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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각자의 속내

  • 여시준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 “정말 소원이 이거 하나야? 지금 얘기해도 늦지 않아.”
  • 그러자 최은하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 “그쪽이 무슨 알라딘의 램프인 줄 알아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소원은 여기까지 온 것으로 됐어요.”
  • 최시월과 정하늘을 포함한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최은하와 여시준을 바라보았다.
  • ‘이게 무슨 상황이지?’
  • ‘저 거지가 여시준과 아는 사이라고?’
  • 여시준이 최은하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가주 정도식의 흥분한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렸다.
  • “여 대표님! 오시기 전에 연락이라도 주셨으면 미리 마중을 나갔을 텐데요!”
  •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주변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 보는 눈빛으로 정도식을 바라보았다.
  • 최시월은 절망감에 눈을 감았다.
  •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 그제야 정도식은 이상한 점을 눈치채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 그리고 시선이 최은하에게 닿았을 때, 순간 미간을 확 찌푸렸다.
  • “하늘아, 생일 파티에 웬 거지까지 불렀어? 당장 쫓아내! 여 대표님 눈을 더럽히지 말고!”
  • 정하늘은 속으로 조금 기쁘기도 하면서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아빠, 저분은….”
  • “아빠!”
  • 최은하가 정하늘의 말을 가로채고 먼저 입을 열었다.
  • “저 모르시겠어요? 저 별이잖아요.”
  • 별은 그녀의 애칭이었다.
  • “별이…”
  • 정도식이 잠시 멈칫하더니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 “네가… 은하?”
  • “그래요. 저예요, 아빠.”
  • 최은하가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 10년이라는 세월은 그녀에게서 어릴 적 기억을 거의 다 빼앗아갔다. 하지만 정도식의 얼굴에서 익숙한 느낌이 느껴졌다.
  •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은 정도식은 저도 모르게 뒤로 뒷걸음질 쳤다.
  • 그것은 비밀을 들켜 버린 것에 대한 공포였다.
  • 그리고 눈치 빠른 최은하는 그것을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 “아빠,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보고 싶었어요.”
  • 정도식은 굳은 표정으로 억지로 최은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 “돌아왔으면 됐어… 그런데 이 꼴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그러고 보니 여 대표님도 행색이 좀… 흐트러지셨는데….”
  • 그제야 뭇사람들은 여시준 역시 물에 빠졌던 사람처럼 옷이 여기저기 구겨지고 얼룩진 모습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 정하늘은 의심의 눈초리로 최은하와 여시준을 훑어보았다.
  • ‘저 두 사람, 설마 뭔가 있었던 건 아니겠지?’
  • 하지만 정하늘은 이내 그 생각을 부정했다. 여시준처럼 고귀한 신분의 남자가 지저분하고 못생긴 시골뜨기와 눈이 맞았을 리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 ‘여시준이 눈이 멀지 않고서야!’
  • 최시월은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려 다급히 입을 열었다.
  • “여보, 보아하니 여 대표님께서 은하를 데려다주신 것 같네요.”
  • “그래?”
  • 그 말을 들은 정도식은 그제야 최은하를 향한 눈빛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 어차피 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최은하는 아직 어렸고 알아본 바에 의하면 기억까지 잃었다는 것 같으니 그것을 기억하고 있을 리 없었다.
  • 하지만 최은하를 이용해서 여씨 가문과 인연을 맺는다면… 그건 절대적으로 이득이 큰 장사였다!
  • 정도식은 빙그레 웃으며 여시준을 향해 물었다.
  • “여 대표님, 우리 딸이랑 아는 사이였군요! 데려다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괜찮으시다면 안으로 들어가서 씻고 저녁 식사도 하시고 가는 게 어때요?”
  • 최시월도 맞장구를 쳤다.
  • “그래요, 여 대표님. 집에 마침 손님용으로 준비해 둔 새 옷도 있으니까 올라가서 옷이라도 갈아입으시겠어요?”
  • 여시준은 사실 거절하고 싶었다.
  • 하지만 바닷물에 젖었던 옷을 여태 입고 있는 게 찝찝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 정도식은 여시준이 말이 없자 어서 가자는 제스처를 취했고 낮은 소리로 최시월에게 지시했다.
  • “은하도 데리고 가서 잘 씻기고 단장시켜.”
  • 정도식과 결혼한지 어언 10년, 최시월은 그의 말뜻을 바로 알아챘다.
  • 그는 지금 최은하를 이용해 여씨 가문과 연을 맺을 생각인 것이다
  • ‘이런 좋은 기회는 최은하가 아니라 우리 딸 하늘이가 가졌어야지! 최해연 이 년은 살아있을 때도 내가 가져야 할 것들을 다 빼앗아가더니, 이젠 죽어서까지!’
  • 최시월은 절대 최해연의 딸이 자신의 딸보다 잘되는 꼴을 볼 수 없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 겉으로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최시월은 조용히 정하늘을 따로 불렀다.
  • “은하를 데리고 가서 씻기고 옷도 갈아입혀. 앞으로 은하는 네 언니야. 잘 지내야 한다.”
  •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빛만은 의미심장했다.
  • 정하늘은 바로 눈치채고 생글생글 웃으며 최은하를 향해 말했다.
  • “언니, 나랑 같이 가서 좀 씻고 옷 갈아입자.”
  • 최은하는 이 모녀가 이렇게 쉽게 자신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하지만 의심의 표정을 감춘 채 순진무구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그래, 하늘아.”
  • 두 사람은 그렇게 손잡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 정원에 있던 손님들은 여시준이 이곳에 온 이유에 대해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 하지만 뭘 하러 왔든 여시준이 이곳으로 왔다는 건 앞으로 정씨 가문을 쉽게 보면 안 되겠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 저택 2층.
  • “언니, 여기가 손님방이야. 언니 방은 아직 준비를 못 해서 잠시 여기를 쓰면 돼. 안에 세면도구들은 다 있고 난 언니가 입을 만한 옷 좀 챙겨서 올게.”
  • “그래, 고마워.”
  • “참, 언니! 샤워기는 사용할 줄 알지? 온도 조절은 자동으로 되는 거야.”
  • 정하늘은 친절한 척 이것저것 알려줬지만 경멸의 눈빛은 감추지 못했다.
  • 하지만 최은하는 못 본 척 담담히 미소 지으며 답했다.
  • “사용할 줄 알아.”
  • 해외에서 오래 생활한 그녀가 어떻게 샤워기 사용법 하나 모를 수 있을까?
  • “그럼 됐어. 난 옷 가지러 가볼게.”
  • 웃으며 방문을 닫은 정하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 그녀는 최은하의 손을 잡았던 자신의 손을 손수건으로 힘껏 문지르고는 손수건에 독이라도 묻은 것처럼 바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 ‘못생긴 년이 더럽기까지 해! 여 대표님이 어떻게 저런 여자한테 관심이 생겼겠어? 그냥 우연히 이곳까지 데려다준 거겠지!’
  • 방 안.
  • 최은하는 편한 자세로 욕조에서 전신욕을 즐기고 있었다.
  • 무인도 생활 일주일, 찝찝해서 미칠 것 같았는데 드디어 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 얼굴에 묻었던 먼지와 흙탕물이 천천히 씻겨 내려가고 본연의 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 그러자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얼굴의 여인이 거울 앞에 나타났다.
  • 십분 뒤, 정하늘이 욕실 문을 두드렸다.
  • “언니, 드레스 가져왔어. 문 좀 열어 줄래? 신발은 문밖에 뒀어. 갈아입고 나와서 신으면 돼.”
  • “그래.”
  • 최은하는 문틈으로 드레스를 건네받고 바로 문을 닫았다.
  • 그래서 정하늘의 경멸에 찬 눈빛은 미처 보지 못했다.
  • 이 드레스를 놓고 말하면 G사 한정판 드레스로 정하늘이 입고 있는 드레스보다 훨씬 더 비싼 것이었다.
  • 하지만 정하늘은 사놓고 한 번도 입지 않았다.
  • 이 드레스를 소화하려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몸매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 군살이 전혀 없으면서 약간 글래머러스한 모델 정도가 되어야지 이 드레스를 소화할 수 있었다. 일반인이 입으면 뚱뚱해 보이거나 어울리지 않는 게 특징이었다.
  • 정하늘은 팔뚝에 살집이 좀 있고 쇄골 라인이 두드러지지 않았기에 당연히 입을 수 없었다.
  • 그녀는 드레스를 입고 등장해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최은하의 모습을 상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