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장미! 흑호! 악덕 도련님들! 이런 캐릭터 하나하나가 결코 작은 백씨 그룹 사장인 그녀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거물들이 남편에 대한 경외심이 대단하다.
백이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조용히 차를 운전하는 임범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남편은 베일에 싸인 듯 도무지 종잡을 수 없게 느껴진다.
“여보 왜 그래?”
임범은 백이의 시선을 감지한 듯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당신 나한테 솔직히 말해봐, 정말로 혈장미 구해줬었어?”
백이는 임범을 진지하게 바라봤다.
혈장미 같은 사람은 이들이랑은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이다. 백이는 정말 상상할 수가 없다, 평범한 임범이 어떻게 그 대단한 사람의 생명의 은인인 건지.
임범은 저도 모르게 실소가 터졌다.
“그건 10년 전 일이야! 난 그때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그녀를 구한 건 의도치 않은 일이었어!”
백이는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그런 신비로운 여자와 엮이는 걸 좀처럼 원치 않았다.
“그래 좋아! 이번은 혈장미가 당신 도와줬으니 그때 은혜를 이미 갚은 거야!”
“앞으론 연락할 일 없겠네!”
이 말을 하던 백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럼 서자항과 장천은 어떻게 된 일이야?”
“아무리 봐도 당신을 엄청 두려워하는 표정이었단 말이야.”
백이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필경, 임범은 두 사람의 람보르기니를 정말 엉망으로 만들었고, 두 악덕 도련님의 성격으론 미친 듯이 복수를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사정을 봐준 건데 어쩜 임범한테 용서를 구하는 걸까.
여기까지 생각하던 백이는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당신 혹시 천용 그룹 회장님 서천용이랑 아는 사이야?”
“아니, 모르는 사람인데?”
임범은 빙그레 웃었다.
“그런 거물급 인물들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백이는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서천용은 기침만 해도 J시를 뒤흔드는 인물임을 알기에, 임범과 알고 지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백이는 잘 몰랐다.
임범의 뜻은, 서천용의 체급이 너무 낮아 도시가 살짝 흔들리는 수준으로는 자신과 알고 지낼 자격이 없다는 뜻이었다!
임범의 눈에 서천용은 그저 몸뚱어리가 조금 큰 개미일 뿐이었다.
얼마 안 돼 벤츠 승용차가 유엔빌리지로 운전해 들어갔다, 여긴 임범과 백이의 집이다.
집에 금방 들어서니 임범은 무거운 표정으로 뭔가를 얘기하는 장모님 심옥매와 장인어른 백산을 보았다.
하지만 임범이 입을 열기도 전에 장모님 심옥매는 콧방귀를 뀌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흥! 네놈은 무슨 배짱으로 백이 동창회에 간 거야, 남들에게 찬밥 신세 당할 게 뻔한데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
그러면서 심옥매는 식탁을 가리키며 차갑게 얘기했다.
“임범, 찬밥과 찌개를 남겼으니 얼른 가서 먹어! 먹고 설거지 깨끗하게 해놔!”
찬밥과 찌개라니! 백이는 얼굴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 엄마와 따지려 하였지만 임범은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네! 그럴게요. ”
손 씻으러 화장실로 향하던 임범은 식탁을 지나치며 힐끗 보았더니 식탁 위엔 찬밥과 찌개가 아닌 장모님께서 손수 하신 정교한 반찬 두 가지가 있었다.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반찬들이었다. 말은 안 해도 임범은 알고 있다. 장모님은 자신이 동창회에서 남들에게 찬밥 신세 당하며 눈치 보여 굶고 왔을까 봐 신경 써서 밥상을 챙겨주었다는 것을.
장모님의 선의는 임범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였다.
그는 장모님이 말은 모질게 하여도 마음은 참 착한 분이신걸 알고 있다.
입으로는 모질고 심한 말을 하여도 마음은 참 착한 사람인 걸, 또 진심으로 임범을 가족처럼 대하는 분이신걸 잘 알고 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 꼭 가족들의 자랑이 될게요!”
임범은 빙그레 웃으며 손 씻으러 갔다.
손 씻으러 화장실로 들어가던 임범은 아내와 장인 장모님의 대화를 얼핏 듣게 되었다.
“아빠! 엄마! 왜 그래요? 왜 이렇게 울상이에요? 뭔 일 있으신 거예요?”
백산은 한숨만 푹푹 쉬더니 말이 없었다. 오히려 심옥매가 감정이 격해져 대답했다.
“회사 일 때문이지 뭐! 요즘 J시하고 주변 도시에서 전부 AS 신형 폐렴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대! 큰 병원과 제약그룹들이 모두 치료 방안을 연구하고 있고.”
“할아버지는 세 형제더러 함께 전문가들을 찾아 처방전을 만들라고 하셔! 누가 먼저 만들어 내면 회사내에서도 좋은 지위와 발전을 가질 수 있대!”+
“그런데 오늘 네 큰아버지가 한의원 의사 선생님이랑 처방전을 만들었나 봐. 네 작은 아버지는 서양 전문가를 모셔서 서약 처방전을 만들고 말이야. ”
“유독 네 아빠만 아무런 성과도 못 얻었어. 내일 가문 미팅을 하는 날인데 그렇게 되면 네 아빠는 할아버지한테 엄청 혼나게 될 거야!”
심옥매의 목소리엔 답답함이 가득 묻어있었다.
백씨 그룹은 제약, 화장품, 의류 등 여러 분야에서 동시에 활약하고 있는 종합적 그룹이다.
백씨 영감이 그룹 내의 지위가 가장 높고, 그다음으로는 백산 삼형제다.
다만, 큰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일가는 그룹 내 자원을 거의 80% 정도를 장악했고, 백산, 백이 일가의 대우가 제일 나빠 항상 따돌림과 탄압을 받아왔다.
하도 백이 업무 능력이 출중해 화장품 회사를 일구어 내길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백산 일가는 아마 백씨 그룹에서 진작에 쫓겨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내일 백산 가족이 효과적인 치료 방안을 내놓지 못하면 여전히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 가족들에게 짓눌려 지위가 위태로울 것이다.
“AS 신형 폐렴?”
화장실에 있던 임범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는 당연히 이 폐렴을 알고 있었다.
당시 아프리카 대륙에서 수십만 명의 생명을 빼앗아갔고, 세계 의학계에서 '치명적인 감염병 TOP10'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심지어 세계적인 공황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혈옥 멤버들도 적잖게 감염됐었다.
그때 수많은 일류의 의학전문가들이 아프리카에 모여 수개월간 연구했지만 제대로 된 치유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결국! 임범은 꼰대가 남겨준 “백골의서”를 통해 “환혼단”을 만들어 냈으며 72가지 한약을 조합해 만든 약이 철저히 AS 바이러스를 없앨 수 있었다.
이약으로 혈옥 멤버들과 세계 수많은 사람을 구해냈다!
다만 임범은 이 바이러스가 몇 년이 지난 지금 J시에서 퍼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미처 예상치 못했다.
이쯤 생각하니, 임범은 일치의 망설임도 없이 백이의 파우치에서 아이브로 펜슬을 꺼내 티슈에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5분 뒤 임범은 손을 씻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범아, 이리 와서 나랑 술 한 잔 하자!”
백산은 식탁에 앉아 있다가 기분이 안 좋은 듯 임범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이 말에 임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인 백산 맞은편에 앉았다.
늙은이와 젊은이 둘이서 한잔 두 잔 받기 시작했다.
백산의 성격은 나약하다.
한평생 아버지와 두 형님의 그늘에 갇혀 살다 보면 거의 매일 왕따를 당하게 된다.
임범은 조용히 장인의 불평과 불만에 귀 기울였다.
한잔 또 한잔! 백산이 마시면 마실수록 흥이 오를 때 즈음, 임범은 손에 든 티슈를 백산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아버님, 내일 미팅하실 때 주머니 만져봐요 꼭!”
응?
백산은 임범의 뜬끔없는 한마디에 어리둥절 했지만, 티슈 한 뭉치에 별다른 눈치를 채지 못했다.
“범아, 넌 신경쓰지 않아도 돼! 내가 비록 능력은 없지만, 예전과 다름없이 너와 백이를 먹여 살릴 수 있어!”
“걱정하지 마! 설령 이후에 백가에서 쫓겨나, 고향에 돌아가 분식집을 꾸리더라도 우린 행복하게 잘 살수 있어!”
백산은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기도 했다.
하지만 왠지 임범의 말은 마치 신기한 마력을 가진 것 마냥 그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 메아리가 그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