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 가족분들의 토론 끝에 이례적으로 도련님을 가문에 복귀 시키기로 결정했어요. 도련님이 동의만 하신다면 도련님 어머니의 신주를 진 씨 가문 사당에 모실 수 있어요.”
두 차 사이에 거만한 표정의 개량한복을 입은 노인이 턱시도를 차려입은 진천하에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 신주를 진 씨 가문 사당에 모신다고?”
개량한복을 입은 노인은 진천하가 감지덕지해할 줄 알았으나 그의 눈빛에는 오히려 시큰둥한 기색이 역력했다.
“진 씨 가문은 그럴 자격이 없어! 돌아가서 진 씨 가문 사람들한테 전해. 그 사람들이 우리 모자에게 빚진 건 조만간 모두 돌려받을 테니 알아서 기다리라고 말이야. 용이야, 여긴 네가 처리해. 난 먼저 신부를 데리러 가야겠어.”
“네, 진 회장님.”
진천하는 운전기사만 남겨둔 채 웨딩카를 몰고 훌쩍 떠났고 개량한복을 입은 노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진 씨 가문은 경기도에서 최고의 명문가였다!
한낱 하녀의 밑에서 태어나 모든 걸 빼앗기고 쫓겨난 서자 주제에 감히 진 씨 가문을 모욕하다니?
그러나 곧이어 그 노인은 운전기사의 모습을 제대로 보게 되었고 그 순간 온몸이 굳어버린 듯했다.
“당… 당신은 청룡?”
노인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다.
운전기사는 그저 쌀쌀맞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신분을 인정했고 노인은 저도 모르게 두 발짝 뒤로 물러나더니 목이 멘 듯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 도련님이 6년 전 전 세계의 지하 세력을 통합시키고 사대 전장을 데리고 모든 적들을 쓸어버린 뒤 각국을 몰아붙여 5년의 계약을 체결하고 신비롭게 사라진 천하 군신이란 말인가요?”
“맞아요, 진 회장님은 국내 많은 기업들이 신속하게 국제 시장을 장악하고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기꺼이 5년 동안 조용히 지내셨어요. 내일이면 5년의 기한이 끝나는 날이니 이 세상은 또 한 번 진 회장님에 의해 떠들썩해지겠죠!”
청룡의 눈빛은 불타듯 이글거렸다. 거만하던 노인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때 진천하는 신부를 데리러 갈 웨딩카를 몰고 끝없이 펼쳐진 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핸들을 잡은 손에는 작은 호두 한 알이 쥐어져 있었는데 그는 18년 전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던 겨울을 떠올리고 있었다.
진천하의 어머니는 경기도 최고의 명문가 진 씨 가문의 하인이었으나 진 씨 가문의 맏아들이 술에 취해 실수를 하는 바람에 그가 생겼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의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진 씨 가문은 체면상 두 모자를 그 가문의 사람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듯 진천하가 6살이 되던 해 그가 진 씨 가문의 서자라는 신분이 타인에 의해 밝혀졌고 진 씨 가문은 체면을 위해 두 모자를 진 씨 가문에서 쫓아내고 심지어 경기도에 머물지도 못하게 했다.
그해 겨울, 그들 모자는 습한 추위가 가득한 부산시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의 몸이 점점 차가워지고 나서야 진천하는 어머니가 타향에서 동사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외투는 너에게 줄게. 그리고 호두도 한 알 있는데 이건 네가 죽을 때까지 널 지켜줄 거야…”
진천하 역시 추위에 거의 정신을 잃어갈 무렵, 호두 팔찌를 찬 큰 눈의 여자아이가 그에게 외투를 건넸고 작은 호두 한 알도 함께 주었다.
여자아이의 시크한 말투와는 달리 아주 따뜻한 한마디였다.
진천하는 그녀가 건넨 외투와 호두 덕분에 기적적으로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던 겨울을 견뎠다.
그는 성공과 명성을 모두 얻은 뒤 그때 그 호두 팔찌를 차고 있던 소녀를 찾아내 그녀에게 구애를 했고 오늘이 지나면 그는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권력이 높은 귀부인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30분 뒤, 잘 꾸며진 한 여자의 침실.
진천하는 손에 꽃을 든 채 여자친구인 서은정과 들러리를 서줄 박미주 앞에 서있었다.
“은정아, 전에 이미 예물은 4천만 원만 받기로 약속했잖아. 왜 6천만 원이나 더 늘었어?”
진천하는 이미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은 채 아름다운 미모로 그에게 아양을 떠는 서은정을 보며 안색이 조금 굳어졌다.
방금 전 그의 예비 장모인 강영순이 그에게 6천만 원의 예물비를 더 보태야만 서은정을 데려갈 수 있다고 했고 그 이유는 바로 그녀의 남동생도 다음 달에 결혼하게 되는데 신부 측에서 신혼집을 원해 계약금 6천만 원을 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진천하가 전에 준 4천만 원의 예물 비용으로는 이미 차를 구입했다.
“천하야, 내가 일부러 널 곤란하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도 정말 어쩔 수 없어서 그래. 은정이한테 하나뿐인 동생인데 누나와 매형이 도와주지 않으면 누가 도와주겠어, 안 그래?”
문밖에서 두 사람의 얘기를 엿듣고 있던 강영순이 으스대는 기세로 문을 밀고 들어왔다.
“그건 저도 이해해요. 하지만 제가 몇 년 동안 모은 돈은 이미 드린 4천만 원이 전부예요. 지금 당장 6천만 원을 더 내라고 하시는 건 좀 무리예요. 일단 제가 은정이 데리고 결혼식장에 가서 예식부터 마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리고 내일이 되면 예물을 얼마를 원하시든 제가 다 해드릴게요.”
진천하는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오늘 밤 12시만 지나면 5년의 계약이 끝나게 되고 진천하는 다시 어마어마한 재부를 얻게 될 것이기에 고작 6천만 따위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진천하, 너 지금 내가 바보로 보여? 너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줄게. 지금 당장 전화해서 이 6천만 원을 모으든지 아니면 내 딸이랑 당장 헤어지든지 해. 6천만 원도 없는데 내가 어떻게 마음 놓고 내 딸을 너에게 맡기겠어?”
강영순은 분노로 가득 찬 얼굴로 말했고 진천하는 고개를 돌려 서은정을 바라보았다.
“은정아, 하객분들이 이미 호텔에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넌 어쩔 생각이야?”
“난 엄마 말에 동의해. 동생이라곤 걔 하나인데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누가 도와주겠어. 남자로서 만약 이 6천만 원도 마련하지 못한다면 그냥 너랑 헤어져야지.”
서은정은 이별로 진천하를 협박했다.
“정말 나랑 헤어질 거야?”
진천하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오늘 밤이 지나면 자신은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권력이 있는 귀부인으로 만들어 줄 수 있었지만 그녀는 결국 이별을 택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바로 너의 사탕발린 말에 속아 너 같은 못난 남자와 사귀게 된 거야.”
서은정은 억척스러운 표정으로 막 나가듯 말했다.
옆에 있던 들러리 박미주는 두 사람의 싸움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는지 입을 열었다.
“은정아, 내 생각엔 너희 두 사람 일단 결혼식장에 가서 예식을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아. 동생의 신혼집 계약금이 부족한 문제는 식을 올리고 나서 천천히 의논해 봐도 되잖아.”
진천하는 박미주의 말에 감격의 눈길을 보냈고 그는 그녀에게 늘 감사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박미주는 조금 시크하긴 해도 진천하는 그녀가 겉으로는 차갑지만 속은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박미주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도 이렇게 쉽게 서은정과 만나게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박미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정 어린 눈빛을 보냈고 두 사람의 눈짓을 본 서은정은 기분이 언짢았다.
“박미주, 동정하는 척하지 마. 네가 나더러 6천만 원도 못 내놓는 쓰레기한테 시집가라고 권했잖아. 그냥 내가 널 잘못 본 거로 치자. 이 쓸모없는 팔찌는 너한테 다시 돌려줄게. 저 쓰레기가 그렇게 불쌍하면 네가 결혼해 주면 되겠네.”
서은정은 손목에 차고 있던 호두 팔찌를 벗어 박미주에게 던졌다.
“이 호두 팔찌 네가 은정이한테 준거야? 언제 준 건데?”
진천하는 호두 한 알이 빠진 팔찌를 받아들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박미주를 바라보았다.
“6년 전에!”
박미주의 대답은 한결같이 간결했다.
진천하는 놀라움에 머리가 띵하고 울렸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알고 보니 팔찌의 주인은 박미주였고 그녀가 바로 18년 전 진천하에게 외투와 호두를 건네준 큰 눈의 소녀였다.
진천하는 5년 동안 서은정을 착각하고 잘못 사랑해왔던 것이었다.
“박미주, 나랑 결혼해 줄래? 네가 허락만 하면 널 아끼고 사랑하고 평생 지켜주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줄게!”