가다듬은 뒤, 분위기를 무마하려 입을 열었다.
  • “장난이에요. 그러니까 소원은 이제 됐어요. 저 정말 필요한 거 없어요.”
  • “그렇게 하지.”
  • 여시준이 입을 열었다.
  • “네?”
  • 최은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 “뭘 그렇게 해요?”
  • 여시준은 다시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와서 말했다.
  • “그쪽 소원 말이야. 돌아가서 가족들과 상의를 해봐야 할 것 같아. 이건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 “잠시만요….”
  • 최은하는 놀랍고도 어이가 없어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 “설마 제 얘기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신 건 아니죠? 제가 얘기했잖아요. 그냥 장난이었다고.”
  • “가끔은 장난에 진심이 담겨 있는 법이야.”
  • “그런데 저는 정말 장난이었다고요. 저 그쪽한테 관심 없어요!”
  • 여시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 “왜? 우리나라 여자라면 다들 나한테 시집오고 싶어서 난리인데.”
  • “거기에 저는 포함되어 있진 않아요!”
  • “어쨌든… 며칠 뒤에 답변을 줄게. 나 먼저 간다.”
  • 말을 마친 여시준은 곧장 발걸음을 돌렸다. 장난이었다는 그녀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 여시준이 자리를 떠나자 구석에 대기하고 있던 그의 경호원들도 곧장 따라나섰다.
  • “저기! 거기 서요! 우리 얘기 좀 해요!”
  • 최은하가 허겁지겁 달려 나갔지만 경호원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 “죄송합니다. 멈춰 주시죠!”
  • “아니, 정말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요!”
  • 하지만 경호원들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시준의 동의 없이는 절대 접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 이것이 현장에 있는 여자들이 여시준의 관심을 갈망하면서도 섣불리 다가서지 못했던 이유였다.
  • 최은하는 결국 멍한 표정으로 헬기에 오르는 여시준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이 남자, 장난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거야?’
  • 하지만 이런 고민은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 정상인이라면 절대 그럴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 결혼?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도움 한번 받았다고 진심으로 결혼을 고민한다는 말인가!
  • ‘그냥 장난일 거야.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진심인 줄 알았잖아!’
  • 최은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입을 삐죽였다.
  • ‘내가 당했어!’
  • 이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여시준과 더 얘기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선을 돌려 원래는 최씨 가문의 것이었던 이 별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유명한 재벌 가문이었던 최씨 가문은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정씨 가문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