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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웃음거리는 누가 될 것인가

  • ‘시골뜨기가 세계적인 명품을 몸에 걸친다고 공주가 되겠어? 웃음거리나 될 뿐이지!’
  • 정하늘은 혹시라도 이 일로 정도식이 자신한테 뭐라고 해도 두려울 것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녀는 아끼던 드레스를 선뜻 언니한테 내줬고 그것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한 사람은 최은하일 테니까.
  • 하이힐은 일부러 10cm나 되는 것을 준비했다.
  • 정하늘은 시골에서 올라온 최은하는 하이힐 같은 건 구경도 해보지 못했을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라도 하면….’
  • 정하늘은 이런 묘안을 생각해낸 자신에게 손뼉이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 그녀는 자신이 준비한 드레스를 입고 사람들 앞에 나선 최은하의 모습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 그랬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언니’라고 찾아온 사람이 사실은 정씨 집안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골뜨기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 “언니, 나는 먼저 내려가서 기다릴게. 곧 파티 시작이니까 옷 갈아입고 내려와.”
  • “그래.”
  • 욕실 안에서 최은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 대답을 들은 정은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 그녀는 파티 시작 시간을 앞당겨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최은하가 망신당하는 꼴을 보고 싶었다!
  • 그렇게 되면 최은하와 여시준은 더 이어질 가능성이 없을 것이다!
  • 정하늘은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미 아까 정원에서 여시준한테 들이댔다가 망신당한 일은 까맣게 잊고 있는 듯했다.
  • 망신 한번 당하면 어떤가?
  • 어차피 최은하는 더 큰 망신을 당하게 될 테고 그러면 그녀가 당했던 망신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질 것이다.
  • 욕실 안.
  • 사실 최은하는 욕실로 들어가기 전, 미리 방에서 바느실을 챙겨서 들어갔다.
  • 정하늘이 정말 좋은 마음으로 그녀에게 꼭 맞는 옷을 가져다주리란 보장이 없었기에 스스로 수선해서 입을 생각이었다.
  • 그런데 옷은 뜻밖에 몸에 꼭 맞았다.
  • 그녀는 워낙 키도 크고 날씬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 게다가 일주일의 무인도 생활은 그녀의 쇄골 라인을 더 돋보이게 했고 타고난 우아한 분위기가 드레스와 잘 어우러져서 마치 그녀를 위해 맞춤 제작한 드레스처럼 보였다.
  • ‘정하늘이 정말 이걸 나한테 가져다줬다고?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사실은 그렇게 나쁜 애가 아니었나?’
  • 하지만 최은하는 자신이 사람을 잘못 봤을 리 없다는 것을 확신했기에 다시 드레스를 꼼꼼히 살폈다.
  • 5분 뒤, 그녀는 드레스에 아무 문제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거울 앞에 섰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 최하늘은 다시 거울을 비춰 보며 자세히 드레스를 관찰했다.
  • 몸매를 많이 따지는 드레스였다. 키도 어느 정도 커야 하고 마르지만 가슴이 있어야 했으며 팔과 어깨 등에 군살이 있는 사람은 절대 입으면 안 되는 옷이었다.
  • 하지만 몸매가 상술한 조건을 만족시키기만 하면 이 드레스는 입은 사람을 더욱 빛나 보이게 하는 드레스였다.
  • 최은하의 입가에 비웃음이 서렸다.
  • ‘정하늘… 이런 속셈이었구나.’
  • 하지만 아쉽게도 평소 헬스를 꾸준히 했고 타고난 조건이 훌륭한 그녀였기에 결국엔 정하늘의 패배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내가 망신당하는 꼴을 그렇게 원한다면 그 뜻대로 해 줄 수는 없지!’
  • 사실 최은하는 그래도 생일인데 조용히 있으려고 했었다.
  • 하지만 정하늘의 행동에서 만약 그녀가 원하는 것을 찾아내려면 가장 먼저 겉보기엔 평화로운 이 집안을 풍비박산 내야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집안이 소란스러워져야 수면 아래로 깊이 가라앉았던 진실이 수면위로 올라올 것이다.
  • 최은하는 정하늘이 준비해준 은색 하이힐을 신고 방을 나섰다.
  • 자칫 잘못하면 발을 헛디딜 만큼 아찔한 높이의 하이힐이었다.
  • 아래층.
  • 오색 찬연한 불빛 아래 화려하게 장식된 파티 홀.
  • 정하늘이 파티를 앞당겼기에 내빈들은 샴페인을 들고 무대 위에 오른 정하늘을 주목하고 있었다.
  • 여시준도 샤워를 마치고 내려와 있었다.
  • 그는 이렇게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고 가식적인 부잣집 공주님들의 생일 파티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목숨을 구해준 여자가 아직 내려오지 않았기에 인사라도 하고 갈 작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 비록 까칠하고 전혀 여성스러운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여자이기는 했지만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 정하늘이 마이크를 쥐고 무대에 올랐다.
  • 그녀는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시준을 보자 그가 정말 자신을 위해 왔다고 생각했다.
  • 그처럼 존귀한 신분의 남자라면 분명히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고 제 입으로 말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까도 모른척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정하늘은 혼자서 생각했다.
  • ‘그런 게 분명해!’
  • 그래서 정하늘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했다.
  • “여 대표님, 안녕하세요. 제 생일 파티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너무 기뻐요.”
  • 그녀는 촉촉한 눈동자로 여시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 여시준은 그저 어이가 없었다.
  •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길래 아까부터 계속 아는 척하는 것일까?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 ‘그런데 그 까칠한 여자는 왜 아직도 안 내려오는 거지?’
  • 한편 정하늘은 여전히 여시준을 두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마치 여시준이 자신의 생일파티에 참석한 것을 누가 모를까 봐 광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 이때 고용인이 다가와서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 “아가씨, 최은하 아가씨께서 내려오십니다.”
  • “좋았어! 계단 쪽 조명을 밝게 비춰줘!”
  • 정하늘은 모두의 앞에서 최은하가 얼마나 보잘것없고 하찮은 존재인지 보여주리라 다짐했다!
  • “예, 아가씨!”
  • 지시를 받은 고용인이 자리를 떠났다.
  • 2층에서 1층으로 향하는 모든 조명이 밝게 켜졌다. 누가 그곳에 서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아래쪽에 눈부신 무대가 있었으니까.
  • 하지만 무대에 오를 사람은 공주가 아니라 광대일 것이고 무대 아래에서는 구경꾼들의 비웃음이 터져 나올 것이다.
  • 정하늘은 끓어오르는 희열을 느끼며 무대에 올라가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 “사실 오늘은 특별한 날입니다. 제 생일이기도 하지만 저의 이복 언니가 집으로 돌아온 날이기도 합니다. 10년 전 언니는 몹쓸 인신매매범들에게 납치되어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오늘 언니가 시골에서 집으로 돌아오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 말이 끝나기 바쁘게 2층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 또각또각…
  • 하이힐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 정하늘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 표정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 하지만 정작 본인은 모르는 듯, 손을 들어 계단 쪽을 가리켰다.
  • “돌아온 저희 언니를 환영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충 손뼉을 쳤다.
  • 시골에서 온 촌뜨기가 박수를 받을 자격이나 있을까?
  • 정씨 가문이 수도권에서 일정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고 여시준까지 함께한 자리가 아니었으면 아마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 그만큼 그들은 콧대 높은 명문가의 자제들이었고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거지에게 박수를 보낼 만큼 마음이 넓지 않았다.
  • 계단을 내리던 최은하는 정하늘의 대사를 빼놓지 않고 다 들었다.
  • 그녀의 예쁜 눈동자에 비웃음이 스쳤다.
  • ‘내가 망신당하는 꼴을 그렇게도 보고 싶었어?’
  •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의 외모가 자랑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어차피 겉모습은 실속이 없는 것이니까.
  •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얼굴을 확인한 정하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무척 기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